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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그리고 천재 (189/270)
  • 발전, 그리고 천재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역시 틀리지 않았어.’

    동민은 전반전을 끝내는 휘슬 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자신의 방식을 관철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예전과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렸을 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슬럼프에 빠져 자신감을 잃기 전에도 이 방법이 맞을지, 자신이 본 것이 맞을지 등의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본 것이 틀렸다면 다시 정확하게 보고 지시하면 된다, 자신의 방법이 틀렸다면 더 늦기 전에 고치면 된다. 그는 스스로의 결정을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 스스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판단이 빨라졌다는 점이다. 판단을 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의 망설임이 없어졌다는 점을 넘어서 그의 생각 자체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프리미어리그와 감독 생활이 점점 익숙해졌지만, 그것을 가로막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사라진 것이다.

    이 두 가지 변화로 인해 지금의 동민은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빠르게 상대의 전술을 파악하고, 상대의 약점을 노리려 전술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중앙으로 압박해 들어가는 움직임이라서 급하게 선수들한테 지시했는데 잘 먹혀들어 갔어. 후방에서 빠르게 이어지는 롱패스도, 측면에서의 빈 공간을 이용하는 침투도 확실히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단, 상대를 압도했다고 할 정도의 경기 내용에 비해서 한 골밖에 만들지 못한 것은 마무리가 미흡했다는 거지.’

    동민은 라커 룸으로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 가볍게 전반전의 복기를 해뒀다. 머릿속으로 잘한 점과 아쉬웠던 점을 스스로 분석하면서도 동민은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그래도 역시 이 방법이 나한테, 그리고 베이포트 FC에 잘 맞아. 그것만큼은 확실해.’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이 택한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한 가지 전술에 집중하는 대신, 상대에 맞춰서 여러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지금의 방식이 이런 경기력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좋아. 후반전에는 어떻게 나올까…….’

    그의 눈에서는 슬럼프에 빠져 있던 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자신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지?”

    라커 룸 대화와 후반전 전술 지시가 끝나고, 선수들이 입장을 준비하려 모일 때 주현은 슬쩍 빠져나왔다. 동민의 옆에 선 그는 다른 선수들이 듣지 못하도록 한국말로 낮게 속삭였다.

    “뭐가?”

    동민은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현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얼버무리려 고의적으로 모르는 체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번 경기 직전부터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이번엔 확실한 것 같아서. 형 얼마 전부터 어딘가 어색했었다고 해야 하나, 고민이 있어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살짝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거든.”

    주현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동민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자신은 그렇게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주현은 확실하지는 않아도 어렴풋이 눈치를 챘었던 모양이었다.

    “…뭐, 조금은. 내 방식이 안 먹히는 게 아닐까 잠시 의심했던 것뿐이야.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것도 이제 잘 알고 있고. 이제 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확신이 있으니까.”

    동민은 한숨을 쉬듯 그렇게 말했다. 지난 한 달 가까이 했었던 고민들을 모두 흘려보낸 말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끝난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리고 형 방식이 안 먹힐 리가 없잖아.”

    주현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며 미소를 짓는 동민을 보면서 말했다.

    “한국에서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와서도 매번 경기 때마다 놀라고 있거든. 그런 쓸데없는 걱정 말고 매 경기마다 이길 생각이나 하자고.”

    “나도 알고 있다니까. 얼른 가서 후반전 준비하고 있어.”

    그는 퉁명스러운 척 대답하는 동민의 말에 씩 웃으며 다시 다른 선수들 쪽으로 걸어 나갔다.

    ‘확실히 저 녀석 말마따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너무 오래 흔들리고 있었어. 매 한 경기, 한 경기마다 집중해야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뚝뚝하게 그라운드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가 주현의 말을 듣기 전보다 올라가 있던 것만은 확실했다.

    ‘전반전은 측면, 그리고 아예 내려앉은 지금은 중앙에서부터 눌러앉을 속셈인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후반전에 들어서 2명의 교체 선수를 투입하며 전술을 교체한 지 겨우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베이포트 FC는 또다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이를 보며 라이언 펠트는 이를 악물었다.

    경기에 교체 투입된 선수들과 뒤바뀐 전술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드러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부분적인 전술 변화가 아니라 전체적인 패턴을 움직인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베이포트 FC는 몬머스 FC가 제대로 변한 것을 보여주기도 전에 어느새 중앙으로 무게를 두면서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할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그건 말이 되질 않아,’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전반전 내내 몬머스 FC와 라이언 펠트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양상이었다고 해도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려 할지는 알기 힘들었다.

    이미 압도당하고 있는 전반전의 부담감 때문에 더 이상의 실점만은 막기 위해서 더욱 수비적으로 나설 수도 있고, 반대로 실점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공격에 무게를 둘 수도 있다. 단순한 공격과 수비만으로도 선택지는 나뉘고, 그 방식을 따지자면 순식간에 선택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물론 몬머스 FC라는 팀의 본래 스타일과 라이언 펠트의 성향, 그리고 이어질 그들의 일정 같은 것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우리가 노리는 것을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알아차렸거나.’

    그 또한 라이언 펠트의 머릿속에서는 금방 사라졌다.

    자신의 전술이 경기장 내에서 확실한 색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 생각을 미리 한 본인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걸린다. 축구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니만큼 마치 수식처럼 1+2=3에서 1을 2로 바꾼다고 곧바로 4라는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만큼 익숙해지고,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후반전이 시작되고 겨우 몇 분 만에 베이포트 FC의 벤치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전술을 지시한 자신조차 아직 그 결과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이포트 FC는 대비를 하려 했다. 마치 설계도의 일부분만 보고서 곧바로 건물 전체의 문제점을 찾아내듯, 마법 같은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아. 만약 그게 아니면… 일부러 내가 이런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하기를 유도한 걸까?’

    마지막 세 번째, 세 가설들 중 그나마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는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또한 라이언 펠트는 고개를 저었다.

    앞선 두 가지보다는 훨씬 상식적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몬머스 FC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예측하는 일이나, 라이언 펠트가 생각한 그림이 그라운드 위에 제대로 그려지기도 전에 알아채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라이언 펠트의 행동이 베이포트 FC에 의해 유도되고 있던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는 있었다. 전반전의 측면 공략부터 전부, 그가 후반전에 이렇게 움직이도록 일부러 그를 유도한 거라면 그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방법을 고민했어도 간파당한 것이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 생각을 라이언 펠트는 거부했다. 그 가설을 거부한 것은 이성적인 그의 머리가 아니었다. 그 생각에 고개를 저은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닌 자존심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누군가를 자신의 생각대로 유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자신이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초능력자, 혹은 천재라 불리기에 마땅한 사람일 것이다.

    ‘전술적인 면에서 천재니 어쩌니 하는 다비드 페레즈와 맞붙었을 때에도 그에게 유도된다는 느낌은 받은 적 없어. 몇 번을 붙어봤지만 단 한 번도. 그런데 저런 갓 승격한 팀과 어린 감독에게? 아냐, 절대 아니야. 세 가지 모두 내가 생각했지만 터무니없어. 애초에 그런 사람은 있을 수가 없어.’

    그는 그렇게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했다.

    선수 시절부터 천재라는 말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노력을 바탕으로 성실한 플레이로 유명했던 그인 만큼,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라도 그 생각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일은 어떻게 베이포트 FC와 강동민이라는 인물이 자신과 몬머스 FC를 몰아넣고 있는가가 아니었다. 탐정 놀이는 경기가 끝난 뒤에 해도 충분했다. 그에게 지금 당장 정말 중요한 것은 저 괴물처럼 끈덕지게 모습을 바꾸며 압박해 오는 베이포트 FC를 어떻게 따라잡는가였다.

    “라이언,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아무리 대단한 팀이라도 약점은 있어. 스톡포트 FC도 두 메짤라가 침묵하면 힘이 떨어지고,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도 아래쪽으로 눌러앉아 버리면 고전해. 그처럼 저들도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라이언 펠트는 입술을 씹고 손톱이 손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길 때까지 주먹을 세게 움켜쥐면서 어떻게든 상대의 빈틈을 찾으려 노력했다.

    경기가 끝난 후, 라이언 펠트는 가만히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공격적으로 상대를 노리면서 경기의 틀을 뒤집으려던 노력은 실패했다. 순간적인 상대의 빈틈을 노려서 한 골을 만회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이미 그 전에 두 골을 내준 상황이었고, 공격적으로 나선 대가는 이어지는 두 번의 추가골이었다.

    4 대 1.

    그것이 라이언 펠트가 베이포트 FC라는 액체 괴물 같은 팀을 만나 혈전을 벌인 성적표였다.

    공격적으로 나서면 수비를 두텁게 하면서 역습을 노렸고,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그 공간으로 치고 올라가 헐거워진 수비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후반전 45분 동안 몬머스 FC와 베이포트 FC의 경기는 마치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탈락하고 마는 레이스와도 같았다.

    ‘정말로 천재라는 게 있긴 있을 수도 있겠어.’

    라이언 펠트는 목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간신히 참으면서 나지막이 신음을 삼켰다. 그가 알던 상식과 발판이 모두 무너져 버린 듯한 기분 속에서 그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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