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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선수 (176/270)
  • 감독과 선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날씨가 달력을 보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가을에 맞지 않게 따갑던 태양이 내리쬐던 하늘도 어느새 높아진 지 오래였고, 그만큼 바람도 차가워졌다. 어느덧 가을도 점점 지나는, 기분 좋은 날씨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축구팬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국가 대표 데뷔전에서 활약을 했던 박주현과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감독인 강동민이 있는 베이포트 FC가 승격 팀의 돌풍을 이끌며 리그를 순항 중이었고, 한국 대표 팀의 간판스타인 심형만이 부상에서 복귀해 버턴 유나이티드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그 두 사람의 맞대결은 많은 팬들의 기대를 사고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4년 차의 심형만이 활약하는 버턴 유나이티드와 개막 후 아직까지 폭발적인 모습을 보이며 9경기 동안 6승 2무 1패라는 성적을 거두고 있는 베이포트 FC의 대결은 한국 축구팬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잘 준비 중이긴 한 거냐? 시즌 초반의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싶진 않을 텐데.

    병렬은 언제나 그렇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버턴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를 앞둔 동민을 격려해 주려고 오랜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동민은 그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항상 똑같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제가 해야 하는 만큼 하는 건데요 뭐.”

    그의 대답은 병렬의 예상 밖이었지만 간단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동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만 제대로 한다면 이길 수 있다는 뜻을 돌려서 전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병렬은 소리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꽤나 자신 있다는 말 같은데. 언제부터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게 된 거냐?

    “이 정도 자신감 없이는 못 하겠던데요. 어떤 팀을 만나든 제가 먼저 꺾여 버리면 선수들도 힘을 못 쓰잖아요. 게다가 비록 지긴 했지만 훨씬 더 무서운 팀도 만난 적 있는데 매번 걱정할 순 없는 거고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병렬은 그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감독으로 부임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가 정말로 감독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스톡포트 시티전이라면 나도 잘 봤다. 네가 강팀을 상대로 그 정도의 경기를 보여줬다는 것에 놀랄 정도였어.

    “아하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진 경기를 고평가해 주시면 그건 그거대로 부담스러운데. 아 맞다, 한국은 요즘 날씨 쌀쌀해지는 것 같던데 몸은 괜찮으시죠?”

    병렬의 솔직한 감상에 동민은 어색한 듯 말을 돌렸다. 언제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쓴소리를 하던 그의 칭찬은 동민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늙은이야 쓸데없이 건강하지. 내 걱정은 말고 네 몸이나 잘 관리해라. 아무리 아직 젊다지만 정도껏 몸을 굴려야 나중에 늙어서 고생을 안 하는 거야. 아직은 괜찮다고 예전처럼 몇 날 며칠 밤 새다가 네 컨디션 망가지면 그거야말로 팀에 마이너스밖에 되질 않아.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감독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요.”

    동민은 앨런 휴즈를 떠올리며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도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앨런 휴즈의 상황을 보면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말로 오랜만의 전화 통화를 끝마쳤다.

    Q: 그럼 마지막으로, 다음은 심형만 선수가 있는 버턴 유나이티드와의 맞대결인데 따로 각오나 그런 게 있으신가요?

    A: 아뇨, 다른 경기랑 같아요. 그리고 심형만 선수와의 맞대결에만 초점을 맞출 수는 없어요. 저랑 심형만 선수간의 맞대결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베이포트 FC와 버턴 유나이티드 간의 대결이니까요. 제가 경기에 나설지, 나서지 않을지도 감독님의 선택에 달려 있고요. 물론, 나서게 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이기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인터뷰 한번 착실하게 했네. 누가 보면 내가 문제 일으키지 말고 착실하게만 답변하라고 한 줄 알겠어.”

    거기까지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던 동민은 뒤에 있는 주현을 보면서 말했다.

    “사실 안 그래도 인터뷰 끝날 때 우스갯소리로 그러더라고. 기사에 싣진 않을 테니 혹시 형이 그렇게 인터뷰 얌전하게 하라고 시켰냐고 물어보더라.”

    “진짜?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주현의 그 말에 동민은 크게 웃으며 물었다.

    “입막음당해서 답할 수가 없다고 했지. 엄청 웃더라.”

    “야 임마, 아무리 그래도 네가 그렇게 답해 버리면 진짜인 줄 알 거 아냐!”

    “영국에 오기 전부터 인터뷰는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괜찮을걸, 아마.”

    동민이 짐짓 화를 내는 척 항의했지만 주현은 웃으면서 코코아를 홀짝일 뿐이었다. 그는 오늘도 동민의 숙소에 놀러와 있었고, 두 사람은 얼마 전 있었던 주현의 인터뷰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난 김에 그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본심은 어때?”

    한동안 입씨름을 즐기던 동민은 주현을 보면서 차분하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농담을 하면서 주현과 입씨름을 하던 것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이었다.

    “뭐가?”

    주현은 그런 동민을 보면서, 웃다가도 진지한 이야기로 갑자기 빠지는 것은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에게 배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가벼운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동민의 표정을 본 주현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되물었다.

    “다음 경기 말이야. 심형만하고 직접 맞붙고 싶다, 그런 생각 있지 않아?”

    그 말은 주현에게는 유혹과도 같았다. 인터뷰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가 K2리그에 있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K리그의 스타였던 심형만이다. KFC 시절부터 그의 플레이 모델이었고, 부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면서부터는 자신도 수원 블루 데빌즈의 심형만처럼 화려한 플레이로 공격을 이끌어 나가길 바랐다.

    같은 그라운드 위에서 뛰는 선수들 중에 더 뛰어난 선수들도 있지만, 전부터 동경하던 상대와의 맞대결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한때 자신이 플레이 모델로 삼던, 그리고 국가 대표에서 뛰어넘어야 하는 선수와의 맞대결을 기대하지 않을 정도로 주현은 열정이 없는 선수가 아니었다.

    ‘뛰고 싶어, 심형만과의 맞대결에서 이기고 싶어.’

    그 생각이 주현의 입 바로 앞까지 튀어나왔다.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경기에 꼭 나서고 싶다,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나서지 않는 편이 경기가 더 유리하다고 형이 판단한다면 그 편이 낫겠지.”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조용히 눌러 참았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 다음 경기는 베이포트 FC와 버턴 유나이티드의 대결이지, 박주현과 심형만의 일대일 대결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동민은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전술과 선수들로 경기 준비를 할 테고, 자신이 거기에 포함된다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경기의 본 목적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다며 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왜? 심형만하고 맞부딪쳐서 경기에서 이기는 걸 바라는 건 맞잖아?”

    “…괜히 날 시험하지 마. 경기에 이기는 게 먼저지, 내가 그를 뛰어넘는 게 본 목적이 아니잖아.”

    동민이 다그치듯 다시 한번 말했지만, 주현은 고개를 저었다. 동민 또한 중요한 것은 팀의 승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다는 걸 그는 눈치채고 있었다.

    동민과 주현의 눈싸움은 계속되었고, 결국 거기서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동민이었다.

    “…안 넘어가네.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야.”

    조금 전까지 날카로운 눈으로 주현을 바라보던 동민은 눈에 힘을 풀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과 함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주현은 그것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동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조건 뛰고 싶다고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다음 경기에서 아예 빼려고 했지. 경기가 아니라 그런 점에 집착하면 말아먹을지도 모르니까.”

    동민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동민은 주현이 예상한 그대로,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시험해 본 것이다. 경기를 뛰는 목적이 팀의 승리가 아닌, 심형만과의 맞대결이라는 부차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주현을 빼버릴 생각이었다.

    “나한테까지 그렇게 시험해야겠어? 아무리 내가 국가 대표에서 심형만 선수를 뛰어넘고 싶다고 해도 어떤 게 주고, 어떤 게 부인지는 알아. 내가 그런 것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애는 아니라고.”

    주현은 동민을 보면서 힘 빠진 목소리로 푸념하듯 말했다.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긴 했지만, 그런 점에서만큼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주현이었다.

    “만에 하나라는 거지. 감독이라는 입장상 어쩔 수가 없는 거야. 네가 아니라 다른 선수들이라도 마찬가지였을걸.”

    동민은 투덜대는 주현을 보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그는 주현의 절친한 친구라는 입장이 아니라, 감독이라는 입장에서 그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연기까지 하면서 주현을 시험한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날 너무 얕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섭섭한데.”

    “그렇게 말하면 미안해지잖아.”

    주현은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내심 조금 전 자신이 욕심을 더 부렸더라면 동민에게 큰 실망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등골이 싸늘했다.

    “그런데 그런 뻔한 시험 방법은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지만, 연기를 조금 더 연습해 보는 게 어때? 제임스 같은 단세포 류의 사람이 아니면 속기도 힘들걸. 분위기 잡는 시점부터 말투가 아예 달라져서 너무 티 나던데. 아마 브라운 수석 코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일단 느낌부터가 다르다고.”

    “…그 정도로 티 났어?”

    자신이 한 행동이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알아챈 주현을 보면서 동민은 창피한 듯 얼굴을 붉혔다.

    ‘역시 브라운 키드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건 안 되나.’

    그는 언제나 껄껄거리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는 동료를 떠올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처럼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일은 아직 동민이 따라 하기엔 요원한 일 같았다.

    “엄청. 그렇게 안 어울리는 걸 따라 하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브라운 수석 코치한테 부탁하든가 해보라고.”

    주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식은 코코아를 입속으로 털어 넣고 일어섰다.

    “오냐, 앞으로는 참고하마. 가게?”

    “친한 형한테 놀러왔는데 형 대신 감독이 계시니 슬슬 가봐야지. 시간도 꽤나 늦었고.”

    주현은 그 말을 하면서 문을 나섰다.

    친근한 농담과 장난의 시간은 끝나고, 다시 한 경기마다 승리를 위해 뛰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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