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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예상했던 결말 (220/270)
  • 누군가에겐 예상했던 결말

    ‘이걸로 확실해졌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나는 팀들이 더 강팀들이긴 하지만 오히려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나는 팀들은 우리 팀에 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덜 되어 있어.’

    동민은 2 대 0으로 경기를 끝내고 확신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나는 팀들은 대부분 프리미어리그 내의 팀들보다 더욱 전력이 강한 팀들이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베이포트 FC가 다른 리그의 팀들을 상대로 경험이 부족한 것처럼 그들 또한 베이포트 FC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베이포트 FC가 지난 시즌 돌풍을 일으킨 이후, 프리미어리그 내에서 베이포트 FC를 상대하는 팀들은 대부분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처럼 자신들의 전술에 대한 확신이 있는 팀들은 베이포트 FC가 자신들의 맞춤 전술을 짜온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전술을 밀고 나왔다. 동민과 베이포트 FC가 어떤 전술을 들고 나오든 자신들의 전술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동민의 전술 변화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들의 경기를 고집했다.

    다비드 페레즈가 이끄는 스톡포트 시티처럼 전술 변화에 자신 있는 팀들은 역으로 베이포트 FC가 어떻게 나오려 할지 예측하고, 그 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그들은 베이포트 FC 측에서 마음대로 경기를 이끌어 나가게 놔두기보다는 역으로 당할 위험성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경기를 끌고 나가려 하는 팀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팀들은 베이포트 FC가 대처하지 못하도록 자신들 특유의 전술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다른 경기와 다른, 자신들 특유의 플레이를 버리고 새 옷을 입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쭙잖게 똑같이 나서거나 애매한 변화를 주려다가는 충분히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직접 경험했다.

    그것은 한 시즌간 동민과 베이포트 FC라는 팀과 적어도 두 번은 맞부딪치면서 경험한 노하우와도 같았다. 그 탓에 시즌 초반이지만 다른 팀들 사이에서 지난 시즌만큼의 충격적인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리그 팀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의외의 성적을 거두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리그의 일이었다.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스 리그에 진입하거나, 혹은 갑자기 소속 국가가 바뀌면서 그들과 같은 리그가 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베이포트 FC와 만날 일이 없었다.

    아무리 신기한 팀이고 흥미로운 전술을 쓴다고 해도 자신들의 리그 팀들에 집중하는 것이 그들에겐 더 우선순위가 높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나는 팀들을 분석하는 것이 더 급했다. 베이포트 FC가 얼마나 신기하고 대단하든 만나지 않는 이상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시즌,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그들은 확실한 대비책 없이 상대에 따라 전술을 바꾸는 끔찍한 팀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AC 로마도 쾰른 07도 분명히 강팀이고, 그들의 스타일이 확실하게 잡혀 있는 팀이기는 하지만 우리 팀에 대한 대응은 오히려 어색했으니까.’

    AC 로마는 자신들의 경기 방식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다. 그만큼 베이포트 FC에 대한 경기 준비도 베이포트 FC의 특수성에 맞추어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챔피언스 리그 진출 팀이라는 상대에 걸맞게 이번 시즌 베이포트 FC의 경기들을 분석하며 착실하게 준비하고, 조금의 방심도 없이 베이포트 FC를 상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결과 베이포트 FC가 스스로 자멸하던 전반전에는 경기를 압도할 수 있었지만, 준비했던 전술을 확실하게 드러낸 후반전에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AC 로마는 자신들의 경기 스타일을 100퍼센트 발휘하는 것도, 베이포트 FC에게서 경기 주도권을 뺏어오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쾰른 07은 AC 로마와는 달랐다. 그들은 베이포트 FC가 AC 로마를 꺾는 것을 보았고, 동민의 스타일을 알고 있는 수연이 베이포트 FC의 전술에 대한 대비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살리면서 베이포트 FC가 이번 시즌 보여준 장단점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경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모자랐다. 이번 시즌에 보여준 모습들을 바탕으로 경기를 준비하는 것은 베이포트 FC의 극히 일부에만 집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일부만을 가지고 준비를 한 경기는 베이포트 FC에게 완전히 짓눌리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지금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났던 두 팀 모두 프리미어리그의 팀들과는 달랐어. 직접 마주쳐 본 경험 자체가 없었으니까.’

    같은 리그에서 충돌하면서 대응책을 찾아가는 프리미어리그의 팀들과는 달리, 타 리그의 팀들은 베이포트 FC라는 이레귤러에 대한 대응 방식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었다.

    “…AC 로마와의 경기가 끝나고 혹시나 했지만 이 정도면 확실해. 걱정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아.”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미소지었다.

    챔피언스 리그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오히려 생각지 못한 장점을 가지게 된 느낌이었다.

    ‘뭐, 두 번째로 만나게 되면 확실히 맞춤 대비를 해올 가능성이 크지만 그 전에 비교적 쉽게 승점을 챙겼다는 게 중요하니까.’

    죽음의 조라고까지 불리는 E조에서 이걸로 6점의 승점을 따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같은 시간 시작한 FC 마드리드와 AC 로마의 경기가 2 대 0이라는 결과로 끝났다는 걸 생각하면, 베이포트 FC는 이걸로 FC 마드리드와 같은 승점 6점에 득실차에서 밀리는 2위를 유지한 것이다.

    “이걸로 16강 진출에 더 다가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못 보던 사이에 더 약아진 거 아닌가요? 선발 명단으로 혼란을 주고 거기에 철저하게 중원을 봉쇄하다니.”

    “수연 씨야말로 그동안 말이 너무 심해진 것 같은데요.”

    “칭찬이에요, 칭찬.”

    브리큰돈 스타디움의 통로에서, 경기에서 진 원한과 반가움을 담아 내뱉는 수연의 말에 동민 또한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하는 말과 다르게 표정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못 보던 사이에 약아졌다는 건 전말로 칭찬이에요. 경기를 앞두고 있던 기자회견에서도 박주현이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해리 맥스웰의 부상이나 결장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나왔으니까요. 완전히 예상 밖이었어요.”

    수연은 한숨을 내쉬듯 내뱉었다.

    상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전술의 선택, 그리고 일방적으로 상대의 강점을 짓누르고 약점을 들추어내는 방식. 전부 과거의 동민과 비슷하기는 해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특히 상대의 심리적인 동요를 이끌고 그것을 토대로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마치 축구가 아닌, 장기나 바둑 같은 게임에서의 심리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함께 성남 페가수스에 있을 때의 동민이 선수들의 움직임과 전술을 분석해서 마치 시험 문제의 답을 만들어내듯 전략을 짰다면, 지금은 달랐다. 단순히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것을 넘어 출제자를 끌어들여 답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감독님은 더했겠지.’

    그녀는 경기가 끝나고 동민과 악수를 하러 걸어가기 직전까지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패배감에 손을 떨고 있던 미하엘 라인하르트를 떠올렸다. 감독으로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속을 태우는 불이 되어 그를 사로잡은 것처럼 보였다. 승리한 팀의 감독인 동민과 악수를 할 때에는 완벽하게 표정을 숨기고 스스로를 통제했지만, 평소 그의 성격을 아는 수연으로서는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상상이 가능했다.

    “그래야만 하는 게 감독이라고 배웠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더 강한 팀들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녀가 알고 있던 동민은 감독이 아닌, 전술 분석관으로서의 동민이었다. 팀을 이끄는 중심은 따로 있고,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어떻게 하면 다음 경기의 상대 팀보다 전술적으로 우위에 있는지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팀 선수들을 이끄는 것도, 경기의 책임을 지는 것도 그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민이 주안 대신 경기 전술을 책임지고 FA컵 경기들을 맡고 있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팀의 전면에 서는 사람도, 선수들을 이끄는 사람도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선수들을 책임져야 했고, 팀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감독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에 와서, 그리고 감독을 맡으면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거기에 벌써 감독으로서 2년 차인데 그 정도 관록도 안 붙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목소리에는 감독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수연은 그녀와 그의 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멀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프로로서 이 무대에 제대로 서게 된다면 몇 년 정도의 차이는 조만간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그와 그녀의 차이는 너무나도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코치인 그녀와는 달리, 동민은 이미 감독으로서 바로 서 있었다.

    “거기에 그렇지 못하면 전 감독님한테 왕창 깨질게 뻔하고요. 겉으로 보이게 화만 안 내지 사람 밑바닥 끝까지 박박 긁으신다니까요. 차라니 화를 내시는 편이 나을 텐데…….”

    이야기를 계속하던 동민은 수연이 어느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야유와 농담, 반가움을 한데 섞어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 또한 바닥을 보고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수연 씨?”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면서 물어온 동민에게 수연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같은 듯, 같지 않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쉽네요. 경기에서 이겼으면 꽤 한참 동안 이야기하면서 놀려주려고 했는데. 그런데 져버렸으니까 그럴 수는 없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어보려던 동민은 그녀의 눈 속에서 아쉬움과 마음속의 무언가가 떨어진 듯한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이 패배는 우리 홈에서 있을 2차전에서 되갚아줄 테니까요. 기대하고 있으라고요.”

    동민이 그 말에 무언가 대답을 하려던 찰나, 수연은 그의 입을 막듯 말을 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그만 가봐야겠어요. 감독님이 아무리 시간을 줬어도 돌아가서 같이 선수들을 위로하거나 오늘 경기를 되짚어보거나 해야 할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인사 대신이라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동민이 뒤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샐리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럼 가볼게요. 2차전 때 만나요.”

    수연은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더 이상 패배의 아쉬움도, 오랜만에 만난 동민에 대한 반가움을 포함한, 복잡한 감정들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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