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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만남 (150/270)
  • 계획에 없던 만남

    “강? 여기서 뭐 해요?”

    잡지를 보다가 결정한 대로 채비를 하고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내려 걷던 동민은,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베이포트 FC의 자료 담당인 샐리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샐리?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제가 먼저 물어봤는걸요. 전 그냥 산책하는 중이었어요. 평소에도 휴일에는 자주 나오는데 요즘 내내 날씨가 안 좋아서 집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햇빛이 비치는 날이니까요. 당신은 여기서 뭐 해요?”

    그녀의 옷차림은 그녀의 말을 뒷받침하듯 계절에 비해서 가벼워 보였다. 그녀의 긴 금발과 어울리는 밝은 색의 코트와 검은색의 바지는 한국에 비해 그리 춥지 않은 영국이라 해도, 너무 얇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미안해요. 따지고 보면 저도 그냥 산책이에요. 요즘 바빠서 집하고 경기장만 왕복하다보니 기분 전환이 좀 필요해서요. 당신도 말했다시피 오늘은 날씨도 괜찮으니까요.”

    가벼운 동민의 대답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음… 그 말은 지금부터 따로 어딘가 돌아다닐 계획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인가요?”

    “뭐, 있다면 있기는 한데… 그냥 적당히 근처를 걷다가 적당히 쉬고, 적당히 점심이나 때울 생각이었거든요. 다시 생각해 보니 없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단순히 걷기나 하자고 나온 거니.”

    동민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잡지를 보면서 오랜만에 한국이 그리워지는 탓에 무턱대고 나오기는 했지만 확실한 계획은 없었다. 그가 바란 것은 숙소에서 나오는 것이었지 정확한 계획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그의 대답에 곤란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걸 계획이 없는 거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아하하… 그런가요.”

    “뭐 어쨌든 그럼 잘 됐네요. 같이 돌아다니지 않을래요?”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꽃이 피는 듯한 미소로 바꾸며 말했다.

    “오, 이거 예뻐 보이지 않아요? 어라, 이것도 괜찮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해서 템즈 강변에는 여러 임시 가게들이 서 있었고, 샐리는 그 가게들의 악세서리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담.’

    동민은 그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별다른 계획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곧바로 눈을 빛내며 함께 돌아다니자고 말했던 것이다.

    ‘혼자 걷는 것보다야 둘이 걷는 게 즐겁다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혼자서 강변을 걷다가 사우스워크 대성당에 들어가서 앉거나, 적당히 점심을 사먹으려던 그의 계획은 샐리를 만나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뭐 ,이것도 싫은 건 아니지만.’

    괜히 혼자서 걷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게 쓸데없는 생각을 덜 하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는 생각했다. 혼자 돌아다니다가 한국 관광객이라도 만났을 때 한국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와 함께하는 것은 기분 전환에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는 밝은 성격에 대화하기 쉬운 점도 있어서 함께 돌아다니면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강, 이거 어때요? 꽤 예쁘지 않아요?”

    동민은 샐리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깃털과 구슬 등으로 장식한 모빌처럼 생긴 무언가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뭐지? 꼬마 애들 침대에 걸어주는 모빌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동민은 뭔지 모를 물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죠?”

    “드림 캐처래요. 가지고 있으면 좋은 꿈을 꾸게 해준대요. 요즘 가끔 악몽을 꾸곤 하는데 하나 사볼까 해서요.”

    “아…….”

    그녀의 말에 동민은 그제야 어디서 그 물건을 보았는지 깨달았다. 동민이 성남 페가수스에서 나와, 한창 영국 유학을 준비할 때 그의 어머니가 보던 드라마에 나오던 물건이었다. 어머니는 그 드라마를 보고 예쁘다며 사오셔서 침대 근처에 매달아 두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는 곳에 정신 사납게 이게 뭐냐고 치우라고 하셨지. 아버지의 그 말로 두 분의 부부싸움이 벌어진 덕분에 그날 저녁은 강제로 예정에 없던 외식으로 변해 버렸고.’

    동민은 드림캐처를 보면서 한국에 있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으신 두 분이었지만, 주로 아버지의 무심한 한마디로 부부싸움이 시작되곤 했다. 그리 심각해지거나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 부부싸움의 대부분은 애꿎은 동민의 저녁식사가 사라지는 결과로 끝났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도 그립네. 이따 들어가면 새벽에 부모님한테 전화라도 해볼까.’

    동민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가 기억 속에서 다시 현실로 눈을 돌린 것은 그를 부르는 샐리의 말을 들은 후였다.

    “어, 아. 미안해요. 무슨 말이었죠?”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동민은 다른 사람을 옆에 두고서 혼자서 생각에 빠지는 것은 역시 실례였기에 솔직하게 사과하면서 그녀를 바라봤다.

    “이걸 보자마자 갑자기 말없이 가만히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물어봤어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어머니가 이걸 사오셨을 때의 생각이 좀 나서요.”

    “당신 집에 이게 있었어요?”

    동민의 말에 샐리는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네, 제가 영국 오기 전예요. 그때 한창 어머니가 즐겨 보시던 TV 드라마에서 드림캐처가 나왔었거든요. 그때 어머니가 사서 침실에 달아두셨어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서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온 탓이었다.

    “그럼 여기서 당신 집에 있는 거랑 제일 닮은 게 어떤 거예요?”

    “예?”

    아직도 부모님 침실에 걸려있을 드림캐처를 생각하던 그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에 있는 거랑 제일 닮은 거 하나만 추천해 주세요. 아니면 당신이 보기에 괜찮다 싶은 걸로요. 이왕 사는 거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 보고 싶어서요.”

    “아, 음… 이거 같은데요. 집에 있던 것도 보라색이었거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 말에 동민은 기억 속 부모님 침실에 있던 드림캐처를 떠올리고 비슷한 보라색의 드림캐처를 골랐다. 그녀는 그의 대답에 웃으며 그것을 들고 계산했다.

    “그걸로 사도 괜찮아요? 괜히 당신이 살 물건을 제가 끼어들어서 정한 느낌인데…….”

    드림캐처를 사고 다른 곳을 향하면서 동민은 신이 난 듯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보기에도 거기 있는 것들 중에 이게 제일 예뻤으니까요. 오히려 같이 골라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밤부터는 악몽은 안 꾸겠네요.”

    “아뇨, 뭘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동민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키드 수석 코치가 신나게 술을 들이 부어버려서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더라고요. 정신 차리니까 숙소이긴 했는데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요.”

    “아하하, 브라운 수석 코치는 항상 그런가 보네요.”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자, 두 사람은 적당한 가게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면서 잡다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로 대부분이 휴즈 감독이나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 혹은 다른 스태프들 등 팀원들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동민은 그녀와 잡담을 나누면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도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이제 말해주면 안될까요?”

    이야기가 멈추고 짧은 침묵이 찾아오자 샐리는 동민을 보면서 물었다.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동민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의 반응에 샐리는 웃으며 말했다.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 뭔가 되게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걸요. 그래서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걸어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고요. 누군가 바로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요.”

    그녀의 말에 동민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입을 열기로 결정했다.

    “…우리 팀엔 이래저래 눈치 빠른 사람들이 많네요. 휴즈 감독도 그렇고, 키드 코치도 의외로 눈치가 빠른 데다 샐리 당신까지. 아니면 제가 전부 얼굴에 티가 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강, 당신은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하면 금방 티가 나는걸요. 그러니까 이야기해 보세요. 저라도 좋다면 들어드릴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밥 먹고도 계속 아까처럼 집중 못 할 것 같은걸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동민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인터뷰를 했던 잡지가 온 것을 보다가 아는 얼굴을 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한국에 대한 향수가 생겨났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막상 이야기하고 보니 별일도 아닌데. 뭔가 부끄럽네…….’

    이야기를 털어놓을수록 그의 귓가는 붉게 물들어갔다. 그러나 샐리는 그런 동민의 이야기에도 웃거나 흘려듣는 대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아무튼 뭐, 이러네요. 영국에 온 지 벌써 2년 반도 더 지나면서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래봐야 내일부터 다시 일하면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또 사라지겠죠.”

    그는 이야기를 할수록,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 근래에 늘어난 경기 일정이나 휴즈 감독의 대리 같은 일거리들로 잔뜩 긴장해 있던 것이 오랜만의 휴일이라고 조금 풀려서 그런가. 이렇게 누구한테 털어놓지 못하고 일하느라 바빴으니, 뭐.’

    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그였지만, 개인적으로 크게 친분이 있다고 할 만한 사람은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 정도 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조차도 몇몇 이야기는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내를 잃은 사람한테 가족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할 사람과 주제 정도는 구분해야지.’

    그 탓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영국에 온 뒤 처음이었다. 동시에,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수록 그는 부끄러움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오늘도 괜히 그놈의 잡지 보다가 이렇게 기분 이상해지지 않았으면 털어놓지 않았을 텐데. 내가 미쳤지, 정말.’

    그는 이야기를 전부 끝내고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후회했다. 차라리 적당히 이야기를 덮었다면 더 나았을 거라며 그는 창피함과 곤란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이 거북한 침묵이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샐리의 눈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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