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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수 없는 팀 (221/270)
  • 막을 수 없는 팀

    AC 로마전에 이은 2연승은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자신감을 크게 높이기에 충분했다. 뒤이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1대1로 무승부를 거두면서 지난 시즌을 포함한 세 번의 맞대결에서 2무 1패라는 기록을 이어나가기는 했지만, 그 결과조차도 선수단의 사기에 흠집을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선수들뿐만 아니라 구단의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FC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도 의외의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녁식사도 거의 끝나갈 무렵, 샐리는 웃으며 말했다. 챔피언스 리그라는 무대에 선 것만 해도 팬으로서, 그리고 구단에 속한 사람으로서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2연승을 한 것은 더욱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샐리는 평소보다도 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쉽진 않겠지만, 또 모르니까요.”

    FC 마드리드와 AC 로마, 쾰른 07과 같은 조에 배정되었을 때, 베이포트 FC가 토너먼트에 진출할 것을 예상한 팬은 거의 없었다. AC 로마를 상대로 전반전 내내 압도당했을 때, 아무도 베이포트 FC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베이포트 FC는 지난 시즌 챔피언인 FC 마드리드와 같은 승점에 골득실에서 밀려 조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해 보이는 팀이라도 조금이나마 승리에 대한 기대를 품을 만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 꿈만 같은 것 같아요. 아, 물론 지금도 충분히 대단하지만요. 에헤헤.”

    그녀의 나사라도 빠진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저녁식사는 쾰른 07과의 경기가 끝난 뒤 본의 아니게 지인과의 대화를 방해했다며 그에 대한 사과로 그녀가 초대한 것이다. 수연과의 이야기도 거의 끝날 무렵이었으니 별로 상관없다는 것이 동민의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끊어진 것이 미안하다며 막무가내였다.

    그런 그녀의 호의에 결국 동민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외출이 즐거운 만큼 그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술은 안 마셨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웃는 걸 보는 건 즐겁기는 하지만…….’

    샐리는 와인 한 잔에 붉어진 얼굴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술도 그렇게 강하지 않은 주제에 언젠가부터 알코올 섭취가 자연스러워진 그녀를 보면서 동민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술에 대해 친근해졌는지는 따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키드 수석 코치의 근처에 있으면 다 조금씩 물들어가는 건가.’

    동민의 머릿속에서는 스코틀랜드 억양의 친근한 얼굴이 맥주잔을 들고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동민은 샐리가 저렇게 변할 정도라면, 그보다 훨씬 빈번하게 만나는 자신도 저렇게 변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앞으로는 브라운 키드와의 술자리를 줄여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어쨌든, 이렇게만 가면 정말로 토너먼트 진출도 가능할 것 같아요. 다 우리랑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팀들이었지만 이겼잖아요. 토너먼트에 진출하고, 그러다 보면 어쩌면 정말로…….”

    동민이 선수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승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샐리는 그 말을 자신의 입안으로 눌러 담았다. 말로 내뱉는 순간 그 꿈이 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말을 어물거리며 입을 다무는 그녀를 보면서 동민은 그녀가 뒤이어 하려고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게요. 어쩌면 이야기한 대로 될지도 몰라요.”

    그 말은 지금 동민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을 담은 말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와 있는 거야? 선수들의 식단에 맞춰서 같이 먹어줄 생각은 없는데.”

    동민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주현을 보면서 말했다. 주현은 훈련이 끝나고 여느 때처럼 가까운 동민의 숙소에 불쑥 찾아온 것이다.

    “무슨 소리야. 밥이야 이미 먹었지. 그냥 형도 지금은 한가할까 해서 놀러온 거야. 아무리 형이 워커홀릭이라도 휴식은 취해야 할 것 아냐?”

    가까운 숙소 덕에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은근슬쩍 숙소에 찾아오는 그를 보면서 동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영어도 꽤나 익숙해진 주현이 지금의 숙소를 떠나 새로 집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동민에게 가볍게 놀러올 수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워커홀릭이라니, 누가 들으면 매일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줄 알겠다. 어쨌든 지금은 쉬고 있으니까 상관없어.”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본래 감독의 숙소에 멋대로 찾아오는 선수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애초부터 이런 관계였던 이상 이제 와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훈련이나 경기 준비, 몸 관리에서 빠지는 녀석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친구한테 놀러오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사생활이나 다름없으니 감독으로서 말할 이유는 없지. 거기다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무 이유도 없이 오진 않을 테니.’

    동민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는 주현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건데?”

    주현은 아무 이유 없이 왔다고 했지만 보통 그가 오는 이유는 무언가 동민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팀 동료에 관한 이야기나, 경기에 관한 이야기, 혹은 정말 개인적인, 사소한 일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을 아는 동민은 주현이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곧바로 본론부터 물어보았다.

    “뭐야, 오늘은 왜 이리 급해? 쉬는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여자도 안 만나고 매번 나한테 와서 수다 떠는 게 취미인 후배를 보니 안타까워져서 그래.”

    “그건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농담이 섞인 동민의 말에 주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말이야말로 매일 일에 빠져 있는 동민에게 들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생활에 관해 농담과 진심의 선을 넘나들며 쓴소리를 해댔다.

    한참을 떠들던 주현은 이제 됐다는 듯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가게?”

    “응. 오늘은 정말로 그냥 잠깐 이야기나 할까 해서 온 거거든. 당장 내일모레에 세계 최강 팀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집에 그냥 있기 그래서.”

    그 말을 듣고서야 동민은 주현이 오늘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스톡포트 시티,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 AC 로마 등 여러 강팀들을 상대하긴 했지만 FC 마드리드는 그중에서도 느껴지는 무게가 다른 팀이었다.

    그들은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 경기부터 토너먼트, 결승전까지 총 13번의 경기 중 단 두 번의 경기에서만 패배를 허용하고 우승했던 팀이었다. 그 두 번의 패배조차도 이미 1위가 확정된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후보 선수들을 내세우며 거둔 1패, 그리고 4강전 1차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결승 진출을 거의 확정지은 상태에서 거둔 2 대 1의 패배였다.

    이번 시즌에도 프리메라리가에서 2위와 2점 차로 선두를 달리는가 하면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조 1위를 달리는 FC 마드리드는 지금까지 그들이 만나온 어떤 강팀보다도 더 우위로 느껴졌다.

    “…묘하게 입이 매끄럽다 했더니만 그런 것 때문이었냐? 하여간 간이 작다니까.”

    “별수 없잖아. 지난 시즌 유럽 챔피언에 세계 최고의 선수들로 가득한 선수단을 상대로 경기를 나선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더라고.”

    동민은 주현을 보면서 입을 비죽거렸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FC 마드리드에게는 비교적 최근에 강팀으로 부상한 스톡포트 시티에 부족한 역사적인 무게가 있었다. 또한 과거의 찬란한 역사에 비하면 주춤해진 AC 로마와는 달리, 현실적인 강함이 있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전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무리한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못 이길 팀은 아니잖냐. 지금도 승점만 따지면 동률이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팀들도 우리가 보기엔 다 까마득히 위에 있는 팀들이었는걸. 그렇게 위축되어 있으면 이길 경기도 못 이겨.”

    그렇기에 동민의 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놀라운 승리들을 거둬왔던 만큼 이번에도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싶었다. 아무리 베이포트 FC라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있다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네. 고마워. 어쨌든 좀 힘이 났어. 형 말대로 아무리 FC 마드리드라도 못 이기는 팀은 아니니까, 또 한 번 사람들 예상을 뒤집어 봐야지.”

    주현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나섰다.

    “…그러게. 못 이길 팀은 아니니까.”

    동민은 주현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동민은 경기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선수들이 부담감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자신이 상대에 따라 제대로 된 대응 전술을 들고 나온다면, 선수들이 그 전술을 제대로 따라준다면, 못 이길 팀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에게 지금도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냐고 묻는다면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었다.

    벌써 세 번째 골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동민은 무릎부터 무너지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직 30분 정도가 남았지만 경기 스코어는 벌써 3 대 0. FC 마드리드의 완승으로 굳혀지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응 전술을 들고 나왔는데…….’

    동민은 눈가를 감싸 쥐었다.

    FC 마드리드의 경기를 몇 번이나 보면서 그들의 전술을 파악하던 동민이었다. 그들은 팀의 간판 선수이자,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가 있었지만 그 한 명에게 의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중앙 수비는 튼튼했고, 측면은 빠르게 움직이며 공수 모두의 축이 되었으며, 중원은 매끄럽게 공을 연결했고, 공격진은 환상적으로 그것을 마무리했다. 어느 포지션도 구멍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동민은 승리를 위한 열쇠를 찾아냈다. 양 풀백이 공격 가담이 많은 것을 노려서 박주현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를 넓게 벌리는 등 FC 마드리드의 맞춤 전술을 들고 나섰다.

    ‘이거라면 충분히 경기가 할 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어.’

    베이포트 FC 측에서 실수가 나온 것이 아니었다.

    동민이 상대의 전술을 예측한 후 들고 나선 전술에 크게 구멍이 난 것도 아니었다.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이 동민의 전술을 따라주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기는 완벽하게 FC 마드리드에게 넘어가 있었다.

    ‘선수들의 기본적인 차이가 이 정도로 심하게 날 줄이야.’

    동민은 베이포트 FC의 감독이 된 이후 처음으로 경기를 보면서 어떠한 대책도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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