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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감이라는 짐 (215/270)
  • 부담감이라는 짐

    전반전이 끝난 후, 그리 많지 않은 수의 베이포트 FC 원정 팬들은 아직 절반의 경기가 남아 있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기 힘들었다. 챔피언스 리그의 문턱은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높았던 것이다.

    전반전 내내 베이포트 FC는 본인들이 준비한 플레이는 조금도 펼치지 못한 채 완전히 상대에게 몰려 있었다. 가장 앞에서부터 상대의 공격을 차단해야 했지만 홈팬들의 기세에 눌린 듯 선수들의 몸은 무거워 보였고, 그들을 위해 응원하는 원정 팬들의 목소리는 훨씬 더 많은 홈팬들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선수들부터 팬들까지, 베이포트 FC의 모두가 AC로마를 상대로 완벽하게 무너져 있었다.

    경기의 마지막까지 응원하는 것이 팬이지만 그들은 단 45분 만에 챔피언스 리그의 높은 벽을 새삼 실감했다. 그리고 이번 경기의 승리에 대한 기대보다는 선수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고 다음 경기부터는 주눅 들지 않기를 기원했다. 지난 시즌 좋은 성적으로 팬들을 놀라게 했던 선수들이지만 지금 속해 있는 E조에서 최약체인 것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이포트 FC 팬들의 바람을 안고 경기는 후반전으로 넘어갔다.

    ‘뭐지? 올라오지 않는 건가.’

    후반전이 시작되고, 전반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베이포트 FC의 진영을 보면서 안토니오 산치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들은 그저 중앙 수비수인 롭 코튼을 같은 포지션인 올리비에 나스리로 교체했을 뿐이었다.

    ‘롭 코튼이 잘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은 중앙 수비수 한 명이 바뀐다고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교체로 들어온 올리비에 나스리는 그도 잘 아는 선수다. FC 마드리드 시절 탄탄한 수비와 제공권, 선수들의 사기를 높이는 열정 등을 겸비한 세계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였다. 그러나 새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난 이후로는 가는 팀마다 불화를 일으키고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선수임에 틀림없었다.

    ‘올리비에 나스리의 실력이 좋은 것은 맞다. 그러나 저 둘을 교체하면서 무슨 전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예전부터 롱패스가 좋은 선수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걸 공격 옵션 중 하나로 삼기는 힘들다. 게다가 아무리 올리비에 나스리가 롱패스를 전달해도 그 공을 받아줄 선수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지.’

    안토니오 산치스는 베이포트 FC가 이번 교체로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볼 때에 이번 교체는 그저 어린 선수 한 명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운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전반전 동안 AC로마를 상대로 무기력한 모습을 노출하며 선제골을 허용하고, 질질 끌려가던 베이포트 FC가 취할 수 있는 행동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째, 이미 내준 골을 따라잡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더욱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AC로마의 수비진을 공략하려 시도하는 것.

    가장 그들이 취할 가능성이 높은 행동이었고, 동시에 가장 대응하기 쉬운 쪽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안토니오 산치스는 선수들의 간격을 더욱 좁히면서 중원부터 빡빡하게 상대의 공간을 없애려 했다.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설수록 AC로마 또한 베이포트 FC의 수비를 공략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 완전히 상대에게 끌려가는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 이상 상대에게 위험한 장면을 내주지 않는 것을 목표로 수비를 탄탄히 하면서 역습을 노리는 것.

    섣불리 나서면 오히려 AC로마가 역습으로 추가골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 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안토니오 산치스는 상대가 그렇게 나온다면 최대한 자신들의 진영에서 공을 돌리며 상대를 끌어내고 틈을 만들 생각이었다.

    세 번째, 이 경기에서의 승리를 포기하고 더 이상 골을 내주지 않는 것을 1순위로 수비에만 집중한다. 조별 리그에서의 경기는 한 팀당 두 번 씩 만나는 6번으로, 한 경기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다른 경기들을 승리한다면 16강 진출의 가능성은 충분히 살릴 수 있다. 6전 6승으로 16강에 진출하는 팀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드문 경우고, 대부분의 팀들은 조 1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1, 2번의 패배는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이포트 FC 또한 이 경기에서 너무 많은 실점을 허용하는 것만 막고 선수들의 사기를 수습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려 할지도 몰랐다.

    ‘물론 조에 속한 팀들이 우리 팀을 비롯해 FC 마드리드, 쾰른 07이라는 점에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어느 한 팀도 베이포트 FC보다 쉬워 보이는 팀이 없다는 점에서 한 경기를 그대로 내준다는 것은 4위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시작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안토니오 산치스 또한 상대가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그 세 가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베이포트 FC는 전반전에 철저하게 실패한 전술을 버리고 다른 방법으로 도전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저 중앙 수비수 단 한 명만을 교체하고 전반전과 달라지지 않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AC로마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방법이라 해도, 지금 당장 선수들이 맞춰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른 전술을 고려하든, 선수를 교체하든 다른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감독이다. 그러나 베이포트 FC는 그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수비에만 집중하는 세 번째 방법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 굳이 대비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전반전과 아예 같은 방식을 택하겠다고?’

    후반전이 시작되고 경기를 지켜볼수록 안토니오 산치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은 더욱 커졌다.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이 처음에는 의문이었다면 지금은 분노였다. 이미 전반전 내내 통하지 않았던 방법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은 오만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패배가 확실한 방법을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패배의 책임을 자신의 전술이 아닌, 선수들에게 전가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변화무쌍한 전술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챔피언스 리그라는 큰 무대에서 긴장한 것은 선수들뿐만이 아닌가.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밀어붙일 뿐이다.’

    졸전을 만들어내는 동민의 선택에 안토니오 산치스는 차가운 분노를 드러냈다.

    “안 통하는 전술을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계속해서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줘야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평소보다 몇 도는 더 온도가 내려간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후반전을 맞은 베이포트 FC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안토니오 산치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하프타임 간 큰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전술적인 변화도, 선수의 변화도 아니었다. 하프타임 간 베이포트 FC에 몰아친 변화는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 내부에 관한 것이었다.

    “다들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

    감독인 동민이 라커 룸을 나선 뒤, 다시 그라운드로 향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올리비에 나스리가 불쑥 말을 던졌다. 지금껏 벤치에서 조용히 입을 닫고 있던 그는 동민의 지시로 후반전 교체로 들어오는 것이 확정나자 지금껏 참고 있던 것을 그만둔 것이다.

    “전반전 내내 패스는 안 맞고 압박은 따로따로, 제각각 의욕만 앞서서 뛰어다니면 뭐해. 하나도 맞질 않는데.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우승이라니. 아무리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 는 말이 있지만 너무 꿈이 터무니없는데.”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다른 선수들의 마음을 찔러 들어왔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전반전 동안 자신들의 플레이를 되돌아보면 스스로가 생각해도 끔찍할 정도였다. 연습하고 준비했던 플레이는커녕, 마치 한 팀이 아니라 개인들이 뭉친 것처럼 손발이 하나도 맞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에 나스리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경기장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더, 뭐? 사람이 많다고? 8만 명이 넘는 관중들 앞에 서는 게 생각한 것보다 부담스럽다고? 아니면 더 열광적이어서 쪽도 못 쓰겠다고? 이야,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데 경기에 집중 못할 수도 있어.”

    항의하는 닉 베손의 말을 자르고 올리비에 나스리는 더욱 비꼼의 강도를 높였다.

    “너희가 나중에 가게 될 FC 마드리드 홈 경기장도 규모는 다르지 않은데. 거기서도 이렇게 엉망으로 뛰면서 주눅 든 탓이라고 하려고? 거기서는 수비진 사이에서 지시하는 것도 제대로 들리지 못할 때가 많을 정도로 시끄러운데? 좋겠어, 누구는 끔찍하게 못할 때에도 그렇게 댈 수 있는 핑계가 있고 말이야.”

    그의 계속된 빈정거림에 닉 베손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처음 서는 챔피언스 리그 무대라는 점도,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많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응원도, 익숙하지 않은 타 리그 팀의 상대라는 점도 모두 자신들의 플레이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엉망진창이던 플레이의 핑계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공을 잡는 순간 쏟아지는 야유에 몸이 굳을 정도인데.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누군가 발을 붙잡는 것처럼 무거워진다고.”

    닉 베손이 입술을 깨물며 하는 말에는 분함과 자책이 섞여 있었다. 그런 그의 말을 듣는 다른 선수들의 표정에도 같은 감정들이 퍼져 나갔다. 이렇게 한심하게 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패배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자멸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준비했던 경기를 마음껏 펼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부담감에 자꾸만 자신들의 몸이 굳어지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부담감은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너희가 처음으로 프로 데뷔를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결국 그 거에 익숙해지는 것뿐이지. 똑같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신랄했던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올리비에 나스리는 말했다. FC 마드리드에서의 풍부한 경험에도, 서른둘이라는 노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도 그 또한 부담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것을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부담이네 뭐네 그런 걸 신경 쓰니까 더 굳어지는 거야. 그냥 경기에나 집중해. 의사소통이 힘들어서 패스가 안 맞니, 손발이 안 맞니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경기에 집중만 하면 그게 엇나갈 리가 없어. 예전에 데뷔전 때를 생각해 봐. 그때보단 훨씬 나을 테니.”

    그는 단정하듯 딱딱하게 말했다.

    그 말은 지금껏 절망감으로 굳어 있던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몸에서 쓸데없는 힘을 빼게 만들었다. 관객들이 주는 부담감 이상으로 스스로가 만든 짐에 눌려 있던 것이 조금을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들을 훑어보고는 올리비에 나스리는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그리고 조나단, 주장인 네가 할 일을 뺏어 미안해. 원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뭔가 답답해서.”

    면목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남기고 그는 빠르게 그라운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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