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C로마의 방식 (214/270)
  • AC로마의 방식

    AC로마의 홈 경기장이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경기장인 스타디오 디 로마는 8만 명이 넘는 관중들의 경기를 기대하는 뜨거운 함성과 응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관중들의 목소리를 느끼며 AC로마의 안토니오 산치스 감독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상대는 자네들도 알고 있듯 우리보다 약하다. 하지만 그게 상대를 얕봐도 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상대도 치열한 경쟁을 거치면서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올라온 팀이고, 언제든 경기는 뒤바뀔 수 있다. 상대가 약팀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AC로마의 방식이 아니며, 만약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그 전까지 아무리 좋은 모습을 보였더라도 앞으로 경기에 나서기 힘들어질지 모른다.”

    그의 말에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E조에서 가장 약체로 손꼽히는 베이포트 FC고, 경기가 벌어지는 곳은 자신들의 홈인 스타디오 디 로마지만 약체라고 쉽게 생각했다가는 반대로 당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지 모른다, 그것이 축구라는 사실은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과거에 전 유럽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세리에 A 리그와 AC로마가 지금은 그저 명문 팀 정도의 위상으로 떨어진 것처럼.

    “이번 시즌은 우리가 다시 유럽을 석권할 수 있는 기회다. 사람들에게 과거에 남은 명문 팀이 아닌, 현재에 군림하는 강팀으로 남길 바란다.”

    지난 몇 년간 세리에 A 리그에서는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AC로마였지만 챔피언스 리그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조별 리그를 넘어 16강까지는 항상 올라갔지만 토너먼트에서 언제나 일격을 당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것이 예전에 비해 AC로마의 위상이 낮아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 시즌을 앞두고 AC로마는 명가의 재건을 내세우며 팀의 기둥인 고참 선수들을 남기는 동시에 젊은 피들을 수혈했다. 그리고 감독인 안토니오 산치스는 이번에야말로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하면서 다시 AC로마가 전 유럽에 우뚝 서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팬들에게 승리를 바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확실하게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AC로마가 지난 시즌과 달라졌다는 걸 알리도록.”

    안토니오 산치스의 말에 AC로마 선수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상대가 약체라 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경기를 준비했고, 경기가 벌어지는 곳은 유럽에서도 가장 열정적인 팬들이 가득한 스타디오 디 로마다. 그것은 확실한 자신감이 되어 그들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괜히 전 유럽에서도 제일 극성맞은 팬들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구나.’

    전반전도 점차 마무리에 가까워지는 상황, 주현은 심판의 휘슬 소리도 겨우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함성들로 가득한 경기장을 둘러보면서 새삼 혀를 내둘렀다. AC로마의 선수들이 공을 잡았을 때는 하늘이 떠나가라 열정적인 환호성과 함성이 터져 나왔고, 반대로 그를 비롯한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이 공을 잡았을 때에는 땅이 울리도록 무거운 야유 소리가 그들을 짓눌렀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오면서 열광적인 팬들은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정말 무시무시하네.’

    주현은 그가 예전에 뛰었던 K리그도, 베이포트 FC가 있는 영국 또한 팬들의 열정만은 지금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에서 나오는 압력은 그 자릿수가 달랐다.

    그가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고 처음으로 압도되었던 스톡포트 시티전이 벌어진 우드뱅크 스타디움도 관중 수는 6만 명 정도, 그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홈 경기장인 뉴 퍼스우드도 7만 명가량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경기가 벌어지는 스타디오 디 로마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많은 8만 2천여 명의 수용 인원을 자랑한다. 그 많은 관객들의 야유와 환호성은 그저 상대를 향한 응원이라기보다 마치 중력처럼 그들의 몸을 잡아 끌고, 다리를 무겁게 만들었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어릴 적에 꿈만 꾸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난생처음으로 뛰는 것만 해도 떨렸는데 압도적일 정도로 많은 홈팬들의 야유는 더욱 그의 발을 붙잡았다.

    그 탓일까, 오늘 그의 플레이는 어딘가 잘 맞지 않았다.

    빠른 속도를 살려서 상대가 제대로 수비 라인을 맞추기 전에 무너뜨리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패스는 내주는 것도 받는 것도 한 박자씩 빠르거나 늦어서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려드는가 하면, 동료들과의 연계도 조금씩 엇나갔다.

    ‘공만 잡으면 땅이 울리도록 들려오는 야유 소리에 삼켜지는 느낌이야.’

    공을 잡는 순간부터 들려오는 야유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넘어 직접 그의 발을 붙잡는 듯했다. 그런 상황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포함한 공격진은 열심히 뛰면서 상대를 압박하려 해도 서로 발이 맞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했고, 힘들게 공을 뺏어내도 다시 어처구니없는 패스로 기회를 날렸다. 미드필더진에서는 빠르고 정확한 패스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대신에 서로 다른 그림을 보는 듯 엇나가기 일쑤였다. 수비진은 빠르고 강한 AC로마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경기 초반부터 흔들리던 베이포트 FC는 준비했던 것처럼 빠른 공격으로 AC로마를 뒤흔들지 못했고, 오히려 전반 18분에 AC로마 공격의 키인 프란체스코 줄리오에게 그림 같은 로빙슈팅을 허용하면서 1 대 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오히려 골키퍼인 폴 맥마흔의 선방 쇼로, 지금까지 그 한 골만 허용한 것이 다행일 정도로 완전히 AC로마의 페이스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동민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경기는 그가 상상한 최악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경험이 없는 선수단이 AC로마의 홈팬들이 기세에 완전히 짓눌렸고, 절대 선제골을 허용하면 안 되는 팀을 상대로 선제골을 내주었다.

    먼저 골을 넣은 AC로마의 경기 스타일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이 경기를 준비하면서 AC로마의 경기를 몇 번이나 보아왔던 동민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팀 스타일상 무리하게 다득점을 노리지 않을 거야. 단 한 골, 그 한 골을 넣고 나면 경기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것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니까. 결국 후반전이 되면 상대의 수비진을 뚫어내는 것은 몇 갑절이나 어려워질 텐데.’

    AC로마라고 무턱대고 수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란체스코 줄리오가 지휘하는 공격은 무섭도록 날카로웠고, 양 측면의 풀백까지 가담하는 역습은 순식간에 베이포트 FC의 수비 라인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득점을 노리기보다는 안정적으로 경기를 승리하기를 바랄 것이다. 약해 보이는 상대와 승리를 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섭도록 냉철하게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그 결과 먼저 몸이 달아 자신의 페이스를 놓치는 상대를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그것이 바로 과거 AC로마를 유럽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거듭나게 했던 정신력이었고, 아주 오래된 그들의 경기 방식이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만 가다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만 촉박해질 테고, AC로마는 그런 우리의 빈틈을 파고들면서 추가 골을 노리겠지. 최대한 안전하게 경기를 끌고 가도 이길 수 있으니까.’

    동민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선수들이 큰 무대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더 신경 썼어야 했다. 그것 때문에 올리비에 나스리를 영입했지만 수비 라인의 적응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며 아껴둔 것이 큰 실수였다. 선수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챔피언스 리그 본선 무대의 심리적 압박을 제대로 떨쳐내지 못했고, 8만 명이 넘는 관중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스스로 무너져 버린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동점골을 위해서는 앞으로 공격을 더욱 강화해야 할 거야. 게다가 선수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어떻게든 그라운드 안에서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조나단 케인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잘 이끌어주는 주장이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처음 겪는 큰 대회라는 점과 이만큼 많은 관객들에게 부담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인 만큼,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동민의 주먹은 초조함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꽤나 준비한 티는 나지만… 역시 전형적인 경험이 부족한 팀의 모습인가.’

    안토니오 산치스는 베이포트 FC가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베이포트 FC는 그들의 취약점인 전방 압박에 약하다는 점을 파고들려 하는 것으로 보였다.

    플레이 메이킹의 시작점인 안드레아 몬티가 압박에 약하다는 사실은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고전한 경기들 중 많은 수가 상대가 강한 압박을 가져갔을 때라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약점을 막기 위해서 안드레아 몬티의 파트너로 많은 활동량과 중원 장악력을 지닌 선수들을 선택했고, 그 방법으로 훨씬 안정적인 중원 장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베이포트 FC는 단순히 안드레아 몬티 한 사람에 대한 견제보다는 전 위적인 압박으로 공격을 방해하고 자신들의 진영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그게 잘되었다면 위험했겠지만… 여기는 챔피언스 리그고, 이곳은 우리의 홈 경기장이니까. 준비 자체는 꽤 위협적이었겠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던 거겠지. 감독도 경험이 부족한 탓이군.’

    경기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AC로마의 팬들은 열두 번째 선수가 되어서 베이포트 FC를 압박했고, 베이포트 FC 선수들은 무시무시한 그들의 압박에 스스로 무너지면서 자멸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머릿속으로 이제 전반전이 끝나면 후반전은 어떤 식으로 경기를 주도해 나갈지 생각했다. 평소처럼 조금 더 뒤로 물러나 안정적인 경기를 펼쳐 나가는 것도 좋았고, 중원에 더욱 힘을 실어서 상대가 무너지는 틈을 타 더욱 골을 노리는 것도 가능했다. 상대하는 팀이 치를 떨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한, AC로마 특유의 경기 리드 방식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대가 동점 골을 바란다면 더욱 올라설 수밖에 없고, 그러면 틈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특히 저 정도로 흔들리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지.’

    안토니오 산치스는 어느 쪽을 택하든 이 경기를 완벽한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그는 경쟁 팀 팬들이 ‘파충류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한 치도 방심이 섞이지 않은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 팀 벤치를 바라보면서 승리를 확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