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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해서(2) (196/270)
  • 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해서(2)

    ‘이 자식은 뭐야? 안 뛰는 곳이 없는데. 체력 안배 같은 건 아예 머릿속에서 없는 건가? 특별히 체력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스톡포트 시티의 우측 풀백, 벤 리차즈는 질렸다는 눈으로 베이포트 FC의 좌측 윙인 야야 둠베흐를 바라보았다. 전반전이 시작되고 30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뛰고 있었다. 단순히 열심히 뛴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후반전은 아예 머릿속에서 없는 것처럼 뛰고 있잖아? 측면 침투부터 중앙 커버까지 진짜 경기장 모든 곳을 다 밟으려는 것처럼.’

    아무리 프로 선수들이라도 90분 내내 단 한순간도 쉼 없이 달리기는 쉽지 않다. 전후반 45분씩 나눠서 경기를 진행하지만 스프린트를 그 시간 내내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잠깐씩 숨을 고르면서 뛴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 초반에 아무리 열심히 뛰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후반에 퍼져 버리면 팀의 구멍이나 다름없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기의 마지막까지 생각하면서 그때까지 뛸 수 있도록 체력 안배를 해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것은 프로로 데뷔하기 전인 유스 팀에서부터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야야 둠베흐에게 그런 후반전을 위한 체력 안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전후반을 모두 그 정도로 뛸 만큼 체력적인 부분이 대단한 선수도 아니었다.

    ‘감독님은 빠른 속도로 내 뒤의 공간을 노리는 걸 조심하라고 하셨지, 특별히 체력이 대단한 선수라고 말하신 적은 없어. 베이포트 FC의 다른 경기를 봤을 때에도 뚜렷하게 체력이 좋은 모습은 아니었고. 오히려 후반 막판이 될수록 조금씩 지치는 모습이 보이던데……’

    그런 선수가 미친 듯이 뛰면서 측면 공간 공략과 중원 장악 지원, 수비 지원까지 하는 것을 본 벤 리차즈는 단 한 가지 가능성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미친 듯이 오버해서 저 움직임들을 전부 해내고는 있지만, 일단 수비에 집중하면서 위험한 상황만 막으면 된다. 저렇게 뛰어서 지금까지는 경기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어도 오래 지나지 않아 체력이 바닥날 테니까.’

    다비드 페레즈가 지금껏 자신이 가르친 선수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영리하다고 평했던 그의 눈은 정확했다.

    중원을 압도하고 있는 스톡포트 시티를 상대로 베이포트 FC가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고 경기를 버티고 있는 기반에는 야야 둠베흐의 헌신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마치 베이포트 FC에 11명이 아닌 12명이 뛰는 것처럼, 공격과 수비 모든 곳에서 그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더 적었다.

    닉 베손과 함께 측면 수비를 하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중원 압박을 함께해 주고 있었고, 롱패스를 받기 위해서 로널드 조던의 뒤쪽으로 파고드는가 싶다가도 좌측 측면에 직선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야야 둠베흐가 베이포트 FC의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

    ‘저 녀석이 지치면 그때부터 베이포트 FC는 제대로 플레이를 할 수가 없어질 거야. 지금도 초반보단 살짝 지쳐 보이니까. 오래 가봐야 후반전이 조금 넘어가면 끝, 짧으면 전반전만 뛰고도 체력이 바닥나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수비에 집중하면서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야야 둠베흐가 미드필드 지역에 함께 압박을 넣는다고 해도 마이크 반 데부르나 레오나르도 다 실바가 공을 뺏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괜히 중원에 대한 지원을 하려다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디 계속 날뛰어 보라지. 끽해 봐야 전반전에나 날뛰고 말 녀석이니. 그리고 저 녀석이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이 베이포트 FC가 무너지는 순간이 될 테니까.’

    벤 리차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칼날을 갈고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슬슬 야야 둠베흐도 지쳐 보이는데 다음 전술로 넘어가야겠지.’

    동민은 신중한 표정으로 야야 둠베흐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민이 경기 시작부터 노린 첫 번째 전술은 야야 둠베흐가 있는 측면에서의 움직임이었다.

    세 명의 중앙 미드필더로 중원을 구성하면서 상대의 핵심인 마이크 반 데부르와 레오나르도 다 실바를 압박하더라도 그들을 억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중앙에 몰리는 미드필더들 덕에 열리는 측면 공간도 언제든지 상대가 노릴 수 있다.

    그 때문에 동민은 야야 둠베흐에게 후반전을 생각하지 않고 초반부터 최대한 움직이기를 주문했고, 경기 시작 직후 그의 컨디션까지 올리면서 측면에 집중했다. 측면에서의 영향력과 중원 지원 모두 초반부터 베이포트 FC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는 참 좋았지. 이제 슬슬 바꾸어야 할 타이밍 같지만.’

    경기 초반부터 야야 둠베흐의 헌신적인 활동량을 앞세워 스톡포트 시티의 초반 기세를 눌러놓는 동민의 초반 전략은 성공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지.”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빠르게 다음 전술 변화를 준비시켰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국면이에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줄곧 이야기했죠? 믿을게요.”

    “걱정 마세요. 믿어주셨는데 실망시키진 않을게요.”

    에딘 페트로비치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전반전 34분, 전반전이 끝나기까지 10분 하고도 조금 남은 상황에서 에딘 페트로비치는 야야 둠베흐와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리고 그가 들어서자마자 베이포트 FC의 움직임은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에딘이 들어오면 측면으로 빠지라고 했지.’

    지금껏 최전방에서 빠른 속도로 상대의 뒤를 노리던 로날드 조던은 야야 둠베흐가 헌신적으로 뛰던 좌측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삼아 지금껏 뒤로 물러나 있던 벤 로이터와 필립 포덴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잔뜩 움츠려 있던 베이포트 FC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망할, 갑자기 확 밀고 들어오는데.’

    생각지 못한 전반 막판의 맹공에 스톡포트 시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 내내 한발 뒤로 물러서서 야야 둠베흐의 지원을 받으며 압박을 위해서만 전진하던 벤 로이터와 필립 포덴이 급작스럽게 공격에 가담하는 일은 그들에게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측면에서 폭넓게 움직이던 야야 둠베흐의 체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벤 리차즈는 측면으로 위치를 옮긴 로널드 조던 때문에 더욱 수비에서 시선을 돌리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 타이밍에 공세로 전환한다고?’

    당황한 것은 다비드 페레즈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전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0여 분, 그 시간을 위해서 급하게 전술을 다시 생각하고, 선수들을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만약 베이포트 FC가 지금 이런 변화를 10분이라도 빨리 가져갔거나, 후반전이 시작되고 나서 가져갔다면 다비드 페레즈 또한 상대의 전술이 어떻게 변했는지 깨닫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추가시간까지 합쳐봐야 십여 분 남짓으로는 상대가 정확하게 어떤 것을 노리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떠올리기에는 너무 촉박했다.

    ‘교체카드 한 장을 벌써 써가면서 도박수를 둔다고? 전반전 내내 의외의 수가 없어보였는데 이런 방식으로 찔러 들어올 줄이야.’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베이포트 FC의 공격에 제아무리 다비드 페레즈라 해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려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대응을 하든지, 아니면 일단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침착하게 버티면서 후반전을 바라볼지, 단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선수들을 믿으면서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고 후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베이포트 FC가 에딘 페트로비치라는 교체 선수를 정확하게 어떻게 활용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상식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그저 선수들에게 에딘 페트로비치의 높이와 로날드 조던의 속도를 조심하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비드 페레즈는 떠올렸어야 했다. 베이포트 FC와 강동민은 언제나 상식과는 거리가 먼 방법을 노려왔다는 사실을.

    ‘어?’

    스톡포트 시티의 중앙 수비수, 빈센트 윌리엄스는 공중에 뜨려는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느낌에 멈칫했다. 빈센트 윌리엄스는 다비드 페레즈가 경기 전부터 지적했던 에딘 페트로비치의 높이와 공중볼 장악 능력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그와 몸싸움을 하면서 공중볼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날아오는 롱패스를 머리로 걷어내려는 찰나, 갑자기 찾아오는 불길한 예감에 잠시 그의 몸이 멈추었다. 챔피언스 리그 등 여러 큰 무대에서 겪었던 경험들이 그가 무언가 커다란 실수를 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그 생각을 지워내고 공중에 몸을 띄웠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는 에딘 페트로비치와의 공중볼 싸움을 가까스로 승리하고 베이포트 FC의 롱패스를 차분하게 머리로 걷어냈다. 상대에게 해리 맥스웰이라도 있었다면 꽤나 위협적인 패스였을 수도 있겠지만, 이안 페트로프가 급하게 올려준 패스에 해리 맥스웰만큼의 정확도와 날카로움은 없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날아들었다.

    ‘잠깐, 지금 패스를 올린 게 이안 페트로프? 그러면 지금 침투한 사람은…….’

    공중에 높이 떠올랐던 그는 떨어지면서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주위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센터백 콤비인 스콧 맥마흔은 벤 리차즈와 함께 측면을 돌아 들어오려는 로널드 조던을 막고 있었고, 안쪽으로 파고들던 필립 포덴은 아래쪽까지 내려온 중앙 미드필더에게 마크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이 떨어지는 곳에는-

    ‘망할. 하필!’

    벤 로이터가 세컨드 볼을 잡기 위해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에딘 페트로비치의 높이와 로날드 조던의 속도, 그 두 가지에 신경 쓰던 스톡포트 시티의 수비진은 순식간에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가 모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빈센트 윌리엄스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무너지는 신체 밸런스를 억지로 버티고, 무릎에서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조차 잊고서 앞쪽으로 몸을 날려 벤 로이터의 슈팅 각을 좁히려 했다. 그러나 벤 로이터는 깔끔한 한 번의 터치로 그를 제쳐내고 골문 앞쪽의 수많은 선수들을 뚫는, 단 하나의 구멍을 발견했다.

    마치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실처럼 낮게 깔아 찬 그의 슈팅은 베이포트 FC와 스톡포트 시티 선수들 사이를 절묘하게 뚫고 골문 구석을 꿰뚫었다.

    전반전 막판에 터진 베이포트 FC의 선제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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