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민의 감독 데뷔전(1)
오후의 햇살이 내려쬐는 그라운드에 스물두 명의 선수들이 서 있었다. 이윽고 주심의 휘슬 소리가 경기장을 찢듯이 가로지르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플레이오프를 거쳐 갓 승격된 팀이랑 친선전이라,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선수들 기 살리는 정도는 되겠네. 아, 그러고 보니 저쪽 감독이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감독이라고 했나? 나 참, 다른 구단이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팀 내 선수들보다도 어린 감독이라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로체스터 메드웨이의 감독인 존 워커는 이 경기를 가볍게 생각했다. 상대는 챔피언십 1위, 2위도 아닌 치열한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온 팀이다. 시즌이 시작되고 나면 강팀들을 만나야하는 상황에서 그들과의 친선전은 시즌 시작을 앞두고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덤으로 어린 나이에 지휘봉을 잡은 상대 감독에게 프리미어리그가 어떤 곳인지 미리 알려줄 수 있다면 더욱 좋았다.
‘알려준다고 해도 손쉽게 박살 내서 알려주는 거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시즌 시작 전부터 알 수 있다면 대패를 해도 저쪽 팀에겐 이익이 아닌가.’
그는 동민과 베이포트 FC를 완전히 깔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단순히 그의 생각을 넘어 선수들의 선발 명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번 경기를 지난 시즌에 제대로 경기를 나오지 못했던 선수들을 위주로 채우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라인업과 전술로도 베이포트 FC는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동민과 베이포트 FC는 확실하게 상대를 누르고 자신들의 강점을 살려낼 조합을 생각하며 명단을 꾸린 모습이었다.
‘로체스터 메드웨이가 프리미어리그에 계속 생존하게 만든 일등 공신은 상대에게 골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수비 지향인 전술과 몇몇 선수들이 바뀌어도 끈끈한 수비 조직력이야.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상대로는 공격적으로 나오려고 할 가능성도 있을지 몰라.’
동민은 날카로운 눈으로 로체스터 메드웨이 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민의 생각대로 그들은 베이포트 FC를 상대로 하는 친선전에서까지 수비적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는 듯 평소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수비 라인을 올리고 있었다.
‘확실히 우리를 얕보고 있어. 이런 상황이라면 경기 초반부터 내가 바랐던 대로 분위기가 흘러갈지도 모르겠는데.’
동민은 그 모습을 보면서 내심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선수들의 사기를 위한 경기로 대하는 로체스터와 시즌의 시작점으로 생각하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나온 베이포트 FC, 어디가 더 정신적으로 무장이 되어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선수들은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전술이 크게 바뀐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좋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동민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게 뭐야?”
전반전이 시작된 지 25분이 지나고, 존 워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로체스터 메드웨이의 강점은 수비로, 리그 최정상 팀들을 만나도 대량 실점만은 하지 않는 수비력을 자랑했다. 이런 강한 수비는 그들이 잔류를 위한 경쟁을 할 때에 골 득실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고, 가끔은 강팀들을 상대로도 한 골 차의 승리를 거머쥐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전반전 25분이 지난 지금, 그 강한 수비를 자랑하는 로체스터 메드웨이의 수비는 벌써 세 골을 허용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리 프리시즌 친선경기라지만…….”
그는 어안이 벙벙해져 말을 끝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강한 수비를 자랑하는 그들이라도 대량으로 실점하는 경기는 있었고, 이른 시간의 실점은 선수들의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만들어 더 많은 실점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리그 상위권의 강팀들을 상대할 때에나 가끔 보던 상황들이었다.
지금 경기 상대는 이제 막 챔피언십에서 승격한 베이포트 FC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상황을 맞는 것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세 골은 모두 마치 그의 안일했던 점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전반 4분 만에 나온 상대의 선제골은 공격적으로 나오던 로체스터 메드웨이 선수들의 사기를 한 번에 꺾었다. 중앙에서 이어지던 애매한 패스를 상대 미드필더가 잘라내자마자 곧바로 우측면으로 연결한 것이다.
사이드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지는 그 패스를 받은 우측 윙어는 곧바로 수비진과 골키퍼 사이의 공간으로 재빠른 땅볼 크로스를 올렸다. 평소보다 높게 올라가 있던 로체스터 수비진 탓에 골키퍼와 수비 라인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는 그 공간을 정확히 보고 패스했다.
그리고 그 크로스는 상대 공격수의 깔끔한 슈팅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선제골에 로체스터 메드웨이 선수들은 흔들렸지만, 존 워커는 이내 선수들을 추스르고 다시 공격에 나섰다. 상대의 골이 어쩌다 실수에서 나온 행운의 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베이포트 FC는 전반 11분과 24분에 두 번의 역습 골을 더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골이 그저 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장 무서운 건 상대가 우리의 처음부터 약점을 노리고 들어온 것 같다는 점이야. 감독이 어리다고 너무 얕본 건가.’
상대의 세 골은 모두 로체스터 메드웨이의 좌측에서 나온 골로, 베이포트 FC가 역습을 시작하면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평소 저 자리라면 발 빠른 레이놀드가 있어서 저런 공격이 불가능했을 텐데, 지금은 레이놀드가 벤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리 우측을 노린 거야.’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는 일개 친선전을 생각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 경기를 승리로 가져갈 생각으로 나온 것이다.
“어차피 리그에서 만날 상대인 이상 철저하게 하겠다, 이건가? 아니면 친선전이라도 갓 승격한 팀이 프리미어리그 팀을 잡았다는 것에 의의를 둘 생각인가. 어느 쪽이든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그는 이를 갈면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일단 가볍게 후보 선수들의 사기를 올려줄 경기라는 인식을 버렸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 계속 상대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프리미어리그에서 아래쪽에서 세는 것이 빠른 순위에 머무른다고 해도, 고작 갓 승격한 팀에게 이토록 고전하는 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후반전이 되는 즉시 주전 선수들을 내보내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겠군. 아무리 프리시즌이고 친선경기라지만 이대로 당하기만 하고 경기를 끝마칠 순 없어.’
존 워커는 그렇게 이를 갈면서 전반전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행히 나머지 20분 동안 로체스터 메드웨이는 또 다른 골을 허용하지 않았고, 심판이 전반전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 때까지 경기는 3 대 0의 스코어를 그대로 이어나가게 되었다.
“다들 전반전 수고했습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대의 측면과 수비 균열을 잘 파고들었어요.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이런 모습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기력이에요.”
동민은 웃으며 선수들에게 말했다. 그가 보기에 조금 전까지의 베이포트 FC의 경기력은 이대로만 가면 충분히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물론 상대인 로체스터 메드웨이가 친선전인 데다 상대가 우리라서 굉장히 허술하게 준비한 탓도 있겠지만, 경기가 시작하고 바로 지시한 대로 상대의 우측면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빠르게 골을 만들어낸 건 훌륭한 성과야.’
경기 시작 직후, 그는 상대 좌측 풀백인 로든 제이스가 발이 느리다는 것을 알고 역습의 화살을 최대한 우측으로 집중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로든 제이스는 끔찍한 45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45분의 성과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대로 경기가 잘 풀린 것은 상대가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은 탓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상대는 주전선 수들을 내보내지 않았고, 평소 자신들이 주로 하던 방식대로 경기를 이끌어 나가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왔으니까요.”
동민은 선수들이 너무 과도한 자신감에 해이해질까 봐 다시 분위기를 다잡았다.
“후반전에는 전반전과는 다르게 경기를 풀어나갈 테니 잘 들어주세요. 그리고.”
동민은 거기서 말을 끊고 주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박주현, 몸 빠르게 풀어두세요.”
그는 다른 선수들이 듣도록 영어로 주현에게 말했다. 주현의 베이포트 FC에서의 첫 출전을 알리는 말이었다.
“레이놀드, 너도 봤다시피 상대는 빠른 템포의 역습을 진행한다. 그리고 측면에서의 빠른 크로스가 위험하긴 하지만, 반대로 그것 외에는 공격 방식이 단조로워. 측면에서 네가 타이밍 좋게 끊어내기만 한다면 상대의 공격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다.”
존 워커는 교체 투입되는 리암 레이놀드를 붙잡고 말했다. 전반전 동안 베이포트 FC는 많은 역습 찬스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그 역습의 대부분은 로체스터 메드웨이의 좌측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그 형태는 접고 들어오거나 짧은 패스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크로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전반전에는 발이 느린 로든이 있는 좌측을 노려서 크로스로 재미 좀 봤겠지만 후반전은 다를 거다.’
발이 느린 측면 수비를 공략하면서 세 골을 뽑아낸 베이포트 FC의 공격은, 반대로 그 공격만 막아낸다면 이렇다 할 공격 기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워커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든 제이스를 리암 레이놀드로 교체하고 측면에서의 크로스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말했다.
‘생각보다는 꽤 경기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지만 해봐야 거기까지다. 경험도 부족한 저딴 애송이한테 농락당할 순 없지.’
그는 기껏해야 자기 아들보다 세네 살쯤 더 많아 보이던 동민을 생각하면서 이를 갈았다. 고작해야 그 정도로 보이는 경험 없는 상대에게 질 순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전반전에 내가 너무 경기를 안일하게 준비했고 상대가 그걸 잘 찔러 들어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후반전은 좀 다를 거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작게 웃음을 지었다.
전반전 동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동민의 표정이 씁쓸하게 구겨지는 것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고 있으면서도 변화를 꿈꾸는 동민과 경기를 뒤집고 프리미어리그의 터줏대감이라는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존 워커, 두 사람의 생각이 교차되는 후반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