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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하늘의 날벼락 (154/270)
  • 마른하늘의 날벼락

    베이포트 FC의 구단주인 레이미 볼든은 요즘 기분이 좋았다. 지난 시즌을 비롯해서 자신이 인수한 후 그동안 챔피언십의 중하위권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베이포트 FC가 이번 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의 그 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던 베이포트 FC는 어느새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짓고, 3, 4위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금껏 구단을 인수한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니까. 이대로만 가면 승격도 가능해.’

    그에게 더욱 고무적인 사실은 이 성적 향상이 특별히 어떤 선수들의 영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즌의 시작 전, 여름 이적시장에서 새로운 영입도 방출도 없이 기존 선수들을 가지고 이어간 상황에서 이렇게 큰 성과를 낸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은 기존 선수들과 코치진들이지만… 역시 달라진 이유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군.’

    레이미 볼든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팀이 지난 시즌과 외적으로 달라진 것은 퍼스트 팀 코치진에 강동민이 합류했다는 것뿐이니까.”

    몇 년 전, 일 때문에 한국에 갔을 때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젊은 전술 분석관은 이번 시즌 퍼스트 팀에 비디오 분석관으로 합류하면서부터 팀을 뒤바꾸기 시작했다.

    그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앨런 휴즈 감독이 직접 비디오 분석관에서 전술 코치로의 재계약을 요청하는가 하면, 징계로 인해 휴즈 감독이 벤치에 앉지 못했을 때에는 대신 선수들의 전술 지시를 맡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이번 시즌 퍼스트 팀에 처음 올라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그에게 재능을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만약 이번에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하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앨런 휴즈 감독 밑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지도 몰라. 어쩌면 몇 년 후 휴즈 감독이 물러난다면 우리 팀을 맡아줄 감독이 될 수도 있겠지.’

    당장 이번 시즌의 좋은 성적보다도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를 더욱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던 그는 다시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그러고 보니 휴즈 감독이 잠시 상담할 일이 있다고 했었지. 곧 약속했던 시간인데…….’

    그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문이 열리고 베이포트 FC의 감독인 앨런 휴즈가 들어왔다.

    “아, 딱 시간 맞춰서 왔네요. 저번 휘트비 알비온과의 경기도 수고가 많았습니다.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단한 경기력이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앨런 휴즈를 보자마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베이포트 FC의 구단주이자 팬이기도 한 그는 매번 경기가 끝날 때마다 휴즈 감독이나 선수들, 다른 코치들에게 기회가 생기면 이런 말을 하곤 했지만 오늘 앨런 휴즈의 반응은 평소와는 달리 짧고 어딘가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레이미 볼든은 어색하지만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하고는 빠르게 이야기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급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아달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이면서까지요.”

    평소 단순한 구단주와 감독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가까운 그들의 사이였기에 둘 사이의 대화는 자주 있었지만, 앨런 휴즈가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적은 없었다. 앨런 휴즈가 베이포트 FC 감독을 맡고 처음 있는 상황에 레이미 볼든도 곧바로 본론으로 이야기를 몰고 갔다.

    “혹시 다음 시즌 계획에 관한 건가요? 꽤 이르기는 하지만 승격이 된다면 분명 영입이나 방출에 관해서 미리 계획을 짜두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의 말에 앨런 휴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하, 다음 시즌 계획이라는 말이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조금 성격이 다른 이야기 같은데요.”

    그렇게 운을 뗀 앨런 휴즈의 말이 이어질수록 웃음을 띠고 있던 레이미 볼든의 표정에서는 미소가 사라졌고, 이내 하얗게 질렸다.

    “…그게, 그게… 정말인가요?”

    앨런 휴즈의 말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레이미 볼든의 입에서는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발 방금 그가 들은 이야기가 잘못 들은 거라는 대답을 기대한 말이었지만, 앨런 휴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가라앉았고, 잠시 뒤 이어진 그들의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레이미 볼든과 앨런 휴즈, 두 사람의 대화가 있고 몇 주가 지났다. 시간은 어느새 4월의 중순도 넘어가 챔피언십의 남은 경기도 이제 세 경기에 불과했다.

    베이포트 FC는 4위 자리를 확정 지은 동시에, 3위와도 승점 2점 차이로 바짝 뒤쫓으며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역전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하아, 휴일인가.”

    동민은 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은커녕,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침대에 누워 시즌 막바지에 찾아온 휴일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휘트비 알비온전이 끝나고 앨런 휴즈 감독의 건강에 대해서 염려했지만, 휴즈 감독이 스스로 피로로 인한 컨디션 다운이라며 말한 이후로는 동민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휴즈 감독은 그 이후로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휴즈 감독에 대한 동민의 걱정은 시즌의 마무리와 승격에 대한 생각들에 밀려 차츰 사라져 갔다.

    “앞으로 남은 경기는 세 경기, 그리고 나면 1, 2위와 함께 승격할 수 있는 권리를 건 플레이오프. 그게 모두 잘 끝나면 우리도 프리미어리그에 속하는 건가…….”

    그는 멍하니 누워서 혼잣말을 했다. 영국에 오면서부터 언젠가는 저곳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꿈의 무대의 한 구석에 자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멈추지 않았다.

    ‘챔피언십도 물론 작은 무대는 아니고, 내가 프로의 세계에서 어디가 더 크네 작네 하면서 잴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지만 확실히 프리미어리그에 속할 수 있다는 건 느낌이 달라.’

    전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일이었지만, 어느새 그 꿈과 같은 일이 현실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앨런 휴즈 감독이나 다른 코치들과 함께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 베이포트 FC 선수들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다가 동민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뭐, 그러려면 남은 세 경기에서 어떻게든 승점 차를 뒤집어서 플레이오프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를 잡고 플레이오프도 이겨야겠지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휴일이지만 숙소에서 내내 뒹굴거리며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점심때에 레이미 볼든 구단주와의 식사 약속이 있던 것이다.

    ‘늦지 않게 나가야지. 더 침대에 누워 있다간 깜빡 잠들어서 약속에 늦을지도 몰라.’

    동민이 그의 제안에 응해 베이포트 FC로 온 이후 레이미 볼든은 가끔씩 식사에 초대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영국으로 오라고 했던 만큼 계속해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생각으로, 시즌 말미라는 바쁜 시기에도 그는 동민을 신경 써주고 있었다.

    “승격의 기회가 눈앞에 있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가장 기뻐하는 사람 중 한 명도 볼든 구단주일 테고. 오늘 만나면 또 잔뜩 신난 표정을 볼 수 있겠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숙소를 나설 준비를 했다.

    “아, 왔군요. 어서 와요.”

    “안녕하세… 요?”

    약속 장소에 도착한 동민의 눈에 띈 것은 자리에 앉아 있는 레이미 볼든만이 아니었다. 그의 좌측과 정면에는 동민이 오늘 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감독님? 수석 코치님 까지 무슨 일로…….”

    “아, 일이 좀 있어서요. 궁금하겠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일단 앉아요.”

    동민은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물어보려 했지만 그의 질문은 레이미 볼든의 말에 잘려 나갔다. 결국 동민은 영문도 모르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강,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다음 시즌, 감독으로서 베이포트 FC를 이끌어주겠어요?”

    레이미 볼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냐며 눈썹을 위로 올리려던 동민은 그 말을 하는 레이미 볼든이나 다른 두 사람의 분위기가 농담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잠깐의 침묵 후 동민은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요? 제가 왜…….”

    레이미 볼든 구단주를 보면서 멍하니 말하는 동민의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레이미 볼든의 말은 조금 전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앨런 휴즈 감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나기로 했거든요. 플레이오프까지는 맡아주기로 했지만 그 이후로는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게 무슨……!”

    동민은 이번에야말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시즌 들어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데다가 특별한 영입 없이도 팀을 승격의 기회까지 끌고 온 앨런 휴즈가 팀을 떠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구단에서 그를 내보내려는 것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가 팀을 떠나려 하는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재계약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동민의 생각이었다.

    “구단주 님,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휴즈 감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떠난다니요!”

    “그게…….”

    “…그 이유는 내가 설명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요.”

    충격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레이미 볼든을 바라보는 동민을 막은 말은 옆에 앉은 당사자인 앨런 휴즈였다. 동민이 옆에 앉아 있는 휴즈조차 잊을 정도로 흥분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진정하고 있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좀 있어서 꽤 오랫동안 쉬어야 할 것 같거든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쭉 쉬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그는 내일은 잠시 쉰다는 듯한 가벼운 분위기로 말했다. 그 때문에 잠시 이해하지 못하던 동민은 그게 무슨 뜻인지 한 박자 늦게 깨닫고 말았다.

    “건강상의 문제라뇨?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지난번 휘트비 알비온과의 경기 때쯤 당신이 나보고 너무 지친 거 아니냐고 했었죠? 그 이후 병원에 갔었는데 간 쪽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간… 이요?”

    동민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조금 전까지 올라왔던 분노조차 잃어버린 채로 멍하니 되물었다. 앨런 휴즈는 그런 동민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심각한 것은 아닌데 간암 증상이 있다는 이야길 들어서요.”

    그 말은 오늘 동민이 들었던 말 중 가장 강력하게 그의 머리를 후려갈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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