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C로마 (213/270)
  • AC로마

    9월 중순의 아직은 조금 따가운 이탈리아의 오전 햇볕을 받으며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은 자신들이 로마 원정을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야, 내가 로마를 원정 경기를 위해서 다 올 줄이야.”

    로날드 조던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재작년까지 챔피언십에 속해 있던 그가 경기를 위해서 영국을 떠난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난 프리시즌 때 오를레앙 OSC와의 친선 경기를 위해 프랑스로 넘어간 것이 처음이긴 했지만, 그때는 프리 시즌이었다는 점도 있고 경기 직후 동민이 쓰러지는 소동도 있어서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에게는 금구나 다름없었다. 그런 점들이 모여 베이포트 FC로서는 처음 있는 외국 원정 길인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조금씩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로날드, 너무 들뜨지 말아요. 경기까지는 앞으로 60시간도 남지 않았다고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의 눈동자도 처음 오는 도시에 대한 기대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형이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바쁘게 돌아다니는 눈부터 어찌해야 할 텐데.”

    뒤쪽에서 주현이 한국말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동민은 못 들은 체 무시했다.

    레이미 볼든의 제안을 받고 한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경기에 대한 준비나 원정 경기를 제외하고는 영국 내에서도 돌아다니던 일이 거의 없던 동민이다. 아무리 유럽 내에서 다른 국가로 건너다니는 것이 쉬워진 시대라고 해도 매일 경기 준비나 전술 구성에만 신경 쓰던 그가 자주 여행을 다닐 리가 없었고, 더욱이 그는 런던 내에서도 산책을 제외하면 훈련장과 사무실, 숙소만 오고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 흐린 영국의 하늘만 보다가 투명해 보이는 이탈리아의 날씨에 그의 시선이 빼앗기는 것도 당연했다.

    “음, 으흠! 어쨌든 오늘은 곧바로 호텔로 가서 잠시 쉬다가 오후부터 가벼운 훈련을 시작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두세요. 지금까지 경기를 위해 올 일 없던 곳에 와서 흥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구경하는 것은 휴가 때 개인적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잖아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리저리 돌아가려는 자신의 눈부터 빠르게 억눌렀다. 프리 시즌 내내 자체적으로 휴가를 반납하다시피 하고 영입을 포함한 이번 시즌의 준비를 했다든가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기는 했지만 그가 원해서 한 일일뿐, 중요한 것은 경기였다.

    ‘선수들이 이런 먼 거리의 원정 길에 익숙하지 않은 점이 걱정거리였는데 나부터가 집중을 하질 못하고 있다니. 경기만 생각하자.’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흐트러지려던 자신을 더욱 다잡았다.

    “거기서 속도를 늦추면 안 되죠! 로드리게스, 당신이 속도를 늦춰 버리면 상대에게 수비 라인을 갖출 시간만 내줄 뿐이에요. 뚫어내야 할 수비벽이 몇 배는 두꺼워진다고요! 반대로 베손, 당신은 공을 잡는 즉시 앞쪽으로 바로 넘겨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지 말아요!”

    훈련장에 동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고함의 대상이 된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동민은 호텔에서 짐을 푼 후 훈련장에 도착해 가벼운 훈련을 할 거라 이야기했지만, 선수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훈련은 미니게임이 되어 있었다. 모레 저녁의 경기를 앞두고 꽤 체력 소모가 생길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었지만, 그 리스크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 동민의 생각이었다.

    ‘이번 승부에서 속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선수들이 그 속도감에 익숙해지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무뎌지는 순간 경기는 완전히 AC로마 측으로 넘어간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날 수 있는 팀들은 팀마다의 특징도 있지만, 리그마다의 특색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여러 국적의 감독들이 각 리그에 퍼지면서 그 특색이 전보다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거친 몸싸움과 빠른 속도를 살리는 축구가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었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세밀하고 창의적인 패스워크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팀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 상대인 AC로마가 속해 있는 세리에 A 리그는 또 달랐다.

    ‘강한 수비를 바탕으로 상대가 스스로 지치게 하는 전술적인 수비 축구의 본가나 마찬가지니까. 그중에서도 AC로마는 그 형태를 가장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팀이기도 하고.’

    지금 세계 최고의 리그가 어디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의 대답은 제각각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지난 시즌 더블을 달성한 FC 마드리드와 아직까지 세계 최고의 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바르셀로나 CF가 있는 프리메라리가를 손꼽을 테고, 누군가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여러 팀들이 고른 활약을 보여주는 분데스리가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박싱 데이라는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와 치열한 경쟁의 프리미어리그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십오 년 전쯤으로 돌아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이탈리아 세리에 A 리그는 카테나치오(이탈리아어로 ‘빗장’이라는 뜻, 수비를 중시하고 지능적인 반칙으로 상대 공격을 막는 축구 전술)라 불리는 강한 수비와 완성도 높은 전술로 유럽을 호령했다. 지금은 비록 전보다는 위상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그 전성기 세리에 A 리그를 이끌던 팀 중 하나가 바로 AC로마였다.

    ‘탄탄한 포백을 이용한 유기적인 수비와 역습 시에 측면과 중앙을 연결하면서 이어지는 파괴적인 공격력, 그리고 팀의 핵심이자 상징인, 나이가 든 지금도 아직 대단한 기량을 보여주는 프란체스코 줄리오. 어정쩡하게 상대했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고 선제골을 내준 뒤에 90분 내내 끌려갈지 몰라.’

    동민은 경계심 가득한 마음으로 AC로마를 떠올렸다. 과거 카테나치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지난 시즌 리그 전 경기를 통틀어 경기당 내준 골이 0.8골이 채 안 되는 극도의 짠물 수비는 그의 경계 대상 1호였다. 마치 자물쇠를 잠가놓은 듯 열리지 않는 상대의 골문 앞에서 힘만 빼다가 그들의 역습에 선제골을 내주는 순간 경기는 완전히 그들의 페이스대로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요즘 시대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꽤나 고전적인 전술이긴 하지만 아직도 효과가 있는 방법이야. 길고 많은 경기를 하는 리그가 아닌 이런 대회나 토너먼트에서는 더욱 그렇고.’

    프리미어리그 내에서도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비롯해 수비적인 전술을 내세우는 팀들을 여럿 상대했던 동민이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AC로마의 레전드이자 팀의 기둥인 공격형 미드필더 프란체스코 줄리오였다. 올해로 서른다섯이라는, 선수로서 황혼기의 나이와 예전보다 떨어진 체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나서면 번뜩이는 모습들을 보여주며 AC로마 공격의 키를 잡았다.

    과거 세리에 A가 유럽 무대를 지배하던 시절 공격의 전권을 쥐고 있던, 이제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트레콰르티스타(이탈리아어로 3/4, 경기장의 3/4 지점에서 창의성을 바탕으로 공격 전개의 핵심 역할을 해내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에 특화된 그는 아직도 본인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든 지금까지도 중요한 경기에서 찬스를 만들거나 골을 넣으며 AC로마를 이끌고 있었다.

    ‘요즘 저런 타입을 만나보기 힘드니까 우리 선수들이 우왕좌왕할 수도 있고, 한순간이라도 시야에서 놓쳤다가는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니까. 플레이 스타일상 지금껏 상대하던 팀들과는 많이 달라.’

    그런 AC로마를 상대하기 위해서 동민이 집중한 것이 바로 속도였다.

    AC로마의 수비진이 제대로 자리를 갖추었을 때 공을 가지고 그들의 두꺼운 수비벽을 뚫어내는 일은 베이포트 FC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비 시에 수비수의 숫자가 최소 3명에서 최대 5-6명까지 변하는 그들의 전술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격을 이어나갈 공간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특징이었고, 그 좁은 공간을 휘저어 수비를 흐트러트리기에는 그들의 수비가 너무나도 강했다.

    결국 동민은 그런 AC로마의 수비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에 공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강한 수비라도, 약한 포지션이 없어 보이는 진형이라도 약한 타이밍은 있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에 빠르게 공격한다면 그걸 막아내진 못할 테니까.’

    동민이 내세우는 기본 전술은 간단했다. 최대한 선수들을 위로 올리고 압박을 해서 상대방의 역습을 시작 단계부터 방해하고 공을 빼앗는다. 공격의 시작 지점을 후방이 아닌 상대 진영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수비가 자리를 잡을 시간을 주지 않고, 공격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튼튼한 수비를 자랑하는 AC로마라고 해도 상대의 진영부터 이어지는 공격이 아닌, 자신들의 앞마당부터 시작되는 공격을 막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격의 키를 잡는 선수가 프란체스코 줄리오라면 역습의 시작을 맡는 선수는 안드레아 몬티인데 지난 경기들을 보았을 때 강한 압박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동민은 조가 정해지자마자 몇 번이고 찾아보았던 지난 시즌과 이번 시즌 초 AC로마의 경기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아래쪽부터 공격을 만들어가는 것이 강점인 AC로마였지만 그만큼 그 공격의 시작점을 공략당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했다. 지난 시즌 처음으로 3골이나 실점하면서 무너졌던 SC 피렌체와의 경기가 그랬고, 이번 시즌 특유의 역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0 대 0으로 비겼던 CF 레체와의 경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야 AC로마의 틈을 찌를 수 있을지 앞서서 보여준 팀이 둘이나 있으니 그 힌트를 무시할 필요가 없지.”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슬슬 미니 게임을 마칠 준비를 했다. 오늘까지 최대한 빠른 속도의 공격과 강한 압박에 익숙하게 만든 뒤 내일은 최대한 체력을 온존하면서 경기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전술로만 따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이미 압박과 빠른 역습에 익숙하지 않다는 힌트도 있고 우리 선수들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몇 번이나 이야기하면서 숙지시켰으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방법이 효과적일 것이라며 확신했다. 그러나 주먹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동민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을 억지로 떨쳐내며 선수들을 부르고 훈련을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그의 예감이 맞을지, 혹은 그의 확신이 맞을지는 앞으로 50시간 정도 뒤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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