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챔피언스 리그, 그 첫걸음(1) (210/270)
  • 챔피언스 리그, 그 첫걸음(1)

    베이포트 FC가 리스본 CF를 상대로 총합 7 대 1이라는 대승을 거둔 결과를 두고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베이포트 FC가 프리미어리그라는 훨씬 더 큰 리그의 팀인 만큼 그들의 승리가 당연한 것이라는 반응도 있었고, 유럽 대항전의 경험이 전혀 없는 베이포트 FC가 포르투갈의 오랜 명문 클럽인 리스본 CF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 의외라는 평가도 있었다.

    사람들의 평가는 저마다 달랐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챔피언스 리그의 경험은 전혀 없고,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고는 해도 강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그저 착각과도 같았다. 그러나 동민은 달랐다.

    ‘일단 본선에 오른 이상 16강으로 오를 수 있는 기회는 균등하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이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이라는 행사에 동민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팀들과 조를 짜더라도 동민의 목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베이포트 FC보다 더 강한 팀들을 만나더라도 착실하게 승점을 쌓아 토너먼트에 오를 생각이었다.

    ‘뭐, 그래도 일단 1, 2시드 팀들 중 어떤 팀과 같은 조가 되느냐가 중요하기야 하겠지만.’

    챔피언스 리그 본선은 32개의 팀들이 각자 8개의 조에 4팀씩 속하여 조별 리그를 치르고, 그 중 1, 2위 팀은 16강에 진출하고 3위 팀은 유로파 리그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조를 나눌 때에는 UEFA 기준 상위 8개 리그의 우승 팀이 1번 시드를 받고, 나머지 팀들이 UEFA 클럽 계수에 따라 2, 3, 4번 시드를 받아 한 시드에서 한 팀씩 뽑혀 한 조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동민이 바라는 대로 16강 토너먼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조 2위를 차지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4위로 시즌을 마쳤다고는 해도 지난 시즌 승격한 베이포트 FC의 UEFA 클럽 계수는 당연히 바닥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베이포트 FC의 시드가 가장 낮은 4시드이며, 대부분의 조에는 그들보다 강한 세 팀이 자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1시드는 모두 리그 우승 팀이니 어떤 팀이 걸려도 손쉬운 상대이긴 힘들 거야. 나머지 2, 3시드에서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팀보다 약한 팀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테지. 결국 어떤 조를 만나든 우리가 가장 언더도그라는 것은 변함없겠지.’

    절망적일 정도로 베이포트 FC의 열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동민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껏 열세로 보이던 경기를 뒤집은 경우는 많았고, 강한 팀들과의 대결은 그 스스로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스톡포트 시티나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 같은 강팀들을 꺾고 베이포트 FC가 얼마나 대단한 팀인지 보여줄 때야.’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욕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조 추첨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동민은 지금 당장에라도 어떤 팀들을 상대할지 알고 싶다는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몇 번이나 시계를 바라보던 그는 결국 억지로 다른 일에 신경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오랜만에 이메일이라도 확인해봐야지. 지금 이 상태로 다음 경기의 준비를 하기에는 집중이 안 될 것 같고, 차라리 뭔가 잡일이라도 하고 있어야 시간이 갈 것 같으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터넷 창을 켜고 요 근래에 경기 준비로 바빠서 확인하지 못했던 이메일을 켰다.

    먼저 온 잡다한 메일들부터 정리하고 있던 동민의 눈에 띈 것은 눈에 익은 메일 주소였다.

    “응? 이건…….”

    메일을 정리하던 동민의 손이 잠시 멈추고, 그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 메일을 바라보았다. 축하한다는 제목이 쓰여 있는 그 메일은 수연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 이후 그녀와는 종종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시즌이 끝난 이후로는 메일이 오지 않았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소식이 닿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메일이 왔을 때 몇몇 팀들 쪽에서 접촉이 있다고 했던가? 수연 씨도 얼른 일할 수 있는 팀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코치로서 수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동민이었지만, 그녀를 베이포트 FC로 불러들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과거에 그녀를 위해서 했던 일이 반대로 큰 상처가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을뿐더러,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그녀가 원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꿈을 펼쳐 나가길 바라는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리 동민이 수연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녀에겐 동정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때 일 이후로는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진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도박과도 같은 레이미 볼든의 제안을 덥석 잡아챘던 동민과 차근차근 외국에서의 공부를 토대로 갈 팀을 찾은 수연과는 이미 그때 갈 길이 나뉘어진 것과도 같았다. 아니면 감독과 코치라는 서로 조금은 다른 꿈을 꾸고 있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동민이 그녀를 베이포트 FC로 부르는 일만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좋은 소식이려나.’

    동민은 부디 좋은 소식이길 바라며 메일을 클릭했다. 그리고 메일을 보는 동민의 표정은 빛이 비치듯 밝아졌다.

    메일에 써져 있는 내용은 베이포트 FC의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을 축하하며 그녀도 새로운 소속 팀을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팀에 들어가고 정신이 없어서 메일을 하지 못했다며 축하와 사과, 그리고 근황을 겸해 메일을 보낸 것이다.

    “수연 씨도 이제 정식으로 유럽 프로 팀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하는 건가. 잘됐네. 그것도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는 팀에서 시작을 한다니… 대단하네.”

    독일 분데스리가의 쾰른 07에 들어갔다는 그녀의 말에 동민은 웃음을 지었다. 유럽에서 이렇다 할 큰 경력이 없는 그녀가 커리어의 시작을 그런 팀에서 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녀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민은 선수들을 보는 날카로운 시야와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그녀의 장점을 알아본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자 왠지 자랑스러워졌다. 성남 페가수스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동민은 메일을 닫으려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러나 메일의 마지막 말이 눈에 들어오자 동민은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쾰른 07도 챔피언스 리그에 나가니까 어쩌면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되면 잘 부탁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럴 리가.”

    동민은 그렇게 그 말을 웃어넘겼다. 쾰른 07이 챔피언스 리그에 꽤 모습을 드러낸 팀이긴 하지만, 3시드인 그들과 같은 조에서 만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게다가 16강 이후의 토너먼트에 두 팀 다 올라갈 수 있는 확률은 더욱 낮았다. 첫 챔피언스 리그 출전인 베이포트 FC는 물론이고, 지난 여섯 번의 챔피언스 리그 출전에서 토너먼트에 진출한 적이 단 두 번뿐인 쾰른 07이 16강에 진출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었다.

    “만약 만나게 된다면 재밌어지겠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강? 뭐 하고 있어요?”

    동민이 웃으며 메일을 닫음과 동시에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민이 일어나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샐리가 서 있었다.

    “잠시 쉴까 해서요. 어차피 조 추첨 때문에 제대로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해서요.”

    머리를 긁적이면서 내놓은 동민의 대답에 샐리는 웃으며 말했다.

    “저하고 똑같네요.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에서 우리 팀의 이름이 불릴 거라고 생각하니까 뭔가 계속 두근거려서요. 지난 시즌부터 지금까지가 꿈같기도 하고요. 항상 TV로 보면서 언젠가는 저곳에 우리 팀의 이름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곧 그 광경을 본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막 뛰는 거 있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챔피언스 리그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그러면 잠시 커피라도 마실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휴게실로 향했다.

    “그런데 다른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커피를 마시면서 앉아 있던 동민에게 샐리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

    “단순히 이따가 있을 조 추첨이 기대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아서요. 아까 전부터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이거든요.”

    또다시 표정에서 티가 났다며 동민은 쓴웃음을 짓고는 조금 전의 메일에 관해서 설명했다. 한국에 있을 때에 함께 일하던 비슷한 또래의 유능한 동료가 얼마 전 분데스리가의 쾰른 07의 코치로 일하게 되었고, 어쩌면 이번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웃으며 설명했다.

    동민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샐리도 그 말에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같은 조에서 만나게 되면 재미있겠네요. 아, 혹시 그 사람이 강, 당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당하는 건 아니겠죠?”

    “어… 설마요. 그녀에게는 함께 일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그렇게 맥없이 당할 정도로 속속들이 알려지진 않았을걸요. 그리고 저도 그때하고는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농담 섞인 샐리의 말에 동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베이포트 FC의 감독인 지금의 그는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 분석관이던 동민과는 달랐다. 누군가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상처 입히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툴러 헛돌던 그때의 자신과는 이미 예전에 작별을 고했다. 동시에 자신이 바뀐 만큼 수연도 많이 변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만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경기가 끝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고, 예전과는 달라진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 그 사람이 여자였어요?”

    샐리는 동민의 말에 의외라는 듯 말했다.

    남자 프로 축구 무대에서 여자 코치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민과 비슷한 나이 대라면 코치로서 매우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아,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동민은 지금껏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성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저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빼둔 것이라 동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 동민의 태도에 샐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둘의 대화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의 시간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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