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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느낌 (193/270)
  • 익숙한 느낌

    ‘뚫는 게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고, 나름대로 대비도 해두었지만 이건 역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네.’

    동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콜링험 와프를 상대로 베이포트 FC는 전후반 60분이 다 되어가도록 점수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시즌에 챔피언십에서부터 베이포트 FC를 상대해 왔던 콜링험 와프는 앞으로 나서봐야 베이포트 FC의 먹이가 되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강한 수비벽으로 처음부터 무승부를 노리고 골문을 걸어 잠갔다.

    골이 터지고 흥미로운 게임을 원하던 관객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경기가 되었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해리 맥스웰이 없는 베이포트 FC는 밀집된 콜링험 와프의 수비벽을 뚫을 수 없었고, 오히려 가끔씩 나오는 그들의 역습에 위험한 고비를 겨우 넘기고 있었다.

    ‘역시 벤 로이터와 아르센 디아라 두 명의 미드필더로는 한계가 있는 건가.’

    입술을 깨물며 그는 오늘 베이포트 FC의 중원을 구성하고 있는 두 선수에게 눈길을 주었다. 벤 로이터와 아르센 디아라 두 선수 모두 열심히 뛰면서 패스를 이어주고, 찬스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콜링험 와프의 수비진과 미드필더진은 조금의 공간도 줄 수 없다는 듯 빽빽하게 뭉쳐 패스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탁월한 위치 선정과 노련함으로 공격을 이끄는 선수가 벤 로이터, 후방에서 정확한 패스로 계속해서 볼을 보급해 주는 역할이 아르센 디아라. 이 두 사람만으로는 확실히 모자라다는 거지.’

    아르센 디아라가 후방에서 패스를 공급해 준다고는 하지만 해리 맥스웰처럼 창의적인 패스를 전방에 공급해 줄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고, 노쇠한 벤 로이터 혼자서는 콜링험 와프의 밀집 수비를 흔들 수 없었다. 최전방의 에딘 페트로비치와 로날드 조던 투톱도 아무리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보려 해도, 수비 숫자가 너무 많아 제대로 되질 않았다.

    결국 후반 20분, 동민은 입을 열었다.

    “필립, 몸 풀고 투입 준비하세요.”

    동민의 그 말은 17살의 어린 선수가 첫 프로 데뷔전을 치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브리큰돈 스타디움에 모인 베이포트 FC의 관중들은 에딘 페트로비치가 빠지고 필립 포덴이 들어오자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필립 포덴이 U18 팀의 주축이 되는 멤버라 하더라도 U18 팀까지 다 꿰고 있는 팬들은 일부였고, 필립 포덴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그가 퍼스트 팀에서 활약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지금 U18 팀에서 잘하고 있다지만 주전으로 활약한 지 약 1년이 채 되지 않은 17살의 어린 선수가 벤치에 앉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감독은 어떻게든 승리를 위해 골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 어린 선수를 투입시킨 것이다.

    “이길 생각이 없는 건가…….”

    누군가의 입에서 동민을 향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리 해리 맥스웰의 부상으로 얇아진 중앙 미드필더 뎁스라고 해도 고작 17살의,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유망주가 벤치를 차지할 때부터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그저 부상을 대비한 최후의 보루, 혹은 대승을 거두고 있을 때 내보내서 경험을 쌓는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골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역습에 간간히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 그것도 공격수를 빼면서 필립 포덴을 투입하는 것을 본 팬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부 팬들은 감독인 동민의 용병술에 조금씩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필립 포덴의 첫 데뷔전은 팬들의 의문과 불만의 눈길이 대부분인 상태에서 치러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되, 너무 크게 부담을 가지지 말아요. 훈련 때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당신이 원래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상대가 생각지 못한 방향과 타이밍에 정확히 패스를 넘겨주면 되는 거죠.”

    동민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필립 포덴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당신 옆에서 뛰고 있는 동료들이 얼마나 경험이 많은지, 누구인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부터는 당신이 공격의 사령탑이 되어서 그들을 움직일 뿐이에요. 알아들었죠?”

    필립 포덴은 계속해서 이어진 동민의 말을 들으며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대답했다.

    “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대답하고 에딘 페트로비치와 교체해서 그라운드로 달려가는 필립 포덴을 보면서 동민은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답을 잘했지만 아직 어린 선수인 데다, 만에 하나 긴장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어벙하게 있으면 컨디션이라도 올려줘야겠어.’

    동민은 필립 포덴의 능력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이라면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필립 포덴의 창의적인 패스가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동민이 걱정하는 문제는 그의 실력이 아닌 정신이었다.

    ‘스테이터스에 정신적인 부분은 나오지 않으니 경기 중 확실하게 확인을 할 수 없는 데다가 플레이가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하다고 실제 성격까지 그런 건 아니니까.’

    아무리 나이답지 않은 플레이를 펼친다고 해도 결국 어린 선수고, 첫 데뷔전에 대한 부담감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을 동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부담감을 최대한 줄여주는 것이 감독인 본인이 해야 할 일이라며 동민은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 들어가는 필립 포덴을 보는 동민의 눈은 예상치 못한 놀라움으로 커졌다.

    [필립 포덴]

    17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5.4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1.9 / 20

    선호하는 플레이: 공을 잡고 템포를 조절

    특성 :

    장점 - 플레이메이커, 침착함

    단점 - 깃털 몸, 부정확한 태클

    현재 컨디션: 8/10

    ‘저 정도면 컨디션을 건드리지 않아도 되겠는데…….’

    첫 경기 출전으로 잔뜩 압도당해 있을 거라 예상한 동민의 생각과는 달리, 필립 포덴은 평소보다도 높은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조금 두고 볼까.’

    필립 포덴이 경기에 투입되자마자 컨디션을 올리려던 생각을 하던 동민은 그 생각을 잡시 미뤄두고 조용히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교체 출전으로 경기에 나선 필립 포덴은 자신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고 있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출전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감동에 계속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은 단순히 경험을 위해 경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 투입된 것이었으니까.

    ‘감독님이 말했던 대로 중앙에서 밸런스를 잡으면서 패스에 집중하면 되겠지. 힘내자. 반드시 데뷔전을 승리로 이끌어 보이겠어.’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첫 데뷔전이라는 무게감은 충분히 무거웠지만, 동민이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짓누르지는 못했다. 그저 처음 경기에 나선다는 흥분과 기대감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필립 포덴은 이 느낌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U18 팀에 올라와 처음으로 경기에 나섰을 때에도 그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무대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충족감이 그를 휘감았고, 결국 데뷔전에서 2개의 도움을 올리며 화려하게 U18 팀에 데뷔했다.

    필립 포덴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같은 시각, 벤 로이터는 교체로 들어오는 필립 포덴을 보면서 위치를 변경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들어오면 앞쪽으로 이동해 달라고 했었지. 저 어린 녀석이 나오기 전에 가능하면 경기를 기울게 하고 싶었는데.’

    자신과는 정확히 20살이 차이 나는 어린 동료를 그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필립 포덴이 오늘 경기에서 후보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과거에 자신이 데뷔전을 치를 때를 떠올렸다. 당시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전을 치렀던 벤 로이터는 주전 선수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경기에 투입되었고, 결국 경기 내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며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그 기억을 아직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벤 로이터는 그럴 일이 없도록, 필립 포덴이 교체 투입될 경우에 마음 편히 들어올 수 있게 경기를 미리 결정짓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과 아르센 디아라 둘이서는 끔찍하도록 단단한 콜링험 와프의 수비진에 균열을 낼 수 없었고, 결국 필립 포덴이 들어올 때까지 경기는 0 대 0의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나도 데뷔전의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었지. 어떻게든 저 녀석이 그런 기억을 가지지 않게 하려면 이 경기를 이기는 수밖에는 없어.’

    그것이 먼저 데뷔를 했고 이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하는 자신의 의무이자, 감독인 동민이 자신에게 바라는 점이라고 벤 로이터는 생각했다.

    자신의 데뷔와 어린 후배의 데뷔,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으려는 사람과 이제 막 선수 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 여러 가지로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바라는 것은 동일했다.

    이 경기의 승리, 그 것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모두의 바람이었다.

    ‘훈련 때 본 바로는 나름 싹수가 보이고 감독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어린 녀석이니 나를 포함한 다른 녀석들이 더 힘을 내줘야 해. 우리가 흔들렸다가는 저 녀석에게도 끔찍한 데뷔전이 될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저 어린 친구를 끌어줘야지.’

    그것이 처음에 가졌던 벤 로이터의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는 그 생각이 자신의 오만임을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필립 포덴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첫 경기라는 부담감에 젖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나 다른 동료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래!’

    로널드 조던이 뒤쪽으로 빠지면서 생긴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자, 필립 포덴은 거의 동시에 그가 달리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 넣었다.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과 오프사이드 라인을 뚫는 움직임에 수비도 미처 그를 따라잡지 못했고,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대일 찬스를 벤 로이터는 노련하게 마무리 지었다.

    공이 자신의 발을 떠나는 순간, 벤 로이터는 불현듯 떠올렸다.

    자신이 공을 받으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움직이도록 유도당하는 느낌.

    이런 느낌을 비교적 최근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박주현이랑 처음 같이 뛸 때 느꼈던 것과 같아. 그런 녀석을 한 시즌에 둘이나 볼 줄이야.’

    자신의 슈팅에 골 망이 출렁거리는 것을 보고 그는 뒤에서 신이 나 펄쩍 뛰는 어린 동료를 보았다. 필립 포덴이라는 인물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녀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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