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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되는 결승전 (177/270)
  • 되풀이되는 결승전

    “…이번 경기의 선발은 이상, 11명입니다. 방금 말한 선발로 나설 선수들뿐만 아니라 후보로 있는 선수들도 확실하게 몸 관리를 하면서 경기를 준비해 주길 바랍니다.”

    동민의 말에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 가운데 주현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작은 환희에 빠져 있었다.

    ‘됐어, 선발이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동민의 집에서 대화하면서 내심 불안했던 그였다. 동민은 어떤 선수가 잘한다고 그 선수를 계속해서 선발 명단에 올려놓는 타입의 감독이 아니었다. 상대에 따라, 선수들의 컨디션에 따라, 일정에 따라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은 매번 바뀌었다.

    그나마 선발 명단에 고정적으로 나선다고 볼 수 있는 선수들인 주장 조나단 케인이나 부주장인 해리 맥스웰, 로날드 조던 등의 선수들도 가끔은 상황에 따라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하거나 아예 벤치에도 앉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선수들이 상대 팀을 막고 공략하기 더 적합할 것인가, 이번 경기가 다음 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가 동민이 선발로 나설 선수들을 뽑는 주요 기준이었다.

    그만큼 선발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팬들의 생각보다 선수들의 부담감이나 불만은 적었다.

    일단 성적이 좋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누군가가 자신이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동민이 상대의 전술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면서 어째서 그가 아닌 다른 선수가 경기에 나서는지 설명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고 느끼는 선수들도 시즌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가장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 거라 생각한 골키퍼 자리조차 주전이었던 토마스 스톤스 대신 여름에 영입된 폴 맥마흔이 경기를 나서는 경우가 있었고, 이번 경기에서도 골문을 지키는 이는 폴 맥마흔이었다. 그만큼 선수들로서도 동민의 선발 명단은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다.

    ‘선발 명단에 든 이상, 확실하게 활약하고 싶어.’

    주현은 그렇게 다짐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베이포트 FC는 꽤나 모험적으로 나왔는데. 강동민 저 사람은 뭘 노리고 나온 걸까.’

    버턴 유나이티드의 심형만은 몸을 풀면서 불안한 눈빛으로 베이포트 FC 측을 바라보았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거나 한 적은 없지만, 의외로 그는 강동민에 대해서 들은 것이 꽤 많았다. 그의 에이전트인 최철민이 몇 년 전 동민이 영국으로 건너오는 일에 관련이 있었다고 그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대로라면 원래 K2 리그의 성남 페가수스에서 전술 분석관으로 있었다고 했던가. 그 FA컵 결승전 때 성남 페가수스가 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네.’

    그 경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가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중 가장 힘들었던 경기를 꼽자면 성남 페가수스와의 FA컵 결승전이었다. 전반전 내내 수비수의 도발에 휘둘린 그는 결국 필요 없는 거친 파울로 옐로카드를 받았고, 상대가 교체 카드 실수로 그를 프리하게 풀어두기 전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후반전에는 마음을 다잡고 경기를 승리하긴 했지만 그 경기의 전반전 45분은 그에게는 끔찍한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강동민이 그 경기에서 얼마나 영향을 끼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반전 내내 수비수가 날 전담 마크하면서 도발하던 걸 생각하면 당시 수원 블루 데빌즈에 대한 분석은 확실했다는 거겠지.’

    형만은 벤치 앞에 서서 선수들을 바라보는 동민을 보며 침을 삼켰다. 오늘 경기에 대해 그의 팬들이나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한국 선수들 간의 맞대결이라며 말했지만, 그가 이 경기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박주현이 아닌 감독인 강동민이었다.

    이제는 경험도 쌓고,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처럼 욱하는 성격은 많이 사라졌지만, 당시 그를 거의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것이 동민의 솜씨라고 한다면 이번 경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그와 버턴 유나이티드를 괴롭힐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은 감독님한테도 말씀드렸었지만 애초에 이번 상대 선발 명단을 보면 원래 생각하던 플랜하고 이미 거리가 생긴 것 같고… 진짜 집중해야 할 건 박주현이나 오늘 벤치에 앉은 해리 맥스웰 같은 선수가 아니라 베이포트 FC라는 팀, 그리고 강동민일지도 몰라.’

    그는 작은, 그러나 확실한 불안감을 가슴에 품고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다행히 큰 변화를 주진 않았어. 원래 생각한 대로 움직여도 크게 무리가 가진 않을 것 같은데.’

    동민은 경기가 시작되고 분주해진 그라운드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알아보았던 버턴 유나이티드의 강점은 안정적인 수비와 그 수비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패스워크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심형만이 있었다. 심형만은 안정적이지만 정적인 수비진과 공격진 사이에서의 중간 고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포트베리 FC와 상대하기 비슷해.’

    동민은 리그 개막전 상대였던 포트베리 FC를 떠올렸다. 느리고 안정적인 수비진과 발 빠른 공격진을 가지고 있던 그들을 상대할 때, 동민은 그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두 중앙 미드필더를 압박했었다. 상대가 공을 가지고 역습에 돌입하는 그 지점을 조여서 역습을 막고 재역습을 가하려는 목적이었다.

    ‘버턴 유나이티드의 움직임이나 전술의 기본 골자는 다르지만, 결국 약점으로 노려야 할 것은 같아. 공격에 나서는 키가 되는 선수를 잡아야 한다는 것.’

    포트베리 FC의 경우에는 수비를 맡은 라스 뮐러와 공격을 전개하는 조르쥬 레예스가 그 역습의 키가 되는 선수였다면, 버턴 유나이티드에서는 심형만이 바로 그 역할이었다. 다른 선수들이 공을 잡았을 때에 비해 그가 공을 잡았을 때 나오는 패스와 역습의 전개가 훨씬 더 예리했고,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효과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수비나 중앙 미드필더에서 이어진 공은 반드시 중앙에 있는 그를 거쳤고, 그는 공을 잡고 직접 파고들거나 빠른 연결로 기회를 만들었다.

    ‘심형만이라… 한국에서 FA컵 결승 때 상대하고 두 번째인가. 이번에도 심형만을 막아야 이길 수 있다니 참 얄궂네.’

    동민은 조금은 그리운 기분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당시 수원 블루 데빌즈의 에이스였던 그를 심리적으로 꽁꽁 묶어놓았던 일은 동민에게도 잊기 힘든 기억이었다.

    ‘그때처럼 의도적인 도발로 심리적인 부분을 흔들 수는 없어 보이니까.’

    그의 눈에 보이는 심형만의 스테이터스에는 예전처럼 불같은 성격이라는 단점이 보이지 않았다.

    [심형만]

    31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5.1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5.0 / 20

    선호하는 플레이: 부드러운 터치, 정확한 슈팅 선호

    특성:

    장점 - 정확한 패스, 왼발의 마법사, 플레이 메이커

    단점 - 깃털 몸

    현재 컨디션: 8/10

    ‘저번에도 확인했지만 역시 불같은 성격이라는 단점이 사라졌어. 예전에 봤을 때보다 성장 가능성도 올라 있고. 깃털 몸이라는 단점이 새로 추가된 것은 이제 슬슬 나이가 들면서 몸싸움이 떨어지게 되니까 추가가 된 건가.’

    자신이 FA컵 결승전에서 상대했던 심형만과 지금의 심형만은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달랐다. 측면에서 주로 활동하던 플레이 스타일도 중앙으로 옮기면서 달라졌고, 특성 또한 바뀌어 있었다.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특성을 새로 만들거나 지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는 주현을 보면서 잘 알고 있었다. 주현이 부천 유나이티드에 있을 시절, 새롭게 선호하는 플레이가 만들어질 정도로 얼마나 훈련을 했었는지는 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주현은 20대 초반에 한 일이었다면, 형만은 이미 본인의 플레이 스타일이 정해진 20대 후반에 이루어낸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선호하는 플레이 정도가 아니라 특성까지 바꿀 정도라니 얼마나 대단한 짓을 한 건지…….’

    지난 4년간 심형만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는지 동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런 선수를 막아내야 하는 게 내 일이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대로… 아니, 그보다 심한데.’

    심형만은 밀착되는 상대 수비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팀의 역습의 중심인 것은 그도, 그리고 감독도 잘 알고 있었다. 역습의 중심이라는 말은 형만을 통해서 빠르고 위협적인 역습을 전개할 수 있다는 말임과 동시에, 그만 막아내면 버턴 유나이티드의 역습은 그 힘을 잃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형만은 좌우 동료들의 협력을 받아 자리를 바꾸어가며 상대의 압박을 피하거나 본인의 탈압박 능력을 키웠다. 그런 노력 덕인지 수원 블루 데빌즈 시절과는 상대의 압박을 견뎌내는 능력 자체가 달라졌고, 이는 압박을 받아도 중앙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줄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공을 받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받고 패스를 줄 공간을 찾을 수가 없어. 마치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공간을 막고 있어.’

    형만은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공을 뒤로 돌리며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가 다시 공을 잡았을 때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이포트 FC의 중앙 미드필더 두 명은 자신에게 달라붙어서 한순간도 편하게 공을 잡고 있지 못하게 만들었고, 양 풀백은 중앙으로 좁혀들면서 그를 도우려는 측면 미드필더에게 이어지는 공간을 막고 있었다.

    공을 잡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칠 시간적, 공간적 여유도 없고 공을 내줄 곳조차 찾기 힘든 상황에서는 아무리 지금껏 버턴 유나이티드의 공격을 이끌던 심형만이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라고 언제나 활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팀들을 만나면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할 때도 있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신을 핀 포인트로 겨냥한 상대의 대응은 오랜 경험을 가진 그라고 해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드필더와 수비 사이의 공간이 너무 좁아서 공을 내줄 곳도 없고 동료들이 측면으로 빠질 만큼 시간을 끌 수도 없어. 이 끔찍하게 답답한 느낌은 틀림없이 예전 FA컵 결승전 때 겪었던 그 느낌이다.’

    형만은 이제야 그때 자신을 옭아매던 성남 페가수스의 전반전 경기력에 동민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심리적인 도발은 없지만,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움직임은 FA컵 결승전에서 그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하던 성남 페가수스 선수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보다는 훨씬 더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강동민한테 당하는 건가.’

    아직 전반전이지만 조금씩 그의 마음에는 먹구름이 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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