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음의 조 (212/270)
  • 죽음의 조

    “휴우…….”

    병렬과의 전화를 끊으며 동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스승에게 자신 있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병렬에게 허풍을 떤 것에 가까웠다.

    ‘세 팀 다 쉽게 이길 수 있는 팀들이 아니니까.’

    전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팀들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없을 리가 없었다. FC 마드리드는 말할 것도 없이 강했고, AC 로마는 베이포트 FC가 따라잡을 수 없는 강팀으로서의 품격이 있었다. 그리고 쾰른 07에게도 베이포트 FC에게는 없는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서의 경험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쉬운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도 잠이 안 오는 날이 되겠네.’

    동민은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 사라졌다. 조 추첨 결과는 그에게 생각할 거리를 너무나도 많이 던져주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쉽게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동민은 무신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차피 잠이 잘 오지 않을 거라면 사무실에 남아 낮에 들떠서 제대로 해내지 못한 다음 경기 준비나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일단 커피라도 한 잔 타올까.”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휴게실로 향했다.

    “응? 안 돌아갔어요?”

    휴게실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려던 동민의 계획은 휴게실에 도착하자마자 무너졌다. 휴게실에는 이미 선객이 있던 것이다.

    몇 시간 전에 그랬듯 휴게실 안에서 동민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샐리였다.

    “아하하, 뭔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서요……”

    “아…….”

    샐리의 대답을 들은 동민은 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 말에 담긴 뜻을 알 수 있었다.

    동민은 지난번 스톡포트 시티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을 때에도 그녀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이런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을 떠올리자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이 있던 오늘도 그녀가 어째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 마주 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이는 동민이었다.

    “…그, 뭐야. 이길 수 있을 거예요.”

    “네?”

    “챔피언스 리그 조요. 쉬운 조는 아니지만 16강 진출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니까요. FC 마드리드가 지난 시즌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고 해도 올 시즌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고, AC 로마도 예전 명성에 비해서 최근 몇 년간은 주춤한 상태였으니까요. 쾰른 07도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적은 많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몇 번 안 되고요. 물론 쉬운 조는 아니지만…….”

    샐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횡설수설하는 동민의 모습을 보고 그가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뇨, 조 추첨 결과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이야기한 것처럼 쉬운 조는 아닐 것 같지만요.”

    “그래도 분명… 네?”

    샐리가 불안감에 빠져 있을까 봐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던 동민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샐리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조 추첨까지 다 나오니까 이제 정말 챔피언스 리그 본선 32개 팀들 중 하나라는 실감이 들어서요. 리스본 CF하고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이겼을 때에도 머리는 이제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진출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어딘가 실감이 나질 않았거든요. 아까까지도 조금은 그랬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부끄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런데 오늘 조 추첨까지 끝나고 나니까 이제야 우리가 저 팀들 사이에서 서 있을 수 있는 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동시에 조금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곳에서 내가 어릴 적부터 응원하던 팀이, 그리고 내가 일하고 있는 팀이 불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만족해요. 내가 직접 뛰거나 경기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요.”

    샐리의 말을 들은 동민은 자신이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잘못 생각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레이미 볼든의 제안을 듣고 영국으로 넘어왔을 때부터 그에게 베이포트 FC는 특별한 팀이며, 사랑하는 팀이었지만 샐리가 느끼는 것과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동민에게 베이포트 FC란 자신이 이끄는 팀이자 자신의 꿈을 이루는 매개체가 되고, 동시에 함께 일하는 가족과도 같았다. 그리고 샐리에게 베이포트 FC는 어릴 적부터 응원하던 팀이며 동경하고 사랑하던 생활의 일부였다. 아무리 2부 리그 하위권을 전전하던 베이포트 FC의 모습을 동민이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모습을 직접 보면서 커왔던 샐리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의 가장 큰 차이였다.

    동민이 조 추첨이 끝나고 그 결과에 고민하며 어떻게 16강에 오를 수 있을지 생각했다면 샐리는 그보다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에 대한 감격이 먼저였다. 그녀가 승리에 대한 열망이 부족하거나 승부 감각이 무딘 것이라기보다는, 지금껏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무대에 선 팀의 팬으로서의 반응이 먼저 나온 것이다. 동민이 틀린 것도 샐리가 틀린 것도 아닌, 두 사람의 차이점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강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충분히 진출할 수 있겠죠. 당신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잖아요.”

    믿음이 담긴 그녀의 말에 동민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고 해도, 각각 팬으로서의 모습과 감독으로서의 모습이 먼저 나오는 차이가 있다고 해도 자신을 향한 믿음이 있는 한 그 믿음에 부응해야 했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어려운 조가 잡혔어도 우리는 그 조에서 살아남을 거고, 그 위로 올라갈 거니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허풍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잊고 있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방금 직접 뛰거나 경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굳이 그렇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경기에 영향을 주고 있어요. 당신이 정리해 준 자료를 보고 내가 전술을 짜고, 그 전술에 선수들이 움직이니까요. 당신뿐만 아니라 이 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베이포트 FC가 여기까지 오는 원동력이 된 거고요.”

    구단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선수들과 감독, 코치진들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덕분이기도 했다. 잔디 관리인이 정성들여서 잔디를 관리한 덕분에 선수들이 그 위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고, 경기 자료를 잘 보관한 덕분에 감독이 그것들을 보면서 다음 경기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팬들이 있기에 팀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니까 방금처럼 멀찌감치 뒤로 물러선 태도로 말하지 말아요. 지금 여기까지 올라온 것에는 당신의 활약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그것은 동민의 진심이었다.

    휴게실에서 샐리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동민은 의자에 기대 기지개를 켰다. 그냥 커피 정도만 마시고 돌아오려 했는데 생각보다 꽤 오래 밖에서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샐리는 더 늦어지기 전에 집으로 향했고 동민은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늦게 다음 경기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도 샐리랑 이야기해서 그런가, 아까보다 크게 걱정되진 않네.’

    같은 조에 속한 세 팀은 대단한 팀들이다. 베이포트 FC보다 더 좋은 선수단을 보유하고 있고, 더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며, 더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동민이 무슨 일을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승부를 결정짓지는 않으니까. 만약 축구가 그런 스포츠였다면 내가 이렇게 열광하지도 않았을 테고, 지난 시즌에 사람들의 예상을 누르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동민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빛나는 역사도, 튼튼한 재정도, 화려한 선수들도 경기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공은 둥글고, 경기는 시작하기 전까지는 결과를 알 수 없다. 그것/은(을)/ 지난 시즌 몸소 보여준 것이 동민과 베이포트 FC였다.

    “…게다가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화면의 스포츠 뉴스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 결과가 나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이포트 FC의 빠른 탈락을 예상했지만 동민의 눈은 그중 몇 명의 댓글로 향해 있었다.

    -가능성은 낮긴 하지만 경기를 해봐야 아는 거지.

    -지난 시즌에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낼지 누가 알았겠어.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었으면 아무도 안 걸었을걸. 그런데 결과는 달랐잖아.

    -안될 것 같기는 한데 까봐야 알지. 나름대로 보강도 하긴 한 것 같고.

    안 될 거라 말하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도 동민과 베이포트 FC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민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며 믿음을 보여주던 샐리도, 그를 위해 무리할 정도의 투자를 이끌어내 준 레이미 볼든도, 이 글들을 쓴 이름 모를 팬들도, 그리고 동민의 말을 듣고 팀에 합류한 새 선수들과 기존 선수들도 모두 달랐지만 단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동민과 베이포트 FC라면 또 한 번의 기적과도 같은 드라마를 쓸지도 모른다는 믿음이었다.

    그런 기대를 어깨에 짊어진 이상 동민은 이길 수 있었다. 아니, 이겨야만 했다.

    “아…….”

    인터넷 뉴스를 본 후 메일까지만 확인하고 영상 자료를 보려던 동민은 새로 온 메일을 보았다. 낮에 답장했던 수연에게서 다시 메일이 온 것이다. 조 추첨이 끝나자마자 보낸 메일이 틀림없었다.

    “정말로 같은 조에 속할 줄이야. 진짜 신기하네. 자기가 말한 대로 같은 조가 되었으니 어떤 반응을 보냈을라나. 같은 죽음의 조에 떨어진 것에 대한 투덜거림일지, 아니면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든지 하는 이야기인가.”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메일로 마우스 커서를 가져갔다.

    그리고 메일을 클릭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 사람도 자존심 세고, 지는 거라면 싫어하니까. 그쪽 감독과 선수들이 주눅 든다고 해도 그 사람만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민의 눈은 빠르게 화면 좌우로 번갈아 움직였다.

    잠시 후, 동민은 가만히 메일을 읽고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수연은 정말 그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베이포트 FC의 16강 진출을 기원할게요. 물론 2위로지만.

    1위로 진출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쾰른 07이라는 말을 그녀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메일을 읽는 동민에게는 자신들이 조 1위로 진출할 테니 그 뒤를 따라오라는 의미가 그대로 전해졌다. FC 마드리드와 AC 로마를 뒤로 남겨두고서 1위로 진출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진짜 대단하다니까.”

    동민의 웃음 섞인 혼잣말이 부드럽게 방 안을 울렸다.

    마음을 정한 동민과 베이포트 FC의 챔피언스 리그 첫 경기는 빠르게 다가왔다. 동민은 리그 경기들을 쉴 새 없이 준비하면서도 어느덧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AC 로마와의 원정 경기라… 마드리드 FC도 그렇지만 이런 유명한 팀들은 원정 길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해외 원정경기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으니.’

    AC 로마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동민을 가장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그들의 뛰어난 경기력도 재능 넘치는 선수들도 아닌, 원정 길 자체였다.

    ‘첫 단추인 만큼 어긋나지 말아야 할 텐데…….’

    동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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