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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의 비밀 (172/270)
  • 샐리의 비밀

    “진짜 대단했다니까. 내내 좀 날 선 눈으로 보던 신영수 감독님도 경기 끝나고 나니까 나한테 오셔서 어깨도 두드려 주셨어. 경기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흥분이 안 가시더라.”

    “그래, 알았어. 전화로도 이야기했었잖아. 애도 아니고.”

    주현의 흥분한 목소리에 동민은 질렸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경기가 끝나고 전화로도 한참을 들었던 이야기라 거의 외울 지경이었던 탓이다.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그의 모습에 동민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도 뭔가 잘 안 믿겨져서. 데뷔전에서 이 정도 했으니 다음번에도 뽑아주시겠지? 국가 대표로 뛴다는 게 진짜 막 가슴이 벅차서…….”

    신나서 이야기하는 주현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주현의 기세가 누그러들자 동민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가 활약하는 건 텔레비전 너머로 나도 잘 봤어. 그런데 잘한 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는 스스로도 알고 있지?”

    동민의 말에 주현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동민의 말은 아직까지 억지로 승리의 여운에 잠겨있으려던 주현을 뜨끔하게 만들기 충분했던 탓이다.

    “측면에서 공을 끌고 들어가면서 수비수들의 시선을 끌고 공간을 만든 건 좋았지만, 마지막 크로스나 슈팅을 전부 다른 선수들한테 맡기던 건 꽤나 안일한 선택이었어. 그 전까지 다른 선수들이 무기력한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더욱.”

    동민은 냉정한 목소리로 주현의 움직임을 복기했다. 자신이 직접 찬스를 마무리 짓기보다 그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던 주현의 플레이는 분명 이타적이며 동시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동민은 그것이 최선의 플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은 욕심을 부렸어야 해. 네가 만들 찬스를 다른 동료들이 마무리 지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다들 마음만 급해져서 더 흔들렸을 거야. 그 전까지 제대로 된 공격을 못 보여주던 선수들이 마무리 지은 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어.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네가 책임지고 마무리 지어줬어야 해.”

    동민의 말에 주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좌측면에서 찬스를 만들라는 신영수 감독의 주문과 국가 대표 첫 출전이라는 부담감이 알게 모르게 그에게 적극성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런 점을 동민은 정확히 짚고 있었다.

    “…알겠어. 그 점은 나도 이해했어.”

    주현 또한 스스로 자신의 플레이가 소극적이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교체 투입 전, 그렇게 마음속으로 자기 최면을 걸었지만 태극 마크의 무게는 역시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그 플레이의 근원은 마무리를 실수하는 순간 자신이 책임져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것에서 눈을 돌리려 일부러 더 이미 끝난 경기의 승리에 눈을 돌리고 있던 것이다.

    “국가 대표 팀이라는 무게는 이해하겠지만 굳이 더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클럽에서처럼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해. 네가 국가 대표 팀 유니폼을 입는다고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는 동민을 보자 주현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지는 못했고, 동민이 그것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는 사실에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찝찝함이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네. 똑같지. 하여간 흉볼 거 찾는 능력은 기가 막히다니까. 아무튼 다음번에는 깐깐한 형도 태클 하나 못 걸 정도로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그는 짐짓 동민을 노려보는 체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누가 먼저였는지 모를 웃음이 터졌고, 그제야 주현의 첫 국가 대표 팀 출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마무리 지어졌다.

    “요즘 잘나가고 있는 것 같던데요. 지난 스톡포트 시티전이나 몇몇 경기들은 병원에서도 볼 수 있었어요. 스톡포트 시티전은 정말 좋았는데 운이 안 좋았다고 해야겠죠. 그 정도 되는 팀을 거기까지 밀어붙인 것만 해도 대단했어요.”

    앨런 휴즈의 말에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병문안을 와서 환자한테 위로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A매치 기간도 끝났고, 동민은 잠시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앨런 휴즈의 병문안을 왔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졌으니 아쉽긴 하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부었는데 닿질 않았으니까요.”

    동민의 말에 앨런 휴즈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쏟아 부어서 거기까지 게임을 끌고 간 게 대단한 겁니다. 내가 감독일 때는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었으니까요. 당신이 감독을 맡아줘서 다행이에요.”

    “앨런,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아주세요. 아직 시즌은 길고 긴걸요. 벌써부터 그랬다가는 앞으로의 경기에서의 부담감이 더 커지잖아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초반에 불과한 지금 상황에서 앨런 휴즈의 그런 말은 너무 과분한 칭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남은 시즌은 길었고, 주의해야 할 팀들은 차고 넘쳤다. 그런 상황에서 자만이나 스스로에 대한 만족은 이제껏 잘해왔던 것들을 전부 망치고,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더 이상 감독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앨런 휴즈를 보며 동민은 그제야 그가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앨런, 부탁이니 이런 식으로 놀리지 말아주세요. 이러다가는 긴장감이나 부담감에 쓰러질지도 모른다고요. 어디서부터 장난을 쳤던 건지 헷갈린다니까요.”

    동민의 볼멘소리에 앨런 휴즈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게 감독의 부담감이고 그 점을 감수하고서 감독이 되기로 생각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정도 장난은 칠 수 있게 해줘요.”

    두 사람이 오랜만의 만남으로 그런 대화들을 주고받고 있을 무렵, 갑자기 병실 바깥쪽에서 문이 열렸다.

    “앨런, 저 왔어요. 삼촌이 갑자기 같이 간다고 떼쓰는 바람에 연락도 따로 못 하고 늦어서 미안… 어라? 누가 있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동민도 잘 아는 얼굴들이었다.

    “샐리…하고 구단주 님? 삼촌?”

    “아, 어서 와요. 낮까지 연락이 없기에 안 오는 줄 알고 있었거든요.”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과 단어를 마주하게 된 동민은 잠시 굳었고, 앨런 휴즈는 그런 동민과는 다르게 반가운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런 앨런 휴즈를 보면서 동민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미안해요. 일부러 악의를 가지고 숨기려 한 건 아니었는데…….”

    병실 바깥에서 미안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동민을 향했다. 그녀, 샐리 볼든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 없죠. 다만 처음 듣는 이야기라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샐리, 당신이 구단주님 조카였다니…….”

    동민은 얼떨떨한 느낌을 숨기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지금껏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고용주의 조카였다는 사실은 화를 낼 일은 아니지만, 충분히 놀라운 일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대부분은 이야기해도 크게 신경 안 쓰지만 가끔 가다가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이야기하지 않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려서… 그 이후에는 한 번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까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도 뭔가 이상하고……정말 미안해요.”

    샐리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뭔가 걸리는 것은 있었지.’

    만난 지 어느덧 1년이 넘었지만, 동민은 아직도 그녀의 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을 샐리라 부르라고 말했고,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동민은 그녀의 그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았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신의 성을 이야기하면 다른 이들이 레이미 볼든 구단주와의 관계를 알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게 한 가지를 떠올리자, 그 밖에도 지금까지 가끔 의문스러웠던 것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료 담당인 샐리가 경기 전 라커 룸 근처까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뭔가 이상했다. 그녀가 굳이 거기까지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지만 다들 그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동민 자신은 경기에 온 신경이 쏠려 있어서 그것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 것을 알고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를 가든 어떤 스태프도 그녀에게 따로 이야기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앨런 휴즈 또한, 샐리가 병원의 위치를 모르지만 레이미 볼든 구단주가 알아봐 준 병원이니 상관없다고 말했던 것도 레이미 볼든이 아는 이상 샐리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동민이 U18 팀에 있을 때에도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것은 퍼스트 팀 스태프들만 알고 있던 사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민이 U18 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다닐 만큼 다른 이들과 가깝질 못했던 탓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유가 어찌 됐든 자신에게만 비밀을 지켰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었다. 머리로는 그럴 수 있다고, 굳이 말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지만 그의 감정적인 부분은 그래도 이야기해 줬으면 좋았을 거라며 입을 비죽대고 있었다. 샐리의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야기해 줬어도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동민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도 굳이 할 필요 없는 투덜거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본심은 자신도 모르게 입속에서 스르륵 빠져나와 버렸다. 그 말이 빠져나온 직후, 실언이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은 동민이었지만 이미 말은 입속에서 슬며시 나온 뒤였다.

    “정말, 정말 미안해요.”

    그 말을 들은 샐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했었던들, 동민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일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어색하더라도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며 그녀는 자책했다.

    “아니, 아니에요. 잠깐 말이 헛 나가서 그래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정말이에요.”

    동민은 곧바로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되돌리려 했지만 샐리의 표정은 어두워진 채로 바뀌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입을 원망했지만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결국 그날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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