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만의 비밀 (174/270)
  • 두 사람만의 비밀

    “네?”

    샐리의 말에 동민은 어색한 말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따가 저, 저녁이나 같이 먹으러 가시지 않을래요? 그,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뭔가 어색해진 것 같아서 같이 좀 이야기를…….”

    그런 말을 하는 동민의 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괜히 이야기했다가 거절만 당하는 거 아닐까. 익숙하지 않은 짓은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나.’

    브라운 키드가 말했던 ‘신사가 해야 하는 일’은 간단했다. 말을 꺼내는 것이 어색하다 하더라도 먼저 나서서 대화를 시작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은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할 만한 상황을 만드는 일이었다.

    처음에 그의 이야기를 들은 동민은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어색하게 지낼 거냐며 그를 째려보는 브라운 키드의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브라운 키드는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신사의 도리라며 그를 압박해 왔고, 결국 동민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조언의 결과는 동민이 나서서 저녁식사를 제의한다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 편이 다른 이들의 방해 없이 이야기를 나누기 좋을 테고, 시작은 어려울 수 있어도 확실하게 서로의 생각을 말하기 편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제 당시에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지금 이렇게 말했는데 대답이 없거나 거절당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은데…….’

    샐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그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이 입을 연 지 벌써 한참이 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샐리는 그의 말에 답했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그녀의 말에 동민은 십년감수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진심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지 십여 분,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경기 준비가 어떻다, 앨런 휴즈의 상태가 좋아진 것 같다, 등의 이야기만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오고 갈 뿐이었다.

    동민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의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자리에 앉자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이런 식으로 어색한 상태로 있고 싶지 않다, 자신은 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등의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어떤 말로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 돼, 기껏 익숙하지 않은 짓까지 했는데 이대로 계속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순 없어.’

    동민은 이어지지 않는 대화와 평행선을 달리는 것만 같은 상황에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침묵을 이번에야말로 깨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

    동민이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맞춘 듯 나오고 있던 식사가 그의 말을 막았다.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닐까,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웨이터에게서 눈을 돌리고 그는 다시 한번 주먹을 꾹 쥐었다. 마음을 먹었을 때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대로 계속 뒤로 밀려나갈 뿐이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못해 미안해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식사를 하자고 한 이유는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야겠어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날, 그렇게 말했던 걸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섭섭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말은 정말 해선 안 되는 말이었어요.”

    샐리는 갑자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동민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가장 말하고 싶은 건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있고 싶지 않아요.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하고, 평소 같은 대화도 하지 못하고,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은 채로 아무 일도 없이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건 도저히 못 참겠어요. 당신이 볼든 구단주의 조카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냥 지금까지와 같아요. 전처럼 지낼 수는 없을까요?”

    그것이 동민의 본심이었다.

    자신만 빼고 모두들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전처럼 어색하지 않게 지내는 것뿐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듯 쉴 새 없이 이어지던 동민의 말이 끝나고 식탁에는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아까와 같은 침묵이었지만 이번에는 동민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아까의 침묵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답답하게 속에서 뭉쳐 있던 이야기들을 짓누르던 침묵이었다면, 이번의 침묵은 말하고자 하던 것들이 모두 끝나고 그녀의 대답만을 남겨두고 있는 잠깐의 공백이었다.

    설령 다음 상황이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그녀가 그를 무시하고 가버리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도 하지 못하고 답답하게 있던 아까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고 동민은 생각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 채로 담아두는 것과 전부 이야기하고 거절당하는 것, 모두 씁쓸한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갑갑한 느낌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왜 당신이 사과를 하고 있나요, 사과해야 할 건 제 쪽인데. 당신이 그래버리면 제가 할 말을 전부 빼앗긴 것 같잖아요.”

    그녀는 동민의 말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상하다며 복잡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내 사정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던 것, 미안해요. 예전 일 때문에 그런 걸 말하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고 해도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혼자서 따돌려지는 느낌이 얼마나 불쾌한지는 저도 생각했어야 하는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그녀는 조금 전 동민이 한 것처럼, 그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이 말을 더 전에 했어야 하는데… 결국 당신이나 나나 똑같았네요.”

    그러나 그 동민의 눈에 담긴 서운한 감정을 보고 입을 떼지 못했다며 샐리는 고해성사를 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결국 같았다. 상대에 대한 미안함,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함, 그 어색함을 먼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당황스러움. 두 사람을 막고 있던 그 감정들이라는 벽에 구멍이 나고서야 두 사람은 조금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결국 그 일 이후로는 삼촌이랑의 관계를 말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어느 정도 예상했어야 하는 일인데 그때는 너무 바보 같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순진했던 건지, 생각이 없던 거였는지…….”

    샐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째서 레이미 볼든과의 관계에 대해 숨기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녀는 동민이 팀에 오기 전, 과거 팀에 있었던 스태프 중 한 명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와 지냈지만, 나중에 그의 통화를 우연히 듣게 된 샐리는 그가 단순히 그녀의 뒤에 있는 레이미 볼든의 돈만 보고서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일로 그는 레이미 볼든보다도 분노한 앨런 휴즈나 브라운 키드를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에 의해 쫓겨나듯 팀을 나갔지만 그녀는 충격이 꽤나 컸다고 했다.

    그 이후로 샐리는 자신의 성을 제외하고 이름만 지칭하면서 가능하면 레이미 볼든과의 관계를 알리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어려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했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때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어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변명 같지만 그 일이 있고서는 한참 동안 팀을 떠나야 하는지 고민했었어요. 제가 삼촌이 구단주로 있는 팀에 있는 게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이 팀에서 계속 일하면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하고요. 베이포트 FC라는 팀을 좋아하지만 팀의 일원보다는 단순한 한 명의 팬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거라는 생각도 조금씩 들었어요.”

    그 말을 들은 동민이 그것 때문이 아니라며 부정하려던 찰나, 그녀는 고개를 들고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그래도 이 일을, 이 팀을 떠나기는 싫더라고요. 베이포트 FC라는 팀은 제가 어릴 때부터 팬이었던 팀이니까요. 그냥 제가 더 주의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팀에 있다 보니, 베이포트 FC는 어느새 이렇게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팀이 되었고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표정에 조금 전과 같은 씁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한테 고마워요. 이해한다고 말해준 것도, 그리고 제가 팀에 남아서 베이포트 FC가 프리미어리그의 내로라하는 팀들을 상대로도 자신 있게 싸울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 것도요. 샐리 볼든이라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베이포트 FC의 일원이자 팬으로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듯한 그녀의 환한 웃음에 동민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뭘요. 제가 혼자 해낸 일도 아니고 선수들부터 볼든 구단주까지 모두의 공인걸요. 아직 끝난 것도 아닌 시작점에 가깝고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요 며칠 동안 샐리와의 문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경기 준비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돌아온 이상 당장 다음 경기의 준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죠. 아직 시작점이라… 그럼 앞으로 더 기대해도 되겠죠?”

    “당연하죠. 고작 몇 경기 정도로 행복해하기는 너무 이르잖아요. 샐리 당신의 도움도 계속 필요할 테고요.”

    샐리의 말에 동민은 자신 있게 웃으면서 답했다.

    그의 대답에 샐리는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아직 한참 남아 있는 리그 순위 레이스지만, 그 레이스가 끝날 때 베이포트 FC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은 위치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럼 돌아갈까요? 내일도 팀 훈련이 있으니까요. 거기에 아까 전 당신도 다음 경기 준비가 덜되었다고 했으니까 시간도 필요할 테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샐리가 말하자 동민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 또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신이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녀와의 관계가 정상화된 이상 이제 마음 편히 경기 준비에 집중할 수 있다고는 해도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고맙다, 라… 시즌이 끝날 때 다시 한번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네.’

    동민은 그 말은 입 밖으로 흘리지 않은 채로 샐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아, 오늘 있던 일만은 비밀로 해줘요. 아까 내가 한 말을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가 알게 된다면 이번 시즌 내내 놀려먹을게 뻔하니까요. 그 사람 그러는 건 아무리 익숙해져도 힘들다니까요.”

    “어? 저는 괜찮고요?”

    동민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하는 말에 샐리는 장난기를 담아 물어왔다.

    “뭐… 가능한 적당히, 라면요.”

    동민 또한 그렇게 대답하면서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