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끝나고 난 뒤
베이포트 FC가 이겼다.
그 사실 자체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축구는 무승부로 끝나는 경기를 제외하면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있고, 그중 한 팀이 그들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한 경기가 챔피언스 리그라면 조금 달라진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챔피언스 리그에 나선 적 없던 팀이 첫 경기부터 승리를 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 팀이 AC 로마, 하물며 경기가 벌어진 곳이 AC 로마의 홈 경기장인 스타디오 디 로마라면 그것은 흥미로운 것을 넘어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일로 변한다.
챔피언스 리그 첫 출전에 불과한 팀이 전통의 강호인 AC 로마를 상대로, 그것도 지옥의 원정길, 원정 팀의 무덤이라 불리는 스타디오 디 로마에서 역전승을 챙겨갔다는 것은 이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과만 두고 본다면 AC 로마가 홈에서 약팀을 상대로 가볍게 준비했다가 일격을 당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들은 그들의 장기인 수비 축구를 구사했고, 상대의 경험 부족을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지만 결국은 패배한 것이다.
“…정말로 상상한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야.”
다비드 페레즈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가 이끄는 스톡포트 시티 또한 조별 리그 첫 경기를 4 대 0이라는 대승으로 산뜻하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베이포트 FC의 승리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조가 결정될 때부터 강팀들 사이에 끼인 희생양이란 평가를 받던 베이포트 FC는 그 강팀 중 하나인 AC 로마를 거꾸러뜨리면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그리고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은 스톡포트 시티의 감독인 다비드 페레즈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동민과 베이포트 FC가 FC 마드리드와 AC 로마, 쾰른 07이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팀들을 상대로 이어지는 조별 리그전의 시작을 역전승으로 시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AC 로마의 홈에서 승리를 따내는 건 아마 우리 팀도 확신하지 못하겠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AC 로마만큼 단단한 수비를 자랑하는 팀은 몇 팀 되지 않아. 게다가 로마 원정은 열정적이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의 홈 팬들의 앞에서 치르는 경기인 만큼 그 부담감은 보통이 아니고.’
그는 지난 경험으로 로마 원정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단한 수비와 강한 역습 축구를 기초로 하는 AC 로마의 경기 스타일은 그가 중요시하는 점유율 축구에겐 자칫하면 쥐약과도 같은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비록 지금은 예전보다 떨어졌다고 해도 그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끈기와 승리를 향한 열망은 다비드 페레즈를 골치 아프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때문에 제아무리 명장이라 칭송받는 다비드 페레즈와 강팀이라는 평가를 받는 스톡포트 시티라 해도 AC 로마와의 원정 경기는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베이포트 FC의 원정 승리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힌트를 준 게 실수였을지도 모르지.’
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겨울, 슬럼프로 휘청거리던 동민과 베이포트 FC에게 간단한 힌트를 주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동민이 그의 말에서 어떤 답을 찾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시즌 초반의 돌풍 같던 기세를 잃고 주춤거리던 베이포트 FC는 다시 연승을 이어나가면서 부활했다.
더욱이 그 후에는 그가 이끄는 스톡포트 시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프리미어리그를 넘어서, 만약 챔피언스 리그에서 부딪친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그의 패배로 끝난 지난 맞대결 이후 아직 베이포트 FC와 스톡포트 시티의 경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 팀이 리그에서 만나는 것은 10월 하순으로 아직 한 달 정도는 남아 있었다. 지는 것이 싫다고 말했던 그의 복수전까지는 아직 그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만약에 리그 내에서뿐만 아니라 챔피언스 리그에서 마주친다면 그때는 베이포트 FC를 상대로 지난 경기의 복수를 해줄 생각이었다.
‘아직 조별 리그도 한 경기를 했을 뿐이고, 나머지 FC 마드리드와 쾰른 07도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인 데다가 한번 일격을 당한 AC 로마도 더 칼을 갈고 나오는 만큼 쉽지는 않겠지.’
그러나 다비드 페레즈의 직감은 한 가지 사실을 고하고 있었다. 베이포트 FC와 동민은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만나자면 8강 이상인가. 그랬으면 좋겠네.”
지난 시즌, 1위를 거의 확정 지어가는 상태에서 만나긴 했지만 베이포트 FC에게 일격을 당한 것은 그에게는 충분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 복수를 하는 것은 리그 내에서도 좋지만 가능하면 더 큰 무대에서, 상대가 더 큰 꿈을 좇고 있을 때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러자면 지금보다 더 대단한, 말 그대로 마법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겠지만.’
그는 입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같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이라 8강 이후에나 만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하는 문제는 오직 베이포트 FC가 올라오지 못하는 일뿐이었다. 혹여나 그가 이끄는 스톡포트 시티가 8강 토너먼트에 합류하지 못한다는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전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팀이라는 평가를 듣는 스톡포트 시티의 감독이며, 동시에 유럽 챔피언스 리그의 타이틀을 두 번이나 손에 쥐었던 그의 자신감이었다.
“너무 우쭐거리지만 말아줘요. 승리 한 번에 정신이 팔려서 그 이후에 어처구니없이 지기라도 하면 창피하잖아요.”
앨런 휴즈의 말에 동민은 쓰게 웃었다. AC 로마를 상대로 한 기적적인 역전승에도 그의 스승은 절대 우쭐대거나 안도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전화를 통해 같은 말을 했던 병렬을 생각하자 동민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그의 두 스승이지만 이런 면만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도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둘 리가 없으니까요.”
동민은 피쉬 앤 칩스 한 덩이를 입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세 사람은 앨런 휴즈의 건강이 회복된 이후로 다시 예전처럼 펍에 모여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처음에는 앨런 휴즈의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반대하던 동민이었지만, 그 편이 더 익숙해서 편하고 무엇보다 펍이라고 해도 자신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앨런 휴즈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는 동민의 말에 당황한 것은 목구멍으로 신나게 맥주를 흘려 넘기던 브라운 키드였다. 그는 곧바로 그 술을 모두 넘기고 대답했다.
“…꺼억, 당연하죠.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제가 있으니까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입에서 풍기는 강렬한 알코올 냄새에 앨런 휴즈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미 그의 이런 광경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앨런 휴즈와 함께 일할 때에도, 일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알코올과 친한 사람이 바로 브라운 키드였다. 그것은 그와 2부 리그에서 잔류를 위해 몸부림칠 때에도,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모두를 놀라게 만든 첫 승을 거둔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지만.’
앨런 휴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민을 바라보았다. 처음 퍼스트 팀으로 불렀을 때의 그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위치는 비디오 분석관에서 전술 코치를 거쳐 감독이 되었고, 베이포트 FC는 매년 챔피언십 잔류를 위해 싸우던 팀에서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팀이 되었지만, 동민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면 쓸데없는 걱정만 는다더니.’
앨런 휴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건강이 악화되고 나서 더욱 심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으로 가져가려던 물컵을 다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이후로 몸은 괜찮은 거죠? 감독이 그렇게 꼴사납게 쓰러지는 일이 또 있다가는 선수들 통제에도 어려움이 생길걸요.”
“물론이죠.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피로가 좀 쌓였던 것뿐이니까요. 그 이후로 병원에서도 별문제 없다고 했었고요.”
놀리듯 말하는 앨런 휴즈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걱정에 일부러 더 힘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도 역시나인가.’
프리 시즌에 있던 그 일 이후 앨런 휴즈는 만날 때마다 건강에 대한 잔소리를 한마디씩 늘어놓기 바빴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 없이 흘러가나 했지만 역시 그의 걱정은 빠지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도 경기를 준비하고 상대 팀의 영상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쏟으며 밤샘을 하거나, 늦은 시간까지 대응 전술을 모색하는 경우가 있어서 조금 양심의 가책이 들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의 대답에 안심한 듯 앨런 휴즈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물을 마셨다. 브라운 키드 또한 그의 행동에 경쟁이라도 하듯 어느새 나온 네 번째 맥주잔을 입가로 옮겼다.
“앨런도 꽤나 들떠 보였네요. 그렇죠?”
가게를 나와 먼저 집으로 향하는 앨런 휴즈를 배웅하고는 브라운 키드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사람이 이렇게 마셔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의 술을 배 속에 들이부었던 그였지만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서 알코올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네요. 우리도 돌아가죠. 꽤나 늦은 시간인걸요.”
AC 로마를 상대로 한 챔피언스 리그 첫 승이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동민도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둘이서 해봐야 결국 자신들의 자랑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승리를 축하하는 것은 선수들과 다른 스태프들이 있을 때뿐, 그 이외에는 지금의 승리를 빠르게 잊고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말을 아끼듯 짧게 이야기하고 고개를 돌리는 동민을 보면서 브라운 키드는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금욕적이라고 할지, 앨런이 걱정할 필요 없이 너무 딱딱하다고 할지.’
그는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 앞에서는 자랑스러운 승리라며 신나 있던 동민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모습과는 반대로 차분하게 승리의 흥분에서 벗어나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려는 동민의 모습 또한 눈에 담았다.
‘뭐, 이게 이 청년이 대단한 이유겠지, 주위에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점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앨런 휴즈가 걱정하던 것과, 그리고 자신이 대비하던 것과는 다르게 동민은 자신과 팀을 통제하고 있었다. 감독을 맡은 지 1년 하고 조금 더, 팀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는 3년째.
동민은 점점 더 감독이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짧은 기간 내에 이 정도라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바뀔지, 이러다간 오래 지나지 않아서 내 자리가 필요 없어질지도 모르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민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