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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지지 않는 승리 (198/270)

믿어지지 않는 승리

‘대충 3주 정도였나. 시즌 전체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기간이고 부상당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 시즌에는 유난히 긴 느낌이었단 말이야.’

해리 맥스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라운드 안쪽으로 들어왔다. 발목 부상으로 빠진 3주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어서 그라운드로 복귀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가 빠진 사이 필립 포덴이라는 팀의 새로운 활력소가 등장한 것도, 사람들이 모두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다던 일정에서 승리를 이어간 것도 모두 팀의 일원으로서, 그 한가운데에서 보고 싶었다.

‘그럼… 이 브리큰돈 스타디움에서만큼은 내가 저들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로널드 조던이 빠지고 해리 맥스웰이 들어가면서 동민의 전술은 또다시 변화했다.

우측 미드필더였던 잭 하워드가 위치를 더욱 위쪽으로 옮기면서 에딘 페트로비치와 함께 넓게 펼쳐진 투톱처럼 움직였고, 이안 페트로프 위에는 해리 맥스웰과 벤 로이터, 필립 포덴이 바짝 좁혀 서 있었다. 측면을 내주더라도 중앙에서의 패스만큼은 막겠다는 동민의 의지가 엿보였다. 동시에 역습 상황에서 언제든, 누구를 통해서든 에딘 페트로비치라는 과녁을 향해서 롱패스를 쏘아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교체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스톡포트 시티의 공격은 마이크 반 데부르나 레오나르도 다 실바를 거쳐 측면으로 쉽게 향했지만, 정작 측면에서는 두꺼워진 베이포트 FC의 중앙 탓에, 공격진에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수비가 너무 많아.’

측면에서 닉 베손을 제치고 파고들던 데이비드 존슨이었지만, 아무리 그라도 센터백과 수비 라인까지 내려와 있는 이안 페트로프까지 넘어서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의 미드필더들에게 주려고 해도, 해리 맥스웰 등 중앙 미드필더들이 내려와 있는 상황은 그것마저도 어렵게 만들었다.

상대 수비의 인원수가 많다면 공격에서도 수를 늘리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계속해서 수비 라인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에딘 페트로비치와 잭 하워드가 눈엣가시가 되고 있었다.

결국 스톡포트 시티의 공격은 베이포트 FC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후반 28분, 다비드 페레즈는 변화의 칼을 꺼내 들었다. 마이크 반 데부르와 레오나르도 다 실바 뒤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고 있던 펠리페 루이스를 빼고 공격수를 투입하면서 투톱으로 변한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상대의 밀집 수비를 최전방 공격수 두 명의 콤비네이션과 움직임으로 뚫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그의 노림수가 채 빛을 발하기도 전에 베이포트 FC 또한 마지막 교체 카드를 손에 쥐었다. 전반 34분에 교체로 들어왔던 에딘 페트로비치가 다시 빠지고, 수비형 미드필더인 아르센 디아라가 들어온 것이다.

‘에딘 페트로비치를 다시 뺀다고?’

교체로 넣었던 선수를 다시 교체로 빼는 경우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교체로 들어갔던 선수, 아니면 포지션상 반드시 필요한 다른 선수가 부상을 당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불러들이고 그 자리를 채우는 상황 정도에서나 볼 수 있었다. 혹은 교체 투입된 선수가 감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그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 다시 빼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베이포트 FC에서는 부상도 없었고, 에딘 페트로비치의 경기력에 대한 경고라고 보기에는 교체되어 나오는 에딘 페트로비치의 어깨를 두드리는 동민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았다.

‘게다가 에딘 페트로비치 본인의 반응도 이상해.’

보통 교체된 선수가 다시 교체되어 나가는 경우에는 불만을 가지게 마련이다. 경기에 나서 끝까지 뛰고 싶어 하지 않는 선수는 거의 없다. 그러나 팀의 상황이나 본인의 플레이가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사실을 수긍하고 교체를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지 못한 선수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표정에 그 불만이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것이 다비드 페레즈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본인이 선수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리고 감독이 된 후에도. 그러나 지금 에딘 페트로비치는 다시 교체로 나가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혹시 내가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나.”

만일 베이포트 FC와 동민이 그가 공격적으로 나서길 기다리고 있었고, 드디어 다비드 페레즈가 공격적으로 변화를 주었을 때를 기다려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것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다비드 페레즈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후반 37분, 베이포트 FC의 추가골이 터진 것이다.

역전 골의 과정은 마이크 반 데부르의 패스를 교체로 투입된 아르센 디아라가 끊어내면서 시작되었다.

전반전부터 베이포트 FC의 밀집 수비를 뚫기 위해 좌우 측면까지 움직이며 많은 활동량을 가져갔던 그인 만큼 후반전 막판이 되어갈수록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려앉은 상대와 그들을 뚫기 위해 움직이는 팀 중 체력 소모가 더 많은 팀은 당연히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팀이다. 그리고 그 결과,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마이크 반 데부르의 패스 미스가 나왔다.

‘아!’

공이 그의 발을 떠난 순간 마이크 반 데부르는 아차 싶었지만 아무리 정교한 패스를 동료들에게 전달해 주는 그라도 이미 발을 떠난 공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패스는 아르센 디아라에게 끊어졌고, 아르센 디아라는 곧바로 측면에서 달릴 준비를 하던 잭 하워드에게 공을 연결했다. 공격을 위해서 위로 올라가 있던 스톡포트 시티의 풀백은 예상치 못한 패스 미스 상황에서까지 그를 막기에는 너무나도 멀었다.

에딘 페트로비치라는 1순위 수비 대상을 잃은 스톡포트 시티의 센터백들이 잭 하워드를 막아섰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중앙으로 툭 공을 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을 받은 사람은-

-추가골의 주인공은 벤 로이터! 오늘 멀티 골을 기록합니다!

경기장 내의 방송을 들으며 다비드 페레즈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지금껏 수비진의 경계 대상 1호였던 에딘 페트로비치를 빼면서 수비진을 끌어당기고, 측면에서의 빠른 공격으로 시선을 빼앗으면서 베이포트 FC의 미드필더 자원 중 가장 골문 앞 결정력이 뛰어난 벤 로이터의 마무리.

전부 베이포트 FC의 약속된 플레이였다. 스톡포트 시티가 더욱 공격적으로 나오면 레오나르도 다 실바와 마이크 반 데부르 두 사람에게 지워지는 짐이 더 커질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골이 이 경기의 마지막 골이 되었다.

‘이겼나.’

동민은 경기가 끝난 뒤 다비드 페레즈와 악수를 하고 기자회견까지 끝난 뒤에도 멍하니 앉아있었다. 스톡포트 시티를 상대로 2 대 0의 완승을 가져갔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홈 팬들의 환호성도, 아쉬운 듯 쓴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하던 다비드 페레즈의 모습도, 경기 전에 말했던 대로 스톡포트 시티라는 거함을 잡아냈다는 사실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던 기자들도 모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민은 숙소로 향하는 대신,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의자에 앉아 가만히 몸을 기댔다. 그제야 조금씩 경기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심판의 휘슬 소리가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는 순간 들려왔던 환호성의 뜨거움도, 악수를 할 때 자신도 지는 것을 싫어한다며 쓴웃음 속에서 전의를 불태우던 다비드 페레즈의 손아귀 힘도, 지난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있던 기자의 표정도 이제야 전부 현실감이 들었다.

“이겼구나. 진짜로.”

지난 1차전에서 마지막 마이크 반 데부르의 역전 골로 패배했을 때, 동민은 그런 최고의 팀에게 닿을 수 있다는 희망과 강팀이 강팀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동민과 베이포트 FC는 드디어 스톡포트 시티라는 강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멍하니 있던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웃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남은 경기는 많지만, 시즌 종료까지 달려야 하는 시간도 길지만 오늘 경기로 동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난 틀리지 않았어. 내 방식도, 선택도.’

이대로만 가면 어쩌면 다음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라는 더 커다란 무대에 설 수도 있다. 만약 리그 내에서 계속해서 지금의 성적을 유지하고 출전권을 얻는다고 해도 그 큰 무대에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과 베이포트 FC에 대한 불안감이 있던 그는 오늘 경기로 그 불안감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졌지만 희망을 보았다, 혹은 다음번에는 이길 수 있다, 정도로 스스로에게 미래를 기약하는 말을 했다면 오늘은 드디어 스톡포트 시티라는 거함을 잡아냈다. 아무리 챔피언스 리그가 큰 무대라고는 하지만 오늘 했던 것처럼만 할 수 있다면 어떤 팀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스톡포트 시티든,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든, 아니면 다른 리그의 강팀들이든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환희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강? 괜찮아요?”

동민의 웃음 소리가 잦아들 무렵, 사무실 문이 열리고 샐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방 안에 혼자 앉아서 웃고 있는 동민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샐리? 무슨 일이에요?”

“아, 그… 잠깐 두고 온 물건 때문에 들렸는데 여기서 웃음 소리가 들려서 왔거든요. 경기도 끝났는데 집에 안 돌아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조금 다급하게 받아친 그녀의 물음에 동민은 대답할 말을 찾느라 잠시 눈을 돌렸다. 차마 오늘 경기를 이겼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아서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고 말하기는 뭔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 그게… 저도 두고 간 물건이 좀 생각나서…….”

동민은 그렇게 말을 돌리려다가 샐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을 본 동민은 거짓말을 그만두고 사실대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거짓말이에요. 사실은 오늘 이겼다는 게 막상 실감이 잘 안 나더라고요.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면 전부 다 꿈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이긴다고 허세는 잔뜩 부려놨는데 정말로 이기니까 잘 안 믿겨서요. 웃기죠?”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이길 수 있다고 기자회견장에서는 호언장담을 하고 실감 나지 않아 이런 곳에 앉아 있던 스스로가 웃겼다. 그러나 샐리는 그를 보면서 웃고 있지 않았다.

“…미안해요. 나도 거짓말이었어요. 직접 봤는데도 우리가 그런 팀을 이겼다는 게 잘 실감 나지 않아서… 그래서 잠시 현실감 좀 가져보려고 왔거든요. 제일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 여기니까요. 똑같네요.”

그녀 또한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믿어지지 않는 승리에 동민도 그녀도 같은 반응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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