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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나스리에게 기대한 것 (216/270)
  • 올리비에 나스리에게 기대한 것

    ‘올리비에 나스리한테 기대하던 모습이 이제야 보이는 건가.’

    올리비에 나스리가 팀원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동민은 멀찍한 곳에서 슬쩍 바라보고 있었다. 자칫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간다면 팀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바라보는 동민의 표정은 오히려 만족스러워 보였다. 올리비에 나스리가 다른 팀원들을 나무라는 지금의 상황은 동민에게 전혀 의외의 사태가 아니었다.

    ‘영입할 때부터 챔피언스 리그를 포함한 큰 무대에서의 오랜 경험이 목적이었지. 예상보다 늦은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야. 뭐, 지금까지는 저런 일이 나올만한 상황이 드물었으니까…….’

    올리비에 나스리의 경험은 현재 베이포트 FC에 있는 누구보다도 많았다. 큰 경기에서 어떻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이겨내는지, 많은 관중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계속할 수 있는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베이포트 FC 선수단 내에서 없었다. 그만큼 조용한 타입의 주장과 부주장인 조나단 케인과 해리 맥스웰과는 다르게, 다른 선수들이 흔들릴 때 그들을 붙잡아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잘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올리비에 나스리 본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갑작스럽게 폭발할 수 있는 그의 불같은 성격은 팀을 이끄는 역할에 전혀 맞지 않았다. 도리어 감독이나 다른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경험이 많은 선수들이 모두 팀을 이끌 수 있는 그릇은 아니듯,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안고 있다고 해도, 그를 토대로 본인이 아직도 건재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적절하게 다른 선수들에게 전달해 줄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 점을 어떻게든 고쳐놓을 수밖에 없었어. 아무리 경험이 많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어도 본인만 그렇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걸.’

    동민은 그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올리비에 나스리에게 다른 선수들을 다잡아주는 역할을 기대하려면 그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동민은 시즌 개막 전에 이미 올리비에 나스리에게 특성을 부여했다. 그렇게 동민이 올리비에 나스리에게 넣은 특성은 ‘리더’였다.

    본래 그를 영입하면서 동민이 생각한 것 중 하나는 올리비에 나스리의 특성 중 하나인 ‘불같은 성격’을 그의 능력으로 삭제해서 올리비에 나스리가 수비와 팀의 지주가 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FC 마드리드를 떠난 후부터 가는 팀마다 불화를 만들었던 것은 그의 특성인 ‘불같은 성격’ 탓이었다. 그것을 없앨 수 있다면 충분히 그의 경험을 토대로 팀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거라 동민은 확신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OSC와의 경기 직후 강화된 능력 덕분에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성의 삭제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특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 동민이 택한 것은 ‘불같은 성격’의 삭제가 아닌, 새로운 특성인 ‘리더’의 추가였다. 다른 선수들을 그라운드 안팎에서 이끌어줄 수 있는 선수들에게 있는 특성인 ‘리더’를 그에게 부여하면서 조용히 선수들을 지지하는 조나단 케인이나 해리 맥스웰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리더가 생겨난 것이다.

    다른 선수들을 자극하면서도 그들을 잡아끌어 줄 수 있는 올리비에 나스리의 역할은, 경험 많은 그가 조용한 편인 주장과 부주장의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동민이 찾은 새로운 옵션이었다.

    조나단 케인도, 해리 맥스웰도 선수들을 조용하게 믿어주는 리더이기는 하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 동료들에게 충격에 가까운 자극을 주고 그들을 이끄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역할은 모두 동민이 나서서 해냈지만 그라운드 밖에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과, 그라운드 내에서 선수가 다른 선수들을 휘어잡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게 이제야 빛을 발한다는 거지.”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후반전은 전반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 분명했다.

    후반전을 맞은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움직임은 크게 달라졌다. 움직이는 방식이나 전술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챔피언스 리그라는 무대의 규모에 짓눌려, 8만 명이 넘는 관중들의 야유와 함성에 발이 묶여 스스로 무너지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준비했던 모습들을 차근차근, 그러나 확실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크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는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였다.

    지난날 자신이 그라운드의 주연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부상으로 인해서 기대받은 만큼 성장하지 못한 압박감, 그 두 가지 사이에 크게 흔들리던 그는 심리적으로 성장한 지금도 부담감에 취약한 편이었다. 사람들의 야유와 환호에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이 없어지는 타입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력하는 그였지만, 흔들리는 것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작전과는 다르게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움직이는 그의 헌신은 오히려 허둥대는 다른 선수들과 더욱 엇박자를 이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완전히 침묵하던 전반전이었다.

    상대를 빠르게 헤집어야 했던 그의 드리블은 제때 끊을 타이밍을 잃고 늘어졌고, 수비진 사이로 절묘하게 이어졌어야 할 패스는 빗나갔다. 베이포트 FC의 모든 선수들이 실망스러운 활약을 보였지만 그중에서도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부진은 베이포트 FC로서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빈 공간과도 같았다.

    그러나 후반전이 시작된 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모습은 전반전과 180도 달라져 있었다.

    ‘또?’

    AC 로마의 좌측 풀백인 토마스 레들리는 경악과 분노를 담아 마음속으로 외쳤다. 전반전 내내 속된 말로 죽을 쑤던 베이포트 FC의 우측 윙은 후반전이 되자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를 농락하고 있었다.

    사이드라인을 따라 돌파할 거라 생각하면 화려한 발재간으로 공의 진로를 바꿔 안쪽으로 들어갔고, 크로스를 올릴 거라 예상하며 달라붙는 순간 가볍게 그를 제치고 골문 앞까지 이어지는 날카로운 패스를 날렸다. 전반전에 혼자서 무너지던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대는 AC 로마의 강력한 수비진에 맞서 날아다니듯 활약하고 있었다.

    물론 그대로 분위기를 내줄 AC 로마가 아니었다. 홈 경기장이라는 이점을 등에 업고, 오랜 챔피언스 리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애매한 파울들로 상대의 공격을 끊고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8만 명이 넘는 대관중의 목소리가 베이포트 FC 선수들을 짓누르고 붙잡고 잡아끌었다.

    상대의 분위기가 바뀐 정도로, 이미 자신들 쪽으로 기운 경기를 쉽게 내주는 것은 AC 로마의 방식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붙잡은 승기를 계속 붙잡고 늘어지면서 상대의 빈틈을 찾아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 그것이 AC 로마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베이포트 FC 또한 그 방식에 전반전만큼 쉽게 휘말리지 않았다. 그들은 수비 라인에서 이어지는 두 리더의 지휘로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선수들이 나오면 곧바로 되돌리며 경기를 이어나갔다.

    애매한 파울로 공격이 끊어졌을 때 분노하는 선수들을 조나단 케인과 해리 맥스웰이 차분하게 달랬다. 구름처럼 많은 AC 로마 홈 팬들의 함성에 마음이 흔들릴 때면 올리비에 나스리가 날카로운 일갈로 그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후반전은 전반전과 같은 전술로 진행되었지만 선수들의 움직임은 전혀 달라져 있었다. AC 로마의 일방적인 경기로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양 팀은 치열하게 서로 경기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베이포트 FC가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개인 돌파에 이은 빠른 패스로 기회를 만들었다가도, AC 로마 공격의 키인 프란체스코 줄리오의 환상적인 중거리 슛으로 경기의 분위기를 되찾아 왔다.

    두 팀은 어느 한 팀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의 철학을, 열기를 부딪쳤고 경기장은 그만큼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골만큼은 터지지 않았다. 양 팀의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들은 공중 높이 뛰어서, 몸을 내던져서, 몸을 기울이던 역방향으로 뒤틀어서 공을 막아냈다. 단 한 골이라도 터지는 순간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넘어가 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양 팀의 공수가 뒤바뀌는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후반전의 남은 시간도 점점 더 줄어만 갔다.

    그러나 결국 후반 31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패스를 받은 박주현의 동점 골이 터져 나왔다.

    우측 사이드라인에서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본인의 장기인 드리블을 선보이는 대신 골문 좌측으로 공을 길게 넘겼고, 그 공은 거기서 기다리던 박주현의 가슴으로 향했다. 가슴으로 공을 받아낸 주현을 막기 위해 AC 로마의 수비수가 달려들었지만, 주현은 가슴을 맞고 떨어지는 공을 오른발로 다시 띄워 올리며 가볍게 그를 제쳤다.

    그리고 그의 왼발 슈팅은 골키퍼의 다리 사이로 빠져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난공불락의 성처럼 느껴지던 AC 로마의 골문을 확실하게 열었다.

    지금껏 땅이 울릴 정도로 요란하던 스타디오 디 로마가 침묵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1 대 1, 경기는 이제 완벽하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분위기는 오히려 베이포트 FC 측으로 넘어간 뒤였다. 지금껏 그들이 1 대 0이라는 경기 내용에 맞지 않게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치고 있던 이유는 어느 팀이든 단 한 골이라도 나오는 순간 경기의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AC 로마가 추가골을 넣는 순간 베이포트 FC의 공격은 무너지고 경기는 확실하게 AC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반대로 베이포트 FC의 공격이 성공하여 동점을 만드는 순간 1 대 1이라는 스코어를 넘어 경기 주도권은 베이포트 FC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기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 지으려던 AC 로마의 방식이 근본부터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중요한 한 골은 베이포트 FC로부터 터져 나왔다. 13분 뒤인 후반 44분 해리 맥스웰의 슈팅이 키퍼를 맞고 흐르자, 그것을 놓치지 않고 로날드 조던이 침착하게 파고들었다.

    경기가 끝나가면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집중력이 저하되는 시간에 나온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에 지금껏 골문을 수호하던 골키퍼도 급하게 쳐낼 수밖에 없었고, 이를 로날드 조던이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것이다.

    2 대 1, 전반전에 1 대 0으로 끝날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베이포트 FC의 역전승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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