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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 리그, 그 첫 걸음(2) (211/270)
  • 챔피언스 리그, 그 첫 걸음(2)

    그날 오후, 동민을 포함한 모든 베이포트 선수들과 스태프들은 한곳에 모여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을 기다렸다. 팀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진출하는 만큼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각 리그 우승 팀들이 속한 1포트부터 각 조에 배정되기 시작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우승 팀인 FC 마드리드부터 독일 분데스리가의 우승 팀 VFB 뮌헨,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스톡포트 시티 등을 비롯한 많은 강팀들이 각각의 조에 속했고, 그 조를 보면서 동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조별 리그에서는 같은 리그 팀들이 만나지 않으니 스톡포트 시티가 있는 B조는 들어가지 않겠지. 그렇다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은 VFB 뮌헨이 있는 A조나 FC 마드리드가 있는 E조인데…….’

    어느 팀을 만나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조별 예선부터 강팀을 잔뜩 만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16강 토너먼트 진출 자체의 난이도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 집중하다가 리그 초반기를 좋지 않게 보낼 가능성도 커진다.

    ‘그것을 막기 위해 선수층의 질과 양을 모두 강화하려고 큰 투자를 감행하면서 영입한 거긴 하지만 무조건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그런 동민의 생각을 두고 각 포트의 팀들은 한 팀씩 자신들의 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3포트까지의 팀들이 모두 조에 배정되었고, 남은 것은 베이포트 FC가 속한 마지막 4포트뿐이었다.

    ‘이제 어느 조든 4포트 팀만 들어가면 끝인데… 뭔가 느낌이 좋지 않네.’

    동민은 아까보다 더 불안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올라온 팀은 베이포트 FC를 비롯한 4팀, 다시 말해 4포트인 베이포트 FC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팀인 스톡포트 시티가 속한 B조,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 속한 D조, 노팅힐 AFC가 속한 H조, 이 세 조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개의 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들어갈 수 있는 조인 다섯 개의 조 중에서 A조와 E조가 완전히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프리메라리가의 우승 팀이자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팀인 FC 마드리드와 세리에 A 리그의 오랜 강호 AC 로마, 분데스리가의 쾰른 07이 속한 E조는 속한 팀들만 보더라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인 FC 마드리드를 포함해 AC 로마는 물론이고 쾰른 07까지, 모두 토너먼트 이전의 조별 리그에서 만나는 상대로는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분데스리가 우승 팀인 VFB 뮌헨, 세리에 A 리그의 SSC 카타니아, 러시아 리그의 FC 예카테린부르크가 속한 A조는 상대 팀도 상대 팀이지만 원정 경기를 위한 이동 거리가 엄청났다.

    ‘남부 독일, 시칠리아 섬, 러시아… 만약 A조에 들어갔다가는 원정으로 생기는 체력 부담만 생각해도 장난이 아니겠는걸. E조는 지금 저 세 팀만 있어도 껄끄럽기 그지없는 팀들이고. 제발 저 두 조만은 피했으면 싶은데 확률은 대충 40퍼센트 이상이라… 하아, 수연 씨 조별 리그에서부터 말대로 만나는 거 아닌가 몰라.’

    동민은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노린다며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조별 리그부터 힘을 빼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드는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화면을 보는 동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디 행운이 따르기를 바라면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조 추첨을 바라보는 다른 스태프들과 선수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한 팀도 빼놓지 않고 골치 아픈 팀들이 모인 E조와 상당한 이동거리를 자랑하는 A조만큼은 가능하면 피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A조에 속할 팀의 이름이 적힌 볼이 추첨자의 손에 쥐어지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베이포트 FC의 모든 사람은 손에 땀을 쥐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볼에 적힌 이름은-

    -A조, FC 자그레브! 크로아티아의 FC 자그레브가 A조에 합류합니다!

    그 순간 소리 없는 안도의 한숨이 베이포트 FC의 관계자들 사이를 지나쳤다. 엄청난 이동거리를 자랑하는 A조를 회피한 것이다.

    ‘다행이다. 만약 A조에 걸렸다면 이동거리가 보통이 아니었겠지.’

    동민 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정 경기라고 하기보다 투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의 이동거리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만에 하나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선수들이 피로에 시달리거나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베이포트 FC로서는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동민 또한 그 점을 가장 염려했지만 다행히 A조에 속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남은 건 E조만 피하면 되는데… 잘되겠지.’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조 추첨 또한 그가 생각한 것처럼 풀리지는 않았다.

    -E조, 베이포트 FC! 챔피언스 리그에 처음으로 출전하는 잉글랜드 팀이 E조에 배정됩니다!

    그 순간, 동민을 비롯한 방에 모인 모든 베이포트 FC의 선수들과 스태프들은 얼굴을 굳혔다.

    지난 시즌 프리메라리가와 챔피언스 리그, 두 개의 우승컵을 함께 거머쥔 FC 마드리드, 세리에 A리그에서 오랜 역사와 수없이 많은 우승컵을 가지고 있는 AC 로마, 그리고 분데스리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쾰른 07까지. 베이포트 FC의 입장에서는 어느 한 팀도 숨을 고를 수 없는 상대들이 가득한 E조였다.

    ‘하필이면…….’

    제발 A조와 E조만은 피하길 바라던 동민과 베이포트 FC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나 다름없었다. 좋지 않은 의미로 예상을 뛰어넘는 조 추첨 결과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동민의 옆으로 샐리가 슬쩍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그 동료분이 말한 대로네요. 정말로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서 만나게 되었는걸요.”

    그 말을 듣는 동민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조금은 수연을 원망하고 있었다.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에서 FC 마드리드, AC 로마, 쾰른 07과 함께 E조에 속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여러 축구팬들에게 곧바로 전해졌다. 대부분의 팬들은 챔피언스 리그 첫 출전에서 강팀들이 가득한 조에 떨어지고 만 베이포트 FC에 대한 동정을 표시했다.

    베이포트 FC를 제외한 나머지 세 팀 중 그들이 그나마 할 만하다고 할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난 시즌 더블을 기록한 FC 마드리드는 현 시점에서 전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팀이었고, AC 로마는 과거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4회나 들어보았던 명문 팀 중에서도 명문 팀이었다. 그나마 나머지 세 팀 중 가장 약체라는 평가를 받는 쾰른 07조차도 2시즌 전에는 챔피언스 리그 8강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한 팀으로 베이포트 FC와 비교하기는 힘들었다.

    -가장 속해서는 안 되는 조에 들어간 불쌍한 희생양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챔피언스 리그 조별 경기 여섯 번 중 베이포트 FC가 단 한 경기라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벌어질 정도로 베이포트 FC의 16강 진출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1위는 FC 마드리드, 2위는 AC 로마가 유력한 가운데 쾰른 07이 의외의 다크호스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보네요.

    수화기 너머의 동민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겠냐. 한국에서도 벌써부터 ‘지난 시즌 돌풍을 일으켰던 강동민 감독과 베이포트 FC, 넘어서기 힘든 벽을 마주치다’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오고 있는 . 인터넷 뉴스에서도 아주 난리가 벌어졌던데.”

    병렬은 그로서는 드물게 위로하듯 말했다. 늦은 밤, 잠도 포기하고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 결과를 본 그는 동민이 혹시 상심해 있을까, 곧바로 동민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보기 드문 은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동민의 목소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서도 그 정도면 내일 아침 여기 신문은 볼만하겠네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라면 한국이랑 맞붙어도 꿀릴 게 없는 곳이니까요.

    제자의 그런 말에 병렬은 내심 마음이 쓰렸다. 팀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했는데 불운하게도 하필이면 가장 최악이라고 할 만한 조에 걸린 것이다. 기껏 본선에 진출했는데 끔찍한 불운에 동민이 상심할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걱정이었다.

    “…아직 조별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혹시나 결과가 좋지 못해도 너무 힘없이 늘어지지만 마라. 경기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그러네요. 좋은 경험이 되겠죠.

    서툴게라도 위로하려는 병렬의 말을 동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잘랐다. 동민이 지금껏 그를 대하면서 먼저 말을 자르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병렬은 동민이 심한 스트레스에 짜증이라도 나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이어진 동민의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을 비롯한 강팀들이 챔피언스 리그 첫 출전인 팀에게 진다는 건 다시 하기 힘든 경험이잖아요. 이 기회에 한번 시켜줘야죠.

    그 말을 듣고서야 병렬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민의 담담한 듯 차분한 목소리가 패배를 각오하거나 포기한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민은 그저 차분하게 상대 팀들을 이기고 토너먼트에 진출할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병렬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자신보다 더욱 커져 버린 그의 제자는 같은 조에서 강팀들을 만나게 되어 기가 죽거나 상심하지 않았다. 언론들에서는 불운이라고 표현하고 있었지만 동민에게는 그저 뛰어넘어야 하는 벽이 조금 높아졌을 뿐이었다.

    “…하여간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라니까.”

    병렬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동민을 위로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질렸다는 듯, 그리고 자랑스럽다는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동민에게 말했다.

    -그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아끼는 제자한테 제정신이 아니라니요.

    항의하듯 말하는 동민의 말에 그는 수화기 너머에서 입을 불퉁 내밀고 있을 동민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칭찬이야, 칭찬. 이 녀석아.”

    병렬은 그렇게 말하면서 진심으로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제자에게 위로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심하고 있지 않을까, 하던 걱정이 실례나 다름없었다. 동민은 강팀들 사이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상심은커녕 어떻게 하면 상대 팀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여간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그렇게 말하는 병렬의 목소리에는 동민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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