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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것 (149/270)
  • 포기할 수 없는 것

    그 순간, 양 팀 팬들의 엇갈린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골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미리 환호를 내지르는 사람들과, 절규를 내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겹쳐지고…….

    경기는 끝났다.

    동민은 다시 한번 전광판의 숫자를 바라본 뒤, 다른 스태프들과 악수를 하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벤치를 나섰다.

    ‘후우.’

    그라운드 근처를 벗어나고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의 결과는 1 대 0, 베이포트 FC가 전반전에 잡은 리드를 마지막까지 지킨 승리였다. 마지막 파트리스 쿠야테의 로빙슈팅은 골키퍼의 키를 넘기고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관객들의 환호와 절규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 수 없는 경기였어. 하마터면 경기 끝나기 직전 버저비터 동점골이 나올 뻔했네. 후반전은 정말로 운이 따라줘서 무실점으로 버텨낸 거지, 만약 쿠야테의 마지막 슈팅이나 후반에 나왔던 찬스들에서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운이 따라줬다면…….’

    후반전에 있었던 아찔했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동민은 몸을 떨었다. 저번 올드햄 FC와의 경기에서 그들에게 등을 돌렸던 행운의 여신이 오늘은 미소를 지어준 덕에 거둔 승리였다.

    ‘전반전에 짰던 전술에서 급하게 변경하면서 측면을 이용한 역습 전술로 바꾸긴 했지만 하필 그게 상대의 노림수에 제대로 걸려드는 수가 될 줄은 몰랐지. 상대 중원은 세 명인데 반에, 이안 페트로프와 잭 하워드의 조합은 중원에서 완전히 밀려 버렸으니까. 앞으론 선수들 체력관리를 좀 더 신경 써야겠어. 휴즈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만.’

    해리 맥스웰과 벤 로이터의 체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후반전 내내 상대에게 밀린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혼자만이 짧은 반성을 마쳤다.

    “고생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빠르게 자리를 뜰 필요는 없지 않았나요? 승리의 여운이라도 즐기고 나가는 편이 나을 텐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휴즈 감독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행운이 따른 승리였죠. 전반전은 분명 우리의 우위였지만 후반전에는 반대로 전술에서부터 탈탈 털렸고요. 체력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이 칭찬받을 경기지, 제가 승리의 여운을 즐길 경기는 아닌걸요.”

    그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번 경기에서 원한 것은 강팀다운 능력을 보여준 승리였지만, 후반전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 그는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휴즈 감독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스스로에게 엄격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욕심이 많다고 할지. 감독 대신 선수들에게 경기 중 지시를 맡은 것도,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든 승리를 따낸 것도 그에겐 대단한 경험일 텐데 이미 그 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질 않아. 자기가 바라는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운 거겠지.’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욕심이라 해야 할지 모를 동민의 그런 점은 휴즈 감독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자 걱정하는 점이기도 했다.

    ‘항상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위를 바라는 점은 좋은 점이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무너져 버린다면 그만큼 허무한 것도 없을 텐데.’

    그가 보기에 동민의 그런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더 위를 바라보고 달리는 향상심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언젠가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곳이 생긴다면 그의 마음속을 태우는 불이 될 수도 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만일 동민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겼을 때 그런 자신의 향상심이 반대로 목을 조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보기에 동민은 일개 코치라고는 해도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젊고, 미래가 기대되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동민이 만약 그런 점 때문에 자기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면 그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동민을 바라보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쨌든 이겼잖아요. 제가 당신에게 부탁한 두 번의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끈 거니까요. 운이 따라줘도 이길 수 없는 경우도 많고, 이길 수 있는 경기력을 만든 것은 당신이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겁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동민의 향상심이 긍정적인 쪽으로만 영향을 끼치길 바라는 마음을 담되, 그를 배려해서 일부러 가볍게 말한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동민은 그의 말 속에 들은 의미를 알아챈 것인지,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다음 경기부터는 감독님이 계시니 걱정은 없겠네요. 지난 두 경기 동안 정말 심장이 터져서 죽는 줄 알았으니까요. 경기에 대한 부담감에 잠도 설칠 정도였다니까요.”

    “그랬나요? 관중석에서 보기엔 별로 그래보이지도 않던데요. 그리고 그 부담감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또 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죠?”

    두 사람은 그렇게 위로와 걱정, 대답을 숨긴 농담을 서로 주고받으며 한참을 더 이야기하고 있었다.

    숙소에 돌아온 동민은 가만히 누우면서 조금 전 휴즈 감독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다, 라… 뭉뚱그려 말하긴 했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겠지.’

    동민은 휴즈 감독이 어떤 뜻으로 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경기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감독이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야. 일일이 다 생각하다 보면 내가 지칠 수도 있겠지.’

    휴즈 감독이 걱정하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 경기력이라도 이겼다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상황에 만족할 테고, 그러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곳을 찾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을 바라야지. 그것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는 안 돼. 계속해서 나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찾아내면서 고쳐가야 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흠… 어떻게 할까…….’

    로더럼 타운과의 경기가 끝나고 오랜만에 생긴 휴일, 동민은 아침부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랜만에 쉬는데 여유롭게 집에서 그냥 휴식이나 할까, 아니면 산책이라도 나가볼까. 요즘 경기장과 숙소 정도만 계속 오락가락했던 느낌이니 나들이라도 하면서 기분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그동안 박싱데이부터 몰린 경기들의 준비와 휴즈 감독의 징계로 정신없이 일하던 그에게 오랜만의 휴일이 찾아온 것이다. 점심때까지 늦잠이라도 잤다면 아무 미련 없이 푹 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했겠지만, 아침부터 눈이 떠진 그는 휴일을 어떻게 보낼지 선택해야 했다.

    ‘어떻게 한다…….’

    동민은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미리 사두었던 빵을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동민의 고민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초인종 소리였다.

    “아침부터 누가 올 사람이 있나? 한가한 브라운 수석 코치래도 이런 시간부터 연락도 없이 찾아오진 않을 텐데.”

    의문을 가지며 문을 열자

    “배달이요?”

    “네. 동민 강 씨 맞으시죠?”

    “아, 네. 맞는데요.”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꾸러미를 보면서 동민은 자신이 무언가를 주문한 적이 있는지 기억 속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최근 무언가 배달시킨 기억은 없었다. 게다가 포장지에 쓰여 있는 보낸 주소지는 한국이었다.

    ‘대체 뭐지? 부모님이 뭘 보내주기라도 하셨나? 그런 것치고는 아예 모르는 주소인데.’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포장을 뜯었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권의 잡지였다. 그것을 보고서야 동민은 자신에게 배달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때 인터뷰했던 잡지구나. 그러고 보니 완성됐다고 하나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참.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아이고, 정신이야. 요즘 갈수록 기억력이 영 안 좋다니까.”

    자신의 기억력을 탓하며 동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잡지를 펼쳐 자신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인터뷰를 할 때부터 예상했던 것처럼, 잡지에 그의 인터뷰는 실려 있었지만 분량은 두 페이지가 채 되지 않았다. 그가 했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이 잘리거나 축약되어 있는 등, 누가 봐도 지나가는 정도의 짧은 이야기처럼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확실히 끼워 팔기 같은데. 치킨에 붙어 있는 치킨 무 같은 느낌으로. 그럼… 치킨은 누구려나.’

    그는 자신의 인터뷰 페이지를 슥슥 넘겼고,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치킨이 이 사람이었구먼.”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심형만의 웃으며 앉아 있는 사진이 크게 나와 있었다.

    “더 큰 꿈을 찾아 간 블루 데빌즈의 에이스, 잉글리쉬 프리미어리그에서 날개를 펼치다. 라… 내 인터뷰 기사 제목도 그랬지만 이런 제목이 참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든단 말이야. 정작 이번 시즌은 부상 여파 때문에 아직 한 경기도 나오지 못한 걸로 아는데.”

    동민은 기사 제목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버턴 유나이티드로의 이적 후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그였지만, 이번 시즌에는 개막 직전에 생긴 무릎 부상 탓에 부상이 나아진 후에도 아직 벤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반가운 얼굴이네.’

    동민은 성남 페가수스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수원 블루 데빌즈와의 경기에서의 그를 떠올렸다. 정신없이 지나가던 그때의 기억은 사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에게는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잠시 동안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동민은 잡지를 접고 침대 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저거 보니 오늘은 최철민 씨한테 전화라도 해봐야겠네. 바빠서 한동안 연락도 못 했으니까.”

    동민은 자신이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준 심형만의 에이전트, 최철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한국에 있을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부모님의 얼굴, 병렬의 얼굴, 경태와 종환을 비롯한 많은 친한 사람들의 얼굴과 수연이나 명진, 진운과 같은 성남 페가수스 시절의 사람들까지.

    잠시 그 향수에 젖어 있던 동민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툭 내뱉었다.

    “…오늘은 그냥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야겠어.”

    집에 가만히 있다가는 오랜만에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동민은 마음을 접으려는 듯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구름도 별로 없으니 템즈강까지 가서 근처를 걷든가, 근처 마켓이라도 돌아다녀 봐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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