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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의 고민 (173/270)
  • 동민의 고민

    “…이상이 다음 경기 상대인 모리스톤 타운 AFC에 대한 브리핑입니다. 혹시 뭔가 의견 있으신 분 있나요?”

    선수들은 동민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고 동민은 그것으로 브리핑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다면 오늘 브리핑은 이걸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럼 내일 팀 훈련 때 뵙죠.”

    그 말을 끝으로 동민은 자리를 떴다. 그는 회의실을 나서면서 모리스톤 타운 AFC의 선수 한 명을 떠올렸다.

    ‘후, 모리스톤 타운 AFC라는 팀도 문제지만 그 괴물을 또 상대해야 하다니.’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동민이 챔피언십에서 상대했던 최대의 장해물이자 최고의 천재였다. 그런 상대를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동민은 골머리를 부여잡았다.

    ‘물론 선수 개인의 능력이라면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더 높은 선수들도 많아. 지난 스톡포트 시티의 레오나르도 다 실바와 마이크 반 데부르도 있었고, 그 외에도 꽤 있지만 혼자서 팀을 이끌고 경기 결과를 바꾼다는 측면에서는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같은 선수가 드물어.’

    개인 능력으로 더 뛰어난 선수들은 있지만, 혼자서도 경기를 바꿔 버릴 수 있는 크랙이라는 면에서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상급의 선수였다.

    ‘지난 시즌에는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에게 공이 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는 방법을 택했지만, 이번에도 그게 먹힐지…….’

    그는 걸으면서도 고민에 잠겨 있었다. 지난번처럼 그를 고립시킬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잘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지난 시즌의 2차전에도 상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풀백을 위로 이동시키면서 어떻게든 볼 배급을 노렸었다.

    ‘그때는 그걸 잘 막아내고 역으로 측면을 공략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나올지… 골치 아프네. 명확한 대응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

    동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다음 경기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경기에 대해서는 긴장은 할지언정, 지금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적은 없었다. 다음 경기에 대한 걱정을 넘어 그의 머리를 제대로 돌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따로 있었다.

    동민이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강. 오랜만에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가 웃으며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동민이 감독이 된 이후 두 사람이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가는 일은 매우 줄어들었다. 감독이 되면서 늘어난 동민의 업무량에 대한 브라운 키드의 배려이기도 했고, 동시에 동민 스스로도 그럴 시간이 있다면 일에 더욱 시간을 투자하려 한 결과였다.

    “예? 갑자기요?”

    동민은 급작스러운 제의에 난색을 표했다. 지금 당장 다음 경기에 대한 준비도 머릿속에서 난항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들은 즉시 거절하지 않고 곤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상황은 지금 그의 마음속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다.

    “다음 경기까지는 아직 시간도 있고 오랜만에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요?”

    그런 동민에게 브라운 키드는 재차 이야기해 왔다. 최종적으로 동민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은 이어진 브라운 키드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머리가 굳어 있어서야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나오긴 힘들잖아요? 지금은 일단 잠깐 쉬는 게 어때요?”

    그 말은 들은 동민은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크, 오랜만에 마시니 끝내주네요. 요즘 마시질 못했더니.”

    브라운 키드는 맥주를 들이켜고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동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랑 안 왔어도 자주 드시지 않았어요? 당신이 오랜만에 술을 마신다고 하는 게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그가 아는 브라운 키드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맥주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일이 바쁘다면 다른 시간을 줄여서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아는 동민은 그가 술이 오랜만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저번에 마신 지 무려 2,880분이나 지났으니 오랜만은 맞죠.”

    동민은 그의 말에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고서야 그것이 48시간 즉, 이틀 만에 마신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앨런도 그렇지만 다들 장난을 칠 때는 분위기라도 좀 바꿔가면서 쳐줬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요.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면 순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동민이 입을 비죽거렸지만 브라운 키드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웃으며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켤 뿐이었다.

    “그런 장난에 한 번도 빠짐없이 걸려드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죠. 한 번쯤은 알아챌 수도 있을 텐데 언제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던걸요.”

    그 대답에 동민이 더욱 침울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평소의 흐름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쯤, 브라운 키드는 문득 말을 던졌다.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장난에 당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뜻은 아닌걸요. 당신 혼자서 무언가를 몰랐다고 당신이 무시당한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요.”

    그 말을 들은 동민은 드디어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그렇듯 브라운 키드는 이런 장난스러운 말에서 곧바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걸 동민은 잘 알고 있었다.

    “…앨런에게 들었어요? 굳이 이렇게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괜히 그렇게 오해하지 말아줘요.”

    동민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라운 키드는 병원에서 대충 상황을 눈치챈 앨런 휴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샐리와 그의 사이를 중재하겠다고 나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동민은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참견이라 생각했다. 개인적인 일에서까지 그나 앨런의 참견을 듣고 싶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문제가 있다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사적인 부분에서 브라운 키드 수석코치한테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아.’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둘러 브라운 키드의 참견을 지나치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굳이 필요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동민의 반응에 브라운 키드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동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브라운 키드의 표정에 그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렇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텐데요. 앨런이 제 사적인 일까지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하진 않았잖아요.”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짜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강, 그렇게 억지로 눈 돌리지 말아요. 아무 문제없었으면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상태가 이상할 리 없잖아요. 경기 준비도 평소 같으면 이미 핵심 전술은 생각해 둔 채로 세부 전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인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잖아요. 훈련에서도 보고 지적하는 게 평소보다 느리고요.”

    짜증 섞인 동민의 반응에 브라운 키드는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는 지난 시즌, 앨런 휴즈가 퇴장당한 후 라커 룸에서 선수들을 휘어잡았던 그 모습으로 동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민이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문 이유는 그의 태도보다도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샐리와의 어색한 관계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은 이번 경기를 위한 생각마저 제대로 짜내질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설계도에서의 약간의 어긋남이 건물을 무너뜨릴 수 있듯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그가 다음 경기 때문에 고심하게 된 이유였다.

    말이 막힌 동민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브라운 키드는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리면서 말을 이었다.

    “원래는 이야기 안 하려고 했어요. 내가 굳이 말해줘야 할 일도 아니고 사적인 일에 대한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일에 지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때는 이미 사적인 일이 아니죠. 이런 상황에서 입 다물고 있으면 앨런이나 볼든 구단주한테 거짓말한 게 되니까요.”

    그는 그러고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신경은 쓰든 안 쓰든, 문제가 있든 없든 사실 상관은 없어요. 다만 거기에서 눈을 돌리고선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거랑 다르게, 영향이 있으니까 문제죠. 선수들은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요.”

    그 말은 마치 화살처럼 정확히 동민의 마음속을 꿰뚫었다.

    브라운 키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고 맥주를 목구멍 안으로 흘려 넣었다. 동민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결국 침묵을 고수하던 동민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샐리가 말은 안 했었다는 것에 화가 나거나 한 것보다는…….”

    “…결국 내가 말실수를 해서 그것 때문에 어색해서 그래요.”

    동민은 그렇게 말을 마쳤다. 그와 샐리 간의 어색한 분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섭섭해하던 자기 자신이었다. 그때 자신의 입에서 나왔던 말과 자신의 실수에게서 눈을 돌리려 경기 준비에 집중했지만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은 오히려 그를 헛돌게 한 것이다.

    “뭔가 섭섭하다든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어색해져서 그래요. 그때 샐리 표정을 본 이후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맥주를 흘려 넣었다.

    죄책감이나 섭섭함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그런 감정들에 묶여 있을 만큼 그는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지 못한 것도, 자신이 유치하지만 섭섭하게 느꼈던 것도 다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런 것들을 지나 이성적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행동을 막은 것은 이미 어색해져 버린 둘의 분위기였다.

    “모리스톤 타운 AFC의 경기 영상 자료 때문에 자료실에 갔을 때도 그녀 쪽에서 눈을 피하는 걸 보니 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요. 단순한 친구를 대하는 것과도 좀 다르고…….”

    한숨 섞인 동민의 말에 브라운 키드는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말하고 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일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성장했지만, 그만큼 축구라는 무대를 벗어나면 나이보다도 어려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휴일에도 내가 부르지 않으면 주로 산책이나 집에 틀어박혀서 전술 구상이나 한다고 했나. 스태프나 선수들이랑 잘 지낸다고 해도 나나 박주현, 샐리를 제외하면 그렇게 가깝진 않아 보이고. 정말 워커홀릭이 따로 없구먼.’

    그는 동민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럴 때 신사가 해야 하는 것은 정해진 것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는 브라운 키드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까지 사라져 찾아볼 수 없었던 장난기가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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