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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의 천재 (186/270)
  • 전술의 천재

    ‘여기가 맞나?’

    동민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 입구 앞에서 어색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영국에 온 이후 구단주인 레이미 볼든의 초대를 받아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온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오늘은 그의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맞겠지, 뭐.’

    그는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하고는 힘 있는 발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도착한 그의 앞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 오셨군요. 바쁘신 와중에 꽤나 갑작스러운 초대였을 텐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는 동민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아뇨, 충분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고마워요, 미스터 페레즈.”

    사내는 매끈한 대머리에 날렵한 얼굴, 그리고 깔끔한 옷차림이 잘 어울렸다. 아직 50대가 채 되지 않은 젊은 사내는 스톡포트 시티의 감독인 다비드 페레즈였다.

    얼마 전, 전술의 변화를 두고 고민하고 있던 동민에게 전화를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일단 앉으시죠. 서로 바쁜 와중이라지만 여기 음식은 매우 맛있거든요. 이런 즐거움 정도는 즐겨도 상관없겠죠.”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그를 보면서 동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감독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는다는 의외의 사실과 그 이면에 무슨 뜻이 있을지 긴장하기는 했지만, 그 긴장을 풀 방법으로라도 일단 식사에 집중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민이 주문한 스테이크와 다비드 페레즈가 주문한 생선 요리도 어느 정도 바닥을 보이고 한 잔씩 마시던 와인도 끝이 날 무렵, 지금껏 가벼운 잡담을 하던 다비드 페레즈는 슬슬 본론을 입에 담았다.

    “…그나저나 오늘 이렇게 자리해 주신 것은…….”

    “전술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셨으니까요. 다비드 페레즈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로부터 그 말을 듣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거든요.”

    동민은 그의 말을 뒤이어 마무리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동민이 한창 바쁜 12월에, 그저께 끝난 경기의 재검토와 며칠 뒤에 있을 다음 경기에 대한 고민을 두고서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그저 저녁 식사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전화로 전술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다비드 페레즈였으니까.’

    라리가 무대에서 6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역사상 최고의 팀이라는 찬사를 듣는 팀을 만들었고, 그 이후로도 현대 축구에서 끊임없이 다른 이들보다 더 진보적인 전술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눈앞의 사내였다. 전술가로 유명한 그에게 초대를 받고, 전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은 동민에게는 너무나도 환상적인 유혹과도 같았다.

    그리고 올 시즌 초에 있었던 맞대결에서 3 대 2의 스코어로 패배했던 동민은 그 패배를 직접적으로 만든 이들은 스톡포트 시티 선수들의 환상적인 개인 능력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그도 당황할 정도로 빠르게 전술을 변화시키며 경기의 템포를 따라갔던 다비드 페레즈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는 다시 붙으면 이번엔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잘 모르겠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자신의 전술 철학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다음 맞대결에서 만나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자신감도 많이 깎인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동민이 오늘 이 자리에 온 또 한 가지의 이유였다. 전술가로 유명한 다비드 페레즈에게 전술 이야기를 하자며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들뜬 것도 물론 이유 중 하나였다. 동시에 그와의 대화가 현재 자신의 전술에 시즌 초만큼의 확신이 사라진 지금 상황에 대해,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가 이곳에 온 두 번째 이유였다.

    ‘전술가로 유명한 다비드 페레즈라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참고할 만한 게 있을지 몰라. 내가 내 방식을 고집하든, 혹은 스톡포트 시티의 전술을 벤치마킹하게 된다면 더더욱.’

    동민의 그런 생각은 만일 누군가 읽을 수 있었다면 스스로의 자존심마저 내려놓은 것이 아니냐고 판단할 정도였지만,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은 동민에게 큰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내가 참고할 거리가 있다면…….’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화에 집중했다.

    “…그래서 지금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죠. 상대에 맞춰서 전술을 짜는 지금의 방식이 가지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꼭 할 필요성은 없었던 것 같지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한숨이 섞여 있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힌트가 될 만한 게 있나 들어보려 했는데, 어쩌다 이게 이렇게 된 거람…….’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민의 머릿속엔 혼란과 후회가 가득했다.

    본래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뭔가 참고할 만한 것이 있나 알아보려 했던 그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틈이 생긴 곳으로 알코올이 들어가자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면서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은 동민은 곧바로 이야기를 덮으려 했다. 하지만 다비드 페레즈는 오히려 그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는 듯 계속해서 노련하게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이끌었고, 결국 동민은 숨기는 것을 포기하고 전부 이야기하는 것을 택했다. 다비드 페레즈의 마력에 휘말린 거나 다름없다며 동민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지지 않는 축구라… 왜 지난 첫 맞대결에서 그렇게 고전하게 되었는지 이제 알 것도 같군요.”

    동민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비드 페레즈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난 맞대결을 앞두고 그가 베이포트 FC에게서 가장 놀라웠던 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계속해서 변하는 전술이었다. 마치 본인들 특유의 색채가 없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변하는 그들의 모습은 천하의 다비드 페레즈조차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베이포트 FC와 동민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 동민이 말하는 문제도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특유의 색채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옅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없었나. 그런 상태에서 어떤 선수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 수 있는지 꿰뚫어 보고 전술을 짜왔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는데.’

    동민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그는 동민이 자신을 경계해서 적당히 말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민이 이야기를 멈추려고 했을 때에도 그저 흥미로우니 더 들어보자는 식으로 말을 진행시켰던 그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그리고 동민과 베이포트 FC의 현재 문제가 동민의 입에서 나올수록 다비드 페레즈는 동민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조차도 선수가 원하는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는지 알아보고, 그 움직임을 하게 만드는 데엔 긴 시간이 걸린다. 가능할 거라 예상한 재능 있는 선수들인데도. 거기에 실패하는 일도 있지.’

    재능 있는 선수들이 자신의 전술 위에서 더욱 그 재능을 꽃피우게 만드는, 전술의 천재 소리를 듣는 다비드 페레즈라 하더라도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특정 역할에 적응하는 것이 훨씬 오래 걸리는 선수들도 있었고, 혹은 아예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역할을 맡기거나 팀에서 떠나보내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젊은이는 선수를 보면 그 선수가 어떤 움직임이 가능한지, 상대 팀의 장단점을 상대로 어떤 활약을 할 수 있을지 안다는 거잖아. 그냥 보는 것만으로!’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아직까지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다. 동민이 그저 선수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깨닫고 맞는 역할을 쥐어주면서 움직임을 지시한다는 이야기는 그 정도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한계를 느낀다는 건가. 마르코를 만난 게 충격이 컸나 보군.’

    놀라워하면서도 다비드 페레즈의 냉철한 추리력은 동민의 말속에 숨겨진, 한계를 느낀 이유까지 추리해 냈다.

    그때그때 상대에 맞추는 전술만을 고집했기에 상대가 휘말리지 않으면 혼란을 이끌어내기 힘들다. 그만큼 상대에게 휘말리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전술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고, 그가 아는 한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본인 전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은 마르코 알베스,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동민처럼 아예 전술 철학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경우는 없었지만, 다비드 페레즈도 감독 경험이 적을 때에는 고민할 때가 많았다. 잘나가다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지금 상황이라면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감독으로서의 경험은 베이포트 FC가 처음이라고 했으니 더욱 그럴 법하지.’

    자신의 형체가 없이 상대에 맞추어 모습을 바꾸는 팀과,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팀.

    다비드 페레즈가 원하고 꿈꾸는 팀은 그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동민의 고민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가 대신 길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같은 리그의 경쟁 상대인 이상 알아도 그대로 말해줄 생각도 없지만… 이 정도야 괜찮겠지.’

    결국 동민의 고민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당신이 어떤 축구를 하고 싶었는지, 보여주고 싶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감독이 되기로 했을 때에 스스로 정한 게 있던 것 아닌가요?”

    동민은 다비드 페레즈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려 했다.

    “그야 물…….”

    그러나 다음 말을 입에서 내뱉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고 있는 동민을 보면서 다비드 페레즈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일단락 짓도록 할까요. 즐거운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야 저도, 그리고 당신도 내일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동민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뒤로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가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로 돌아 동민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맹세코 오늘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거나 하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실수로 꺼낸 이야기를 듣고서 떠벌릴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거든요. 다만 내년 2월에 있을 경기에서 참고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비드 페레즈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사라졌다. 동민은 그가 떠난 뒤로 한참동안을 우두커니 앉아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동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무언가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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