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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져 버린 평화 (179/270)
  • 깨져 버린 평화

    ‘요즘은 여러모로 기분이 좋네.’

    동민은 선수들의 훈련을 보면서 기분 좋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요즘 그의 기분은 내내 하늘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 있었다. 시즌의 3분의 1 정도가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성적은 여전히 고공 행진을 하고 있었고, 선수들의 분위기 또한 가벼웠다. 상대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는 베이포트 FC의 전술에 그들을 상대하는 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3번의 리그 경기 중 지금껏 두 번의 패배를 경험하긴 했지만 두 패배 모두 전술적으로 밀린 경기는 아니었다.

    한 번은 선수들의 개인 능력에서 밀렸다는 느낌이 강했고, 그리고 또 한 번은 운이 없었다는 말이 정확할 정도로 골대를 맞추는 등의 불운이 겹친 패배였다.

    그 때문에 동민의 자신감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부상 문제나 다른 일이 터지지만 않으면 이대로 가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이 걸린 4위까지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팀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쪽으로 눈을 돌려도 기분이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샐리와는 저번 일이 있던 이후로 어색함이 사라지고 오히려 편해지는 것을 넘어서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고, 주현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과도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동민에게는 마치 꿈만 같을 정도로 좋은 일들뿐이었다.

    ‘어쩌면 과거로 돌아온 이후 지금이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기가 아닐까.’

    동민은 문득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금의 상황이 즐거웠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단 한순간에 깨졌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뭐라고요?”

    “이 기사를 봐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동민에게 브라운 키드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건넸다.

    “아니, 잘못 들어서 물어본 게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동민은 그렇게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재빠르게 눈을 굴려가며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

    그곳에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적혀 있었다.

    “…조나단은 지금 어디 있죠?”

    “이미 연락해서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본인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던데요.”

    그 말에 동민은 머리를 감쌌다. 본인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스캔들이란 말인가, 그것도 불륜이라니. 게다가 그 기사의 대상이 조나단 케인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동민은 이런 기사가 나온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며칠 전, 아니, 조금 전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의 급작스러운 연락을 듣기 전까지도 기분 좋게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던 동민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을 어떻게든 따라가기 바빴다.

    “알았어요. 일단 조나단과는 제가 이야기해 볼 테니 바로 레이미 볼든 구단주에게 저 대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대응을 하든, 진화를 하든 해야 할 테니까요.”

    브라운 키드 코치에게 침착하게 말하는 겉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이 기사가 나온 이유는 뭐고요? 분명 이 날짜에는 훈련이 일찍 끝난 뒤 휴식을 주지 않았었나요?”

    조나단 케인과 둘이 만나게 되자 동민은 곧바로 이야기를 물어왔다. 인터넷 기사의 내용은 얼마 전 훈련이 끝나고 친구들과 클럽을 찾은 조나단 케인이 그곳에 있던 여성들과 단체로 만남을 가졌고, 그들 중 한 명과 밤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의 출처는 선수들의 사생활에 대한 기사를 주로 다루는 위클리 메일이라는 쓰레기통 같은 언론사였고 내용도 가끔 있는 찌라시 기사라고 생각할 정도로 조악했지만, 거기에 함께 있는 사진은 바닥에 가까운 신뢰도를 조금이나마 높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찍힌 사진 속의 조나단 케인은 어떤 여성과 친근하게 붙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사와 사진, 따로 보면 그저 찌라시거나 별 문제없어 보이는 두 요소였지만 함께 있을 때의 효과는 결코 적지 않았다.

    “감독님, 전 정말로 억울합니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저 기사는 거짓이라고요!”

    동민의 물음에 조나단 케인은 억울하다며 그에게 항의했다.

    “조나단, 난 당신을 심문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난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당신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난 그걸 믿을 거고요. 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이야기해 줘요. 그래야 구단 차원에서 대응을 하거나 할 수 있으니까요.”

    동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달래며 말했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조나단 케인은 앨런 휴즈 시절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던 믿음직한 선수로, 주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팀의 고참 선수치고는 조용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베이포트 FC 선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뿜어내거나, 경기장 내에서 팀을 대변하면서 선수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조용하게 선수들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었다. 경기장 내에서 잡음 하나 일으키지 않았고, 사생활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팀에 대한 적응이나 개인적인 일로 힘들어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었고, 묵묵하게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가 주장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사람인 이유였다.

    그 때문에 동민은 자신이 감독을 맡으면서도 그대로 그가 주장 완장을 차도록 한 것이다.

    그런 조나단 케인이 갑자기 불륜이라니, 동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동민의 말에 조나단 케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날은 친구의 생일이어서 파티를 했고, 그는 말렸지만 한 명이 거기서 여자들을 꼬였다는 이야기였다.

    “…그 여자들 중 몇 명이 절 알아보고 다가오긴 했지만, 맹세코 저는 거기서 오래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떴어요. 사진은 아마 그때 상황을 찍어놓고 옆에 있던 친구들을 잘라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 정말로 이 기사에 나올 만한 일을 한 적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억울함과 자신을 믿어달라는 간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동민은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알겠습니다. 당신 이야기를 믿고 이 기사를 낸 신문사 측에는 구단 입장에서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민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단, 지금의 베이포트 FC는 단순히 챔피언십의 한 팀 정도가 아닙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파란의 팀이고, 당신은 그 팀의 주장이에요.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해 주셨으면 해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입으로는 조나단 케인에게 경고를 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조나단 케인이 신중하지 못했다고 넘기기엔 뭔가 이상했다. 메스컴에서 별 것 아닌 일을 고의적으로 나쁘게 포장해 기사를 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식의 기사를 쓰는 것을 한국에서도, 이곳 영국에서도 여러 번 봐온 그였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단순히 베이포트 FC라는 팀이 주목받으면서 파파라치가 생겨난 것으로 치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일을 크게 포장시킨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미 2주 이상 지난 일을 이제 와서 터뜨리는 것은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평소 사생활에서도 잡음 한 번 내지 않던 그에게 갑자기 이런 스캔들이 벌어진 것은 분명 단순한 파파라치의 소행 정도가 아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이…….’

    그리고 동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혹시 고의적으로 조나단 케인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거다 싶어서 몰아붙이려고 쓴 건가?’

    특정 선수를 타깃으로 잡고 악의적인 기사를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동민도 아는 사실이었다. 만약 조나단 케인의 이번 스캔들 기사가 그런 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갑작스러운 기사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 생각에는 허점이 있었다.

    ‘조나단 케인을 타깃으로 잡고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는 건데…….’

    그런 타깃은 보통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유명한 선수들을 주로 잡는다는 것을 동민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나단 케인은 영국 내에서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다. 영국 국가 대표 팀의 부름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표 팀에서 시험을 해보는 정도거나 후보 자원에 불과했다.

    겨우 그 정도 선수로 스캔들 기사를 만들기 위해, 혹시나 법적 책임을 지거나 구단으로부터의 항의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이지?’

    조나단 케인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곧바로 레이미 볼든 구단주를 만나러 가는 동민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단순하게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왜 위클리 메일인지 뭔지 하는 사생활 찌라시 언론이 갑자기 조나단 케인을 물었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뭘까?”

    동민은 걸으면서도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나단 케인이라는 선수의 무엇이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려 애썼다.

    ‘국가 대표 팀 경기에 몇 번 나선 거? 얼마 전에도 뽑히긴 했지만 주전 중앙 수비수가 부상으로 이탈해서 후보 선수로 간 거였고 결국 뛰질 않았어. 팀에서의 활약? 분명 수비 뒤 공간을 든든히 막아주긴 하지만 그리 눈에 띄는 활약은 아니야. 그럼 대체…….’

    그렇게 의문에 빠져 있던 동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갑자기 스쳐 지나갔다. 아까 조나단 케인과 이야기할 때 자신이 했던 이야기가 문득 그의 머리에 강한 충격을 가져왔다.

    -지금의 베이포트 FC는 단순히 챔피언십의 한 팀 정도가 아닙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파란의 팀이고, 당신은 그 팀의 주장이에요.

    자신이 했던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에게 꽂혔다.

    ‘혹시… 타겟은 조나단 케인이 아니라 우리 팀 자체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의문이 풀렸다. 조나단 케인이라는 선수 개인이 아닌, 베이포트 FC의 주장이라는 면에서 바라본다면 그는 충분히 물고 늘어질 만한 사냥거리였다.

    승격 직후 곧바로 좋은 성적을 가진 팀이자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어린 감독이 이끄는 기록적인 팀. 그런 팀의 주장이면서 팬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던 선수의 스캔들이라면 충분히 타깃으로 삼을 만했다.

    ‘결국 노리던 건 조나단 케인이 아닌 베이포트 FC 자체였다는 건가…….’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팀이 단숨에 화제의 팀이 된 만큼 달갑지 않은 관심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한 번 지나고 말 일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계속해서 감수해야만 하는 부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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