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는가
그러나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경기는 45분이 남아 있었고,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처참하게 패배한 상태로 경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동민과 베이포트 FC의 자존심을 넘어서 동민의 축구 철학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였다.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을 단서를 찾아야 해.’
동민은 절망하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후반전에는 반드시…….’
조나단 케인은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상대에게 완전히 압도당하는 경기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관중들 중 일부가 더러운 놈이라며 욕을 하는 것도, 상대 공격수가 그와 충돌할 때마다 계속해서 말과 행동으로 그를 자극하는 것도 마음을 다잡으면 참아낼 수 있었다. 만약 그것들이 하나씩 따로 왔다면, 그리고 지금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따로따로 있었다면 그는 냉철하게 자신을 다잡고는 흔들리는 팀원들까지 챙길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주장이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가 팔에 주장 완장을 달고 있는 이유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하…….’
악의적인 기사로 인한 스캔들로 흔들리던 마음을 동민의 호소를 들으며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전반전 내내 시종일관 상대에게 압도당해 있었던 일은 그의 자신감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충돌할 때마다 비웃음과 모멸을 던져오는 상대 공격수의 행동과 몇몇 관중들이 그를 보면서 내뱉는 야유들은 그 상처를 조금씩 파고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계는 한순간 갑자기 찾아왔다.
“끄아악!”
로멜로 시몬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심판의 휘슬이 날카롭게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조나단 케인이 계속된 도발에 냉정함을 잃은 나머지 타이밍이 늦게 깊은 태클을 하고 만 것이다. 태클한 자신도 순식간에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 이미 공이 빠진 타이밍에 들어간 무리한 태클이었다.
‘아, 이건…….’
조나단 케인은 자신의 태클이 완전히 잘못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공이 빠진 상태에서 상대의 발목을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조차 깨달은 실수의 대가는 주심이 높이 들어 올리는 붉은색의 카드였다.
“아…….”
동민은 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 드는 순간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밀리던 경기력이었는데 이젠 수적 열세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민의 마음속에서는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향한 기대가 사라졌다.
전술을 교체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선수들을 바꿔주고 더 공격적으로 나서면 전반전에 내준 두 골을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희망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지만, 동민은 이제 깨끗하게 그것을 지웠다.
입술을 깨물며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조나단 케인을 보며 뭐라 한마디 해주려던 동민은 그의 표정을 보고 뭐라고 그를 다그칠 마음이 사라졌다.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표정이네.’
지난 시즌 앨런 휴즈의 밑에서, 그리고 이번 시즌 감독을 맡으면서 여러 상황을 보아왔던 동민이지만 조나단 케인의 저런 표정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분노, 후회, 절망, 자책 등의 온갖 감정들이 모두 섞여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본 동민은 지금 이야기해 봐야 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저 멍하니 걸어서 복귀하는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쳤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모르는 듯한 반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경기를 뒤집는가가 문제가 아니네.’
경기 스코어는 2 대 0.
인원수는 11 대 10.
거기에 경기 내용은 완전히 상대에게 압도당한 상태이기까지 했다. 어딜 보아도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그것을 느끼는 것은 동민이나 베이포트 FC의 선수들뿐만 아니라,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져도 어떻게 지느냐, 그게 중요하겠어.’
이미 이 경기는 이기기 힘들다. 그렇다면 지더라도 시종일관 상대에게 끌려다니는 모습 대신, 단 한번이라도 상대를 놀라게 하고 지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경기 이후의 다음 경기를 준비할 때 선수들의 그나마 사기를 되돌리기 쉽기 때문이다.
“단 한 방만 먹이면 된다, 라… 조건 한번 간단하네.”
동민은 본인의 말에 야유를 하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일방적이던 경기가 더욱 쉬워지겠어.’
같은 시각, 마르코 알베스는 시시하다는 듯 잠시 경기장에서 눈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일방적이던 경기였다. 베이포트 FC의 공격은 제대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골문을 두드린 적이 없었고, 빠르게 공격하려다가 공을 뺏겨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게다가 수비의 핵이었던 조나단 케인이 빠진 수비 라인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역습에 더욱 흔들릴 것이 뻔했다.
베이포트 FC의 전술을 보면서 시시하다는 평가를 했던 그지만, 이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방적인 경기의 분위기는 그의 흥미를 잃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팀에게 다비드 페레즈가 고전했다는 것이 믿겨지질 않는군. 게다가 그렇게 극찬을 하기까지 하고. 예상치 못한 전술에 당황하기라도 했던 건가? 아니면 단순히 상성이 좋지 못했던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지금의 경기 상대인 베이포트 FC와 동민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그가 신경을 쓰는 것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를 거꾸러뜨리던 그의 가장 큰 라이벌이자 친구인 다비드 페레즈뿐이었다.
그가 극찬을 하던 베이포트 FC의 경기를 직접 본 감상은 시시하다는 것뿐이었고, 직접 맞붙은 결과는 이렇게 일방적인 경기였다. 그의 흥미가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적당히 상황을 보다가 선수들 체력 관리나 해줘야겠군. 이런 경기가 뒤집힐 것 같진 않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따분한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이안 페트로프는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자신의 자리인 해리 맥스웰의 짝을 아르센 디아라에게 내주고, 오늘의 경기를 벤치에서 시작한 그는 오늘도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상대가 비록 강팀이지만 지금 베이포트 FC의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러갔고, 벤치의 분위기도 덩달아 심상치 않아져 갔다. 감독인 동민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생각에 잠겼고,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분위기는 후반 16분, 주장인 조나단 케인이 퇴장당하면서 절정을 맞이했다. 한 박자 늦게 나간 거친 태클로 레드카드를 받은 조나단 케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벤치를 지나 라커 룸으로 향했다. 그렇게 베이포트 FC는 한 명의 수비수가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벤치에 있던 교체 선수들 모두 그의 빈자리는 또 다른 중앙 수비수인 키애런 허튼이 메꿀 거라고 예상했다. 이미 상대의 역습으로 두 번이나 골을 허용한 상태였고, 벤치에 전문 중앙 수비수 자원은 그뿐인 데다 이 경기가 이미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실점을 줄여 골득실이라도 더 챙기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었다.
키애런 허튼 본인은 바로 자신이 몸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안 페르토프, 몸 풀어요. 교체 투입 준비하세요.”
동민의 선택은 중앙 수비수인 키애런 허튼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인 이안 페트로프였다.
모두들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눈을 껌벅이며 동민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안, 내 말 안 들려요? 지금 당장 교체 투입해야 하니까 빠르게 몸 풀어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빠르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내 아르센 디아라와의 교체 투입으로 그라운드를 밟은 이안 페트로프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 실험이라니. 우리 감독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이안 페트로프는 그에게 전술 지시를 하던 동민을 떠올리며 찬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해리 맥스웰에게 가서 동민의 지시를 전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뛰어갔다.
그가 자리한 곳은 그가 주로 서던 해리 맥스웰의 옆,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자리한 곳은 조나단 케인이 퇴장당하기 전에 있던 센터백의 자리였다.
동민은 그를 미드필더가 아닌, 센터백으로 내세운 것이다.
‘뭐야, 저건?’
마르코 알베스는 경기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의문과 당혹이 담긴 눈으로 상대의 교체를 바라보았다. 센터백이자 수비의 핵인 조나단 케인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수비형 미드필더인 이안 페트로프였다. 그가 아는 한 이번 시즌 이안 페트로프가 센터백을 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명장 놀이라도 해보겠다 이건가?’
강동민이 몇몇 선수들을 여러 포지션에 기용하면서 변화를 가져간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스톡포트 시티전에서 미드필더인 박주현을 최전방 공격수로 이용하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보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그런 멀티 플레이어인 선수들은 마르코 알베스도 나름대로 체크는 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중 이안 페트로프는 없었다.
‘아니면 경기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막 던져보는 건가? 설마. 아무리 어린 감독이라도 그 정도로 생각이 모자라진 않을 텐데.’
이안 페트로프의 본래 자리인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와 지금의 위치인 센터백 자리는 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뒤에 수비수들이 버티고 있는 상태로 먼저 상대 공격을 끊어내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자신이 뚫리면 뒤에는 골키퍼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수비해야 하는 센터백은 마음가짐부터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수비형 미드필더를 센터백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것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센터백에 서본 적이 없는 선수를, 10명의 수적 열세인 상태에서, 2 대 0으로 경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상대로 말이다.
동민의 의중을 헤아 려보려고 생각에 잠겼던 마르코 알베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든 상관없지. 어떻게 나오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 저쪽에서 전술을 바꾼다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면 같잖은 속임수에 휘말리는 것뿐이야. 해야 하는 것은 똑같아. 변화를 줄 필요는 없다.’
그는 우직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뚝심으로 자신의 전술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경기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조금은 달라진 것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뭘 노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 앞에서 그깟 잔재주를 부려봐야 더 손해만 본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줘야겠어.’
그는 경기 시작 후 처음으로 동민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