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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그러나 (184/270)
  • 패배, 그러나

    해리 맥스웰의 패스가 향하는 곳에는 박주현이 뛰고 있었다. 오늘 좌측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한 그는 경기 내내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제대로 된 찬스를 만들지는 못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끔찍하리만큼 촘촘한 수비는 주현이 파고들 공간이 없게 만들었고, 그들의 공중 장악 능력은 주현의 크로스가 에딘 페트로비치의 머리에 닿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장 열심히 뛴 사람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만은!’

    그런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경기 종료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좌측면을 파고들어 가는 그에게 해리 맥스웰의 패스가 향한 것이다. 그가 쏘아 보낸 절묘한 높이의 패스는 패스를 끊기 위해 헤딩을 시도한 수비수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그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몫이었다. 지금까지처럼 크로스를 올려서 상대 수비 사이의 공격수를 볼 것인지, 안쪽으로 꺾어서 파고들며 찬스를 만들어낼 것인지, 아니면 저번처럼 크로스를 올릴 것처럼 수비 라인을 속이고 쇄도해 들어오는 해리 맥스웰에게 공을 돌려줘 중거리 슈팅 찬스를 만들 것인지는 그에게 달려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공을 잡은 짧은 순간, 그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떠올렸다.

    먼저 지금까지처럼 크로스를 올리는 것을 떠올렸지만,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높이와 힘이 있는 에딘 페트로비치가 최전방에 있을 때에도 제대로 공중볼을 따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심지어 그나마 골문 근처에 있는 동료는 벤 로이터다. 그에게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키 크고 힘센 수비수들과 싸워 공중볼을 따내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과다한 욕심이었다.

    다음은 공을 끌고 안쪽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지만 그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골문에 슈팅이 가능한 각도까지 공을 끌고 들어가려면 3, 4명의 수비를 뚫고 들어가야 했다. 한두 명의 수비수를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리그 최고의 수비수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컷백(수비보다 골문에 가까운 앞쪽에서 일직선이 아닌, 상대적으로 수비가 헐거운 뒤쪽으로 공을 꺾어서 연결하는 일)으로 연결해 줄 수 있는 동료가 있는지 훑어보았지만, 이미 지쳐 버린 해리 맥스웰은 그 속도에 맞춰서 페널티 박스 앞쪽까지 쇄도할 수 없었다.

    ‘셋 다 어떻게 해도 공을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

    짧은 시간에 주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두 떠올려 봤지만 이거다 싶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운에 맡기더라도 벤 로이터가 받을 수 있도록 낮게 깔아서 골문 앞쪽으로 붙여봐야 하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골문 앞쪽으로 낮은 크로스를 올리기 위해 왼발을 뒤로 올렸다. 그리고 벤 로이터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주현은 그를 바라보는 벤 로이터와 눈이 마주쳤다.

    급하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 그를 바라보는 벤 로이터의 눈을 본 주현은 자신도 모르게 공을 골문 쪽으로 차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인사이드를 이용한 낮은 크로스가 아닌, 아웃사이드로 강하게 감아올린 공이었다.

    ‘응?’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골키퍼, 데니스 하워드는 빠르게 올라오는 공을 보았다.

    ‘또 크로스야? 그렇게 계속 막혀놓고서. 거기에 지금의 공격수는 아까처럼 헤딩이 좋지도 않은데.’

    골문 앞쪽으로 붙여서 올린 크로스를 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나오며 공을 잡아낼 준비를 했다. 이번 경기 90분 내내 상대의 좌측 미드필더는 크로스를 시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 크로스에 위기를 맞은 적이 없었다. 패스가 이어질 공간을 내주지 않으면 결국 상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측면에서의 크로스나 중거리 슈팅 시도 정도 뿐이었고, 그중 크로스를 차단하는 것은 그의 장기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앞에서 헤딩을 하려는 것처럼 점프를 시작하는 벤 로이터를 보면서, 데니스 하워드는 벤 로이터의 앞쪽으로 뛰며 공을 가로채려 했다.

    ‘거, 덩치도 크지 않은 늙은이가 어딜 감히…….’

    벤 로이터를 비웃으며 공중에 몸을 날리는 그때, 공은 빠르게 휘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예상한 지점보다 조금 더 골문 쪽으로, 그리고 다가올수록 공의 궤도는 점점 더 골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고.

    ‘어?’

    몸의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내민 그의 손을 스치고 골대를 강타한 뒤, 골라인을 넘었다.

    골문 안에서.

    2 대 1.

    베이포트 FC의 만회골이자,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 베이포트 FC의 경기에서 나온 마지막 골이었다.

    “…경기는 봤나요?”

    동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정신을 차리니 라커 룸에 있다가 나와 있어서 마지막 10분 정도는요.”

    조나단 케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 베이포트 FC의 경기가 끝나고 다음 날, 두 사람은 동민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럼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이해했어요?”

    동민의 말에 조나단 케인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으로서 가장 팀에 필요할 시기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퇴장당해 죄송합니다. 벌써부터 다음 시즌 이야기를 해서 어색하시겠지만, 다음 시즌이 된다면 주장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지금 당장 물러날 수는 없지만 역시 저는 주장에는…….”

    “아니, 잠시만.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장 완장을 내놓겠다니요?”

    침울한 얼굴로 사과하며 주장 완장을 내놓겠다는 그의 말에 동민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면서 당황했다.

    “제가 조금 더 신중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사는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경기 전에 팀 동료들이 그렇게 흔들릴 일도 없었겠죠. 거기에 경기장 안에서 한 실수는 절대 주장이 해선 안 되는 실수였어요. 말씀하시려는 대로 주장 완장 반납은…….”

    “아니, 그러니까 누가 주장을 그만두게 시키겠다는 이야기를 했냐니까!”

    동민은 도무지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자 당황해서 평소에는 하지 않을 어투로 소리쳤다. 그런 동민의 반응에 조나단 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이번 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려고 절 따로 부르신 거 아니었나요?”

    그의 말에 동민은 머리를 감싸 쥐고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조나단 케인과 처음부터 이야기가 어긋나 있던 것이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어요. 당신의 퇴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긴 했지만 주장 자리를 내놓으라든가 그런 뜻은 처음부터 없었다고요. 내가 그럴 일도 없는 데다 만에 하나 그랬다가는 팀원들도 전부 들고 일어날걸요.”

    동민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나단 케인이 경기 전의 스캔들 기사나 퇴장 건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다. 동민은 더욱 단어 선택을 골라야겠다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조나단, 확실히 말할게요. 나는 당신이 퇴장을 당하게 된 반칙이 불필요했고, 큰 실수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다만 그 정도로 몰려 있었다면 그걸 몰랐던 내 잘못이겠죠. 난 당신이 상심하긴 했어도 충분히 경기를 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동민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조나단 케인을 감싸주려는 의도가 들어가 있었다.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반칙이 큰 실수였긴 했지만, 그게 우리 패배를 못 박은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우리보다 뛰어난 팀이었을 뿐이죠.”

    동민은 아직까지는, 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동민 자신의 전술이 상대에게 어떠한 영향도 제대로 끼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잘하는 것을 막고 약점을 노리는 것이 그의 철학이지만 저번 경기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그것이 동민이 스스로 생각하는 패인이었고, 조나단 케인의 퇴장은 거기에 부가 요소일 뿐이었다.

    “결국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예요. 이번 스캔들 건으로 느꼈겠지만 우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수록 악의적인 관심도 늘어나죠. 그걸 견뎌내야 합니다. 나도, 당신도, 우리 팀의 모두가요. 그게 프리미어리그라는 이 거대한 무대에서 위에 서는 사람의 조건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말은 무거웠다.

    목소리나 말을 하는 분위기가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조나단 케인을 묵직하게 누른 것이다. 지금의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기장 안에서 좋은 플레이를 하는 것 이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조나단 케인은 자신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보다 어리지만, 감독이라는 것을 새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그가 감독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한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가슴 깊은 곳부터 인정하게 된 느낌이었다.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활약하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 외에도 맨 앞에 서서 선수들과 팀을 이끌어주는 사람, 그것이 감독이라는 것을 조나단 케인은 다시금 깨닫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 때문에 조나단 케인은 신중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대답했다. 자신보다도 어린, 그러나 주장인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짊어지고 있는 사내에게 경의를 표했다.

    “좋아요. 그럼 세 경기 동안은 강제적으로 휴식이겠지만 경기에 나서는 일 말고도 주장이 할 일은 많겠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까지의 무거운 느낌을 벗어던지고 웃었다.

    “하아, 지쳤다.”

    동민은 조나단 케인이 문을 나선 뒤 힘을 쭉 빼고는 의자에 길게 기댔다.

    “확실히 나서지 않고 조용하지만 주장 자리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 정도일 줄은 몰랐네.”

    정신적으로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심한 상태까지 몰려 있던 것으로 보이는 조나단 케인에게 퇴장으로 인한 3경기 출장 정지 징계는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회복한다면 더 든든한 캡틴이 되어서 선수들을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걸로 또 한 번의 패배인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경기는 시즌 세 번째 패배지만 지금까지의 패배와는 달랐다. 지금까지는 불운이나 선수 개개인의 능력 때문에 패배했다면, 이번에는 동민의 축구 철학 자체에 대한 한계를 엿본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지금의 철학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 한계를 피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어렵네. 앞으로 베이포트 FC라는 팀의 특색이 어떻게 잡히느냐, 라는 갈림길이 되는 거니까.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어”

    동민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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