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의 종료
“그러면, 모두들 고생했습니다!”
동민의 말이 라커룸에 울려 퍼지고, 선수들의 환호성이 뒤를 이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38라운드, 포츠머스 타운 FC전을 3 대 1의 대승으로 마무리 지은 것이다.
마치 경기를 보러온 앨런 휴즈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베이포트 FC는 포츠머스 타운 FC를 상대로 대단한 경기력을 뽐냈다. 대패로 지지만 않으면 순위 변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마지막 경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경기 집중력으로 상대를 압박했고, 전반전에 먼저 조나단 케인의 헤딩골로 상대의 사기를 꺾어두었다.
그 이후는 완전히 베이포트 FC의 페이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가 되었다.
박주현과 로날드 조던의 투톱은 쉴 새 없는 움직임으로 포츠머스 타운 FC 수비진을 흔들었고, 해리 맥스웰과 아르센 디아라 두 명의 미드필더는 정확한 위치 선정과 깔끔한 패스로 상대 미드필더들을 압도했다.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은 관중석을 가득 메운 홈 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경기를 주도했고, 팬들은 그런 선수들의 활약에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후반 막판 터진 포츠머스 타운 FC의 추격 골도 경기장에 모인 세일러들의 목소리를 낮출 수는 없었다. 결국 3 대 1의 스코어로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의 환호성은 마치 폭발하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 선수들과 동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EPL 출범 이후 첫 승격, 그리고 첫 시즌에서 기록한 최고 순위인 4위, 그리고 처음으로 따낸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 기회까지. 베이포트 FC의 팬들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시즌의 마무리가 된 것이다.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브리큰돈 스타디움은 팬들의 축제 분위기로 변했고, 그것은 라커 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챔피언스리그로 갈 수 있다고! 예선 경기만 이기면 언제나 방송으로 보기만 했던 그 무대에 갈 수 있다니까!”
“4위! 4위라니까! 이게 믿어져!?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EPL에서 4위라고! 지난 시즌 챔피언십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했던 모리스톤 타운 AFC도 우리 밑이야! 미쳤어! 이번 시즌은 정말로 미쳤다니까!”
조용하던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에 차 소리를 질러대는 주장인 조나단 케인과, 마찬가지로 평소의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해리 맥스웰의 모습이 동민의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그들조차 크게 흥분할 정도니 다른 선수들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누군가는 우승도 아니고 고작 4위,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도 아니고 예선을 치러야 올라갈 수 있는 상황에 너무 오버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과 지난 시즌 초반만 해도 EPL이 아닌, 챔피언십에서 잔류를 목표로 하던 팀이 단 2시즌 만에 이룬 성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치 무도회를 꿈꾸기만 하던 신데렐라가 어느 날 갑자기 마법사의 도움으로 황금 마차를 타고 무도회에 들어서서 왕자의 눈길을 독차지한 것과도 같았다.
그만큼 이번 시즌에 거둔 성과는 선수들에게도, 그리고 팬들에게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기쁨과 환희에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라커 룸을 보면서 동민은 미소를 짓고는 이내 먼저 자리를 떴다.
“강? 혼자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런 동민을 눈치채고 샐리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 다른 스태프들과 실컷 축하를 하고 있던 듯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는 샴페인과 크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이 좀 있어서요. 먼저 가봐야 하거든요.”
그런 샐리를 보면서 동민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동민의 대답에 샐리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번 시즌의 주역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강 당신이잖아요. 일을 해도 다음에 하면 되죠! 오늘만큼은 주역답게 모두랑 좀 어울리자고요!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강 당신은 좀 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편이 좋아요! 축구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들하고 좀 더 함께하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붙잡고 그를 다른 사람들 쪽으로 질질 끌고 가려는 샐리에게서 동민은 낯익은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술? 아…….’
그녀의 입에서 나는 알코올 냄새에 동민의 머릿속에는 한 인물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동민은 곧바로 그 인물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사람이 이런 때에 술하고 거리를 둘 리가 없지.’
동민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수석 코치인 브라운 키드가 한 손엔 맥주를 들고서 신나게 특유의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앨런 휴즈가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잡힌 듯 어깨동무를 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이고… 브라운 수석 코치야 그렇다 치고 앨런은 술도 안 마셨을 텐데. 그보다 퇴원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으면서 저렇게 있어도 되는 건가?’
잠시 앨런 휴즈의 건강을 걱정하던 동민이었지만 이내 앨런 휴즈의 성격상 괜찮으니 저러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저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즐겁겠지만 지금은 어서 가서 할 일이 있었다. 동민은 끌려가던 발을 멈추고 샐리에게 말했다.
“샐리, 샐리. 잠시만요.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정말로 할 일이 있다니까요?”
“아이, 정말, 오늘 하루 정도는 미뤄도 되잖아요!”
“아뇨, 사람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라서 지금 바로 가봐야 하거든요.”
“오늘요? 대체 누구길래 그래요?”
그녀의 반응에 동민은 주변이 시끄러워서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넌지시 말했다.
“샐리, 당신 삼촌이요. 뭣하면 같이 가겠어요?”
“…네?”
동민의 말에 샐리는 잠시 굳어졌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동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뒤의 말은 농담이에요. 어쨌든 정말로 오늘 레이미 볼든 구단주하고 이야기를 할 일이 있어서요. 4위라는 성적도 좋고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기쁘지만, 결국 기회를 얻은 거지 확실한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니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까지 병행하면서 다시 한번 리그의 상위권을 노리려면 해야 할 준비가 많으니까요. 저도, 그리고 구단도.”
동민의 말에 샐리는 확 정신이 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환호하면서 잠시 발걸음을 쉴 타이밍에서조차 더 앞을 바라보고 갈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었다.
“…미안해요, 저는…….”
“아뇨. 말해준 것은 기뻤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하고 좀 더 어울리라는 말도 새겨들을게요. 단, 오늘만 빼고요.”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지금의 팀과 성적에 만족하고 축배를 들려 할 때에, 동민은 어떻게 하면 다음 시즌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동민은 그런 그녀에게 웃어 보이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아, 맞다.”
“네?”
발걸음을 돌려 걸어가던 동민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샐리를 마주 보았다.
“이번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것에 대한 축하는 다음번에 해요. 조만간 둘이 산책이라도 같이 하면서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 정말 안 어울리는 짓을 하지 말 걸 그랬나.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그 말을 하고 몇 분 후, 동민은 레이미 볼든 구단주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레이미 볼든 구단주와 다음 시즌에 대한 상의를 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던 동민이지만, 마지막 경기의 승리와 팀의 성적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흥분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지막의 그 꼬이는 듯한 말이었지……. 맙소사.’
동민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흥분에 전염되어서 우쭐해진 마음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한 것이다.
‘마지막에 샐리 표정이 진짜 깬다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닌가? 아니, 맞는 것 같은데. 신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어. 이제 한동안 그녀를 어찌 본담? 애초에 그런 말을 대체 왜 했지? 돌아버리겠네, 진짜.’
동민은 스스로의 말실수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번에 그녀를 본다면 부디 아까 전 그가 했던 발언은 그녀가 잊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들뜬 입이 문제지, 입이 문제야. 에휴.’
동민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억지로 머리에서 밀어냈다. 레이미 볼든의 사무실이 눈앞에 보인 것이다.
“오늘 제 억지에 이렇게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동민은 레이미 볼든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4위와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정 지은 경기가 끝난 지금 시간에 경기장이 아닌 이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동민의 억지스러운 부탁 때문이나 다름없었다. 동민은 경기가 끝난 직후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 것이다.
“아뇨, 당신 부탁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환영해야죠.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높이로 팀을 올려놓은 장본인이니까요. 선수들을 몇 명이나 데려왔든, 어떤 선수가 얼마나 잘했든 이번 시즌의 주역은 당신인걸요. 당신은 나나 앨런이 예상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에요.”
레이미 볼든은 그런 동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번 시즌의 모습만으로도 베이포트 FC의 구단주이기보다 먼저 가장 큰 팬 중 한 명인 그에게, 동민의 부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부른 거죠? 무슨 일이든 이야기만 해요. 재계약인가요? 그거라면 이쪽에서 더 환영할 건데요. 사실 어떤 일이든 대부분 들어줄 수 있어요. 아, 샐리와 사귄다고 이야기하는 거라면 조금 생각하게 해줘요. 우리 형님이 스포츠 분야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으니까.”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녜요. 특히 샐리와의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요. 농담도 좋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걸요.”
갑자기 휙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레이미 볼든에게 동민은 빠르게 이야기를 되돌렸다. 조금 전까지 샐리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동민이었던 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적지 않은 당황이 섞여있었지만 레미이 볼든이 눈치 챌 정도는 아니었다.
“100% 농담은 아니었긴 한데… 그래서 무슨 이야기죠?”
레이미 볼든은 조금 아쉽다는 듯 웃고는 동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음 시즌 구상이죠. 챔피언스 리그 참가와 리그 상위권에 대한 재도전, 두 가지 모두를 위해서라면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니까요.”
동민은 조금 전과는 다른, 진지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