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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서는 안 되는 경기 (223/270)
  • 져서는 안 되는 경기

    “여기서 다니 카르발류는 이렇게, 위쪽으로 올라갈 겁니다. 주현, 실제로 그를 상대했을 때 어땠습니까? 측면에 머물렀을 때, 그리고 공은 전달받았을 때 다니 카르발류가 당신을 붙잡으려고 다시 내려왔나요?”

    “아, 아뇨.”

    “맞아요. 위험 상황이 되어도 풀백인 그가 곧바로 내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 측면 공간을 수비형 미드필더인 필 콜슨이 잡으니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칠판 위의 파란색 자석을 주현의 이름이 붙어 있는 붉은 자석의 옆으로 두었다.

    “여기서 우리의 문제점은 상대의 이 1차 수비를 빠른 시간 내에 뚫지 못했다는 겁니다. 막히거나, 혹은 뚫어내더라도 이미 시간이 지체되어서 상대의 수비 진형이 갖추어진 후죠. 그렇다면 의미가 없어진 겁니다.”

    동민은 지난 FC 마드리드와의 경기를 선수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3 대 0의 완패. 그 결과가 나온 이유는 FC 마드리드의 플레이가 완전히 그들의 생각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박주현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각각 돌파와 침투라는 무기를 가진 선수들을 양 측면 깊숙이 올려두면 상대 풀백의 전진도 막을 수 있고 공격 시에는 찬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동민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주현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측면 공간을 커버하던 필 콜슨에게 밀렸고, 상대 풀백의 전진 또한 차단하지 못했다. 베이포트 FC는 그렇게 측면에서부터 경기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 것이다.

    “또한 측면에서 상대 풀백의 전진을 막지 못하면서, FC 마드리드는 공격을 빠르게 진행해도 인원수 부족이 없었고요.”

    거기까지 이야기한 동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결과, FC 마드리드의 공격은 측면부터 힘이 실렸고 그걸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초반부터 무너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목소리는 자괴감이 가득했다. FC 마드리드의 모든 포지션이 다 위협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공수의 변환점이 되는 풀백을 막아야만 한다는 그의 생각을 옳았다. 그러나 그것을 막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점이 패배를 불러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민의 말에 선수들 또한 다리에 경련이 일도록 뛰어도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 해보고 패배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다시금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지난 경기의 분석은 여기까지. 어쨌든, 이번 경기에서는 상대 풀백의 공격 가담을 막는 방법을 바꾸려 합니다. 예전에 이야기했듯이 전 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동민은 그런 선수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방금 전까지 침통하게,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지난 경기의 패배 원인을 말하던 입과 자괴감 가득하던 눈빛은 그 패배를 반복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풀백의 공격 지원은…….”

    동민이 설명하는 것을 듣는 선수들의 눈빛도 동민의 영향을 받은 듯 방금 전과는 달랐다. 그런 선수들의 열의 어린 표정 앞에서 동민의 다음 경기 전술 설명은 한참 동안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 확실히 지치긴 지치네.”

    해리 맥스웰은 지친 몸의 피로를 샤워로 풀고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훈련에서 녹초가 된 느낌이었다. 오전에 있던 전술 설명에 이어 오후의 팀 훈련까지 하고 나자 심신이 모두 지쳐있었다.

    ‘저번 경기 이후 감독이 확실히 이를 갈고 있는 것 같네.’

    FC 마드리드에게 3 대 0의 참패를 당한 이후 동민은 다음 경기에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고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축구 말고 다른 일에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없어서 선수들 사이에선 워커홀릭이라는 별명으로 종종 불리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태도가 달랐다. 베이포트 FC를 맡은 뒤로 모든 힘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 때문인지, 동민은 옆에서 보는 이들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경기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브라운 수석 코치나 다른 이들이 땀을 뻘뻘 흘릴 정도니, 뭐. 아니, 우리가 할 말이 아닌가.’

    대패 이후 경기 준비에 매진하는 것은 동민뿐만이 아니었다. 해리 맥스웰을 포함한 선수들도 그때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참하리만큼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는 것은 2부 리그인 챔피언십에서도 잔류를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을 겪은 그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2시즌 동안, 그리고 이번 시즌 초반기까지 동민의 전술을 토대로 자신들의 플레이를 펼치면 적어도 상대와 경기다운 경기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만큼 패배의 충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 충격에 빠지던 것도 잠시, 압도적인 패배는 반대로 그들의 동기부여가 되어 곧 있을 FC 마드리드와의 2차전을 이를 갈며 기다리게 만들었다.

    “거기에 이번에는 나한테 지워질 책임이 막중하니까…….”

    베이포트 FC 의 부주장을 맡은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는 스스로가 다른 선수들을 책임지는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조나단 케인처럼 조용하게 선수들을 뒷받침하기는 하지만 그만큼의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고, 지난 AC 로마전에서의 올리비에 나스리처럼 다른 선수들을 휘어잡고 자극시키는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라운드 위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며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는 오전에 있던 전술 설명 때에 동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음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해리, 당신이 맡아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능력을 100퍼센트, 아니, 200퍼센트 발휘해 주어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고, 말고. 해야만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들뿐이니까.’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일,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동시에 잘하는 일이었다.

    “또다시 그때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당연했던 예전처럼 자신들의 한계를 정해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챔피언십에서도 잔류 경쟁을 펼치던 예전 베이포트 FC의 선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으며, 지난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민과 함께하면서 변한 그의 자존심이었다.

    “뭐가?”

    “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에딘 페트로비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별거 아냐. 그냥 다음 경기를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어서. 감독님도 나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하니까 부응하고 싶잖아.”

    혼잣말이 들렸다는 생각에 해리 맥스웰은 얼굴을 붉히며 얼버무리듯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에딘 페트로비치는 붉은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겨야지. 그렇게 작살나고도 아,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 끄덕이고 또 질 순 없잖아. 아무리 대단한 놈들이라도 또 저번처럼 무력하게 지고 싶진 않아.”

    에딘 페트로비치의 퉁명스러운 듯한 말을 들으며 해리 맥스웰은 새삼 그도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십에서도 바동거릴 무렵, 크로아티아 리그에서 스위스 리그로 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베이포트 FC에 왔던 그는 처음엔 팀이 패배할 때마다 씨근거리며 혼자 분을 삭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길 수 없는 경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저 한숨만 내쉬고 그 경기 자체를 잊으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다시 예전처럼 지는 것에 분노했다.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경기가 있다는 것에 순응하지 않고, 그럼에도 어릴 적처럼 쓸데없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다음 경기를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그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거기에 감독도 그렇고 다들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잖아. 그런데 또 지면 억울하지 않겠어?”

    에딘 페트로비치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걸어갔다. 해리 맥스웰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감독인 동민도,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를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도, 예전의 베이포트 FC를 아는 선수들도, 그리고 지금의 위치에 있는 베이포트 FC만을 알고 팀에 합류한 선수들도.

    모두가 지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다들 노력하고 있는 걸. 우린 더 이상 예전처럼 지면 지는가 보다, 하면서 우리보다 위에 있는 팀들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런 팀이 아니야. 이제는 이길 수 있어. 그게 지금의 우리 팀이니까.’

    해리 맥스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를 떴다.

    FC 마드리드와 베이포트 FC의 1차전이 끝나고 2주 만에 열리는 2차전에서 베이포트 FC에게 기대를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경기가 베이포트 FC의 홈 경기장인 브리큰돈 스타디움에서 열린다고 해도 지난 1차전에서 완패를 당한 베이포트 FC가 승리를 거둘 거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FC 마드리드의 선수들이 컨디션이 좋지 않고 반대로 베이포트 FC가 홈이라는 이점을 최대한 챙겨봐야 무승부, 혹은 1점 차 정도의 패배를 예상할 정도로 지금의 FC 마드리드는 무적의 팀처럼 느껴졌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 10경기 동안 고작 6골만을 실점한 수비진과 37골을 만들어낸 공격진, 올해의 선수를 받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골잡이 다니엘 루이즈의 존재, 모든 것이 FC 마드리드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경기처럼만 하면 된다. 상대는 전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팀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개인 능력에서 너희의 상대가 되질 못해.”

    FC 마드리드의 라커 룸 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몸값을 모두 합쳐봐야 여기 있는 너희 몇 명보다도 못하고, 그들이 받는 주급을 다 합쳐봐야 너희와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 팀에게 진다는 건 있을 수 없어.”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양 팀의 차이를 나타내는 말에 FC 마드리드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지난 시즌 유럽 최고의 팀이었고, 이번 시즌도 세계 최고의 팀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말한다면 오만하다든가 꼴불견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FC 마드리드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지난 경기처럼만 해. 어차피 이 조에서 16강에 진출하는 것은 확정이다. 4연승으로 1위를 확정 지어 놓도록 노력해라.”

    그 말을 끝으로 FC 마드리드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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