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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휴즈, 그리고 (155/270)
  • 앨런 휴즈, 그리고

    레이미 볼든과의 대화가 끝나고도 동민은 숙소에 들어가지 않은 채 멍하니 템즈강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오갔던 말들이 아직 정리되지 못한 채 떠돌아다녔다.

    -내가 이번 시즌이 끝나고 떠나면, 개인적으로는 당신이 팀을 이끌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본 당신이라면 이르지만 충분히 베이포트 FC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앨런 휴즈의 말은 침착하지만 그를 향한 믿음이 느껴졌다.

    -나는 솔직히 조금 걱정되는데… 당신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고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하지만 앨런이 그걸 바라고 구단에서도 그것을 찬성한다면, 가능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전부 돕겠습니다.

    브라운 키드의 말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지만 그 걱정은 동민이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이른 시기에 팀을 맡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동민에 대한 걱정이었다.

    -휴즈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그가 자신의 후임으로 당신이 자리하길 바라는 이상, 나는 그 생각을 존중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승낙한다면 구단 차원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할 생각이고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급작스러운 일인 만큼 지금 당장 대답을 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레이미 볼든의 말은 다른 이들에 이어 그의 머리에 마지막 못을 때려 박듯, 동민이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떻게…….’

    감독이라는 자리는 그가 언제나 꿈꾸던 자리였다. 영국에 오면서부터 언젠가는 프리미어리그 팀의 감독으로서 사이드라인 바깥쪽에서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스스로를 상상하기도 했다. 분명 그에게는 다시없을 큰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동민의 머릿속에는 그보다 앨런 휴즈의 건강 상태가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동민이 베이포트 FC에 온 이후 팀에 적응하도록 도와준 사람들은 많았지만, 뚜렷하게 어떤 감독이 될 것인지, 어떤 식으로 팀을 이끌어갈지에 대해서 롤 모델이 된 사람은 앨런 휴즈였다. 그에게 앨런 휴즈라는 존재는 단순히 소속 팀의 감독이 아니라 감독을 꿈꾸는 자신에게 길을 보여주는 길잡이와도 같았다.

    옆에서 그를 보면서 자신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선수들을 움직일지, 어떻게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할지 생각하던 그에게 앨런 휴즈의 건강 문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동민의 한숨 섞인 혼잣말은 봄 햇빛 아래에 조용히 흩어져 갔다.

    “들어와요.”

    앨런 휴즈의 목소리가 방 안을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그치자 동민이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와요. 어제는 생각 좀 했어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하는 휴즈 감독을 보면서 동민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감독님…….”

    “내 건강이니 그런 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할 것은 내가 떠난 이후 팀을 맡을지, 맡지 않을지입니다. 내 건강에 대한 것은 내가 신경 쓸 문제니 당신은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동민이 하려던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먼저 말을 끊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동민은 하려던 말을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는 입을 열었다.

    “…감독님, 일단 제가 아직 프로 라이선스를 따지 못했어요. 프로 라이선스가 없는 이상, 만약 승격된다면 저는 감독의 자격이 없습니다. 프리미어리그는 프로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들만 감독을 맡을 수 있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당신이 A 라이선스를 딴 것이 몇 개월 전이죠. 당신이 프로 라이선스를 곧바로 합격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기간은 약 1년 정도. 그리고 이번 시즌이 끝나기 직전 내가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고 당신을 감독으로 내세운다면 가능합니다.”

    동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예상했다는 듯 반박했다.

    “챔피언십 팀에서 계약하고 승격한 이상, 프리미어리그에서 억지로 감독을 교체하라고 압박을 넣진 못하죠. 당신이 곧바로 프로 라이선스에 합격하기만 한다면, 남은 1년 정도는 유예기간으로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어요.”

    휴즈 감독은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빠르게 답변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라면 그의 말대로 동민이 프로 라이선스를 딸 때까지의 기간 동안 시간을 얻어낼 수 있어 보였다.

    “그,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하기엔…….”

    “FA는 끔찍하게 고지식하고 권위적이긴 하지만 결국 리그에서의 흥행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는 귀를 기울일 겁니다. 당신의 불안 요소라 할 수 있는 젊은 나이도 오히려 그 점에서는 좋은 무기죠. 아시아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감독이면서 동시에 챔피언십에서 올라온 최연소 프리미어리그 감독. 이 정도면 규칙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이상 충분히 그쪽에서도 관심이 생길걸요.”

    앨런 휴즈는 그 문제에 관해서는 레이미 볼든과도 모두 이야기가 끝났다며 간단히 말했다. 그 말에 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이미 승격이 되더라도 동민을 감독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까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동민에게 휴즈 감독은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전술 코치로 전술 브리핑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도, 내가 징계 때문에 경기 지시를 부탁했을 때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당신이 생각할 건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고 싶은지 아닌지, 라고요?”

    “이제 잘 알고 있네요. 그거죠. 키드 수석 코치도 당신을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었으니 당신이 신경 쓸 건 당신이 이 기회를 잡을 것이냐, 말 것이냐뿐이에요.”

    말을 대신 끝낸 동민을 보면서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동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않을게요. 대신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뭘요?”

    동민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혹시 감독님과 볼든 구단주는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감독님 후임으로 제가 감독이 되는 것을 생각해 두셨던 건가요? 왜 저한테 이렇게…….”

    동민은 그들의 기대와 믿음에 목이 멘 듯 말끝을 흐렸다.

    그저 앨런 휴즈의 건강 문제로 당장 다음 시즌의 새로운 감독을 찾아야 한다면 외부에서 다른 감독을 찾는 편이 낫다. 그것도 승격하게 된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번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나는 앨런 휴즈는 자신의 후임으로 동민을 원했고, 레이미 볼든 또한 그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승낙했다. 또한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브라운 키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토록 빠르게 계획을 세우고, 모두들 준비를 한 채로 그에게 묻는 모습을 보면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요? 나도, 볼든 구단주도, 그리고 키드 수석 코치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당신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가능성을 보았다면 그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닐까요?”

    앨런 휴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준비를 했었냐고 묻는다면, 맞아요. 나도 몇 년 안쪽으로 은퇴를 생각할 나이대이니까요. 다만 그건 당신이 충분한 성장을 하고 난 뒤, 여러 경험을 쌓은 뒤에 이러면 좋지 않을까, 했던 거죠.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몇 가지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났고, 결국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거라 생각한 거죠.”

    생각보다 빠르게 팀에 적응해 선수들과 다른 코치들의 신임을 쌓아가는 동민의 모습은 좋은 의미에서의 예상 밖이었고, 반대로 갑작스러운 그의 건강 문제는 나쁜 의미에서의 예상외였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그와 레이미 볼든의 선택은 이르지만 동민에게 지휘봉을 맡겨보자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번 시즌의 마지막까지는 맡아서 승격을 이끌고 싶다는 것은 앨런 휴즈의 마지막 고집이며 책임감의 결과이기도 했다. 다음 시즌은 동민에게 맡기겠지만 베이포트 FC라는 팀을 맡은 이후 처음으로 생긴 승격의 기회까지는 자신이 책임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잘할 수 있을까요? 챔피언십보다 훨씬 크고 강한 팀들이 즐비한 곳에서.”

    동민의 목소리는 낮고 작았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감의 부족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앨런 휴즈가 말하는 신뢰와 믿음, 그것에 관한 질문이었다.

    앨런 휴즈는 그런 그를 보면서 짧고 간단하게, 그러나 최대한의 신뢰를 담아 대답했다.

    “물론.”

    그리고 그 말은 동민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단하게 굳혀준 말이 되었다.

    5월 말의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비치는 날, 웸블리 스타디움은 수많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오늘은 챔피언십 1위인 모리스톤 타운 AFC, 2위인 콜링험 와프에 이은 세 번째 승격 팀을 결정하는 플레이오프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승격 팀의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다투는 베이포트 FC와 손우드 FC의 팬들은 모두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이 상대를 꺾고 승격하길 간절히 바랐다.

    오늘 경기는 단순히 승격을 건 플레이오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두 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노스 윌드 더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승격을 두고 절대 져선 안 되는 상대와 마주한 베이포트 FC의 라커 룸은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앞에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는 프리미어리그로의 승격이 걸려 있고, 동시에 우리 팀 최대의 라이벌인 손우드 FC가 있다.”

    앨런 휴즈 감독은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닌, 강한 어투로 선수들에게 말을 시작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다. 우리는 이번 시즌 두 번의 노스 윌드 더비를 모두 승리로 장식했고, 이번에도 또한 그래야 한다. 이 한 번의 경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라. 앞선 두 번의 경기에서 이겼다고 해도 여기서 진다면 아무 의미도 없어.”

    그의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강렬한 눈빛이 비치는 듯했고,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 선수들의 심장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이번 시즌 두 번 다 그랬듯, 나가서 저들을 상대로 이기고 와라.”

    그 한마디에 베이포트 FC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사람씩 라커 룸을 나섰다.

    “아, 그리고.”

    그는 잠시 잊었다는 듯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있어 베이포트 FC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 말은 그들에게 절대 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90분간의 혈투가 끝나고-

    앨런 휴즈의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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