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기의 행방은 (148/270)
  • 경기의 행방은

    ‘곤란해…….’

    동민은 상대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경기장 안의 분위기를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해리 맥스웰과 벤 로이터를 동시에 교체하면서 걱정했던 플레이메이커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인 이안 페트로프에게 중원에서의 패스 센스나 킥력, 넓은 시야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게다가 지금 그의 파트너는 본래 자리가 풀백인 잭 하워드인 만큼 그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본래 자리가 아닌 곳에서 뛰는 선수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만큼, 본인의 실력을 전부 발휘하기 힘들다. 이 당연한 말처럼 잭 하워드는 측면에서만큼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다.

    그것은 전반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해리 맥스웰이 본인의 재능과 센스, 벤 로이터는 경험으로 어느 정도 뒷받침하면서 그가 넓게 움직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안 페트로프는 아래쪽에서 상대의 공을 끊는 역할에 특화되어 있는 선수다. 이에 반해 잭 하워드가 중앙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넓은 활동량을 바탕으로 공격과 수비를 모두 지원해 주는 것뿐. 두 선수 중 누구도 패스를 뿌리는 역할은 할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동민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수비만이 장점인 선수와 공, 수 모두 이끌어 나가기보다는 다른 선수를 지원하는 역할만 급하게 익힌 선수.

    이 두 명의 중원 조합은 동민으로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사용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해리 맥스웰과 벤 로이터의 체력 문제로 이 조합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동민은 자신의 미스를 실감했다.

    ‘부족하더라도 플랜B로 옮겨갈 수 있게끔 잭 도일을 벤치에 앉혔어야 하나. 해리 맥스웰과 벤 로이터 두 사람 다 그라운드에서 나가게 될 거라곤 생각을 못 했으니.’

    그리고 그런 그의 미스 덕에 베이포트 FC는 공격 상황만 되면 어처구니없는 패스나 실수로 다시 공격권을 내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대 또한 이안 페트로프와 잭 하워드의 중원 조합이 가진 약점을 알아본 듯 그들이 공을 가진 상황이 되면 세 명이라는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강하게 압박하면서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 결과, 베이포트 FC는 고립된 공격진, 수비에만 특화된 중앙 미드필더 조합, 수비하기 급급한 수비 라인이 보여주듯 완전히 로더럼 타운에게 분위기를 내주고 만 것이다. 그나마 종종 측면을 통한 역습이 나오곤 했지만, 그들의 활로가 그곳이라는 것을 깨달은 상대 수비로 인해 경기 분위기를 다시 바꿔줄 정도의 찬스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전반전처럼 공격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수비에 전념하면서 측면에서의 개인 돌파를 이용한 역습을 노리는 수밖에.’

    동민이 생각한 임기응변은 그것뿐이었다. 같은 선수비 후 역습 전술이라 해도 해리 맥스웰의 패스나, 벤 로이터의 순간적인 침투, 공격 가담 능력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도 다행인 건 상대의 주 공격 루트인 좌측 윙의 파트리스 쿠야테를 이용한 공격을 이안 페트로프와 잭 하워드가 어찌어찌 잘 막아내고 있다는 거지.’

    본래 포지션이 우측 풀백인 잭 하워드인 만큼 우측 넓은 공간에서의 일대일 수비는 익숙했고, 그것은 파트리스 쿠야테의 수비 시에는 측면 수비수가 한 명 더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 덕에 베이포트 FC는 공격권의 대부분을 상대에게 넘겨준 상황에서도 골을 허용하지 않고 버틸 수 있던 것이다.

    “그래, 언제나 공격적으로 나설 수만은 없지. 지금은 이미 앞서고 있는 한 골 차의 리드를 지키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동민은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긍정적인 부분을 보려 애썼다.

    ‘좋아, 하프타임에 있던 교체의 성과는 확실해.’

    데릭 존킨스는 후반전에 들어서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팀을 보면서 다시 희망의 불씨를 살려 나가고 있었다. 공격수를 빼면서라도 중원에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그의 판단은 옳았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경기 조율을 맡고 있던 중앙 미드필더가 둘씩이나 빠진 상대의 변화는 그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베이포트 FC가 정확히 무슨 생각으로 해리 맥스웰과 벤 로이터 두 명을 전부 교체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만 되면 후반전에 동점골뿐만 아니라 기세를 타고 역전까지 가능할지 몰라.’

    그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스포츠든 마찬가지겠지만 축구라는 스포츠는 특히 분위기를 타고, 타지 못하고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선수들의 실력, 전술의 깊이에서 앞선다고 해도 상대의 정신을 꺾을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비기거나, 심지어 역습을 당해 패배하는 일조차 있다. 경기를 뛰는 선수들도 사람인 만큼 경기장의 분위기나 흐름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반전에는 상대가 가둬놓고 패는 양상이라 어떻게든 그 흐름을 끊으려 해도 끊지 못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반대로 넘어갔으니까.”

    혼잣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중원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든든하게 버티면서 파트리스 쿠야테가 있는 좌측이나, 우측으로 패스를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무리까지는 결정짓지 못하더라도, 전반과 달리 골 문 앞까지 이동하는 공격진들의 움직임은 데릭과 로더럼 타운의 팬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한 골, 단 한 골만 터지면 흐름을 타고 역전까지 가능해. 베이포트 FC라는 대어를 잡을 수 있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냉정을 되찾았다.

    ‘흥분하지 말자. 아까 실점 상황도 그 한 번을 노리려다가 생각지 못한 기습에 당한 꼴이었으니까. 상대는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으니 기다리다 보면 분명히 우리에게 기회가 올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선수들을 믿고 기다리다 보면 동점골의 순간을 찾아올 거라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좋아, 아까보다 훨씬 낫잖아!’

    파트리스 쿠야테는 자신의 슈팅이 골문 옆쪽으로 빗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전반전에 공조차 잡기 힘들었던 상황과 달리, 지금은 상대 수비가 달라붙어 방해를 하면서 마지막 슈팅이나 패스 타이밍이 엇나가고는 있지만 거기까지 공격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래야 경기를 하는 느낌이지.’

    그는 마음속 깊이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같은 경기를 뛰는 선수가 아니라 공만 보고 뛰어다니는 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전반전과 다른 지금의 상황이 그의 자신감을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은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감독님이 날 이해한다고 했으니까.’

    지난 시즌 겨우겨우 워크퍼밋을 발급받아 로더럼 타운에 온 지 1년 반이 된 지금, 그는 로더럼 타운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짊어진 상태로 이를 악물고 뛰는 그에게 한 경기, 한 경기는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라 전쟁과도 같았다. 그 전쟁에서 무력하게 유린당하는 자신의 기분을 그는 이해한다고 말해준 것이다.

    매 경기마다 목숨이라도 걸린 듯, 있는 힘을 다해서 뛰는 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동료도 있었다. 말로는 그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 뒤에선 이상한 눈으로 보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감독인 데릭 존킨스는 그런 자신을 믿는다며 믿음을 보여주었고, 그는 자신이 감독의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의 신뢰에 부응해야 하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다시 상대 수비 사이의 공간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인 2 대 1 패스로 센터백과 풀백 사이의 애매한 공간으로 빠져들어 가 슈팅을 날리는 것은 그의 장기 중 하나였고, 이번에도 그것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중앙 공격수인 톰 다우닝에게 공을 주고 센터백과 풀백 사이의 공간으로 파고들자, 톰 다우닝은 익숙한 듯 그에게 패스를 돌려주었고 그는 짧은 순간 골키퍼와 1대1에 가까운 찬스를 잡았다.

    ‘이건 들어갔다!’

    공을 차는 순간 그는 확신했다. 오른발에 느껴진 감각은 확실하게 공이 확실하게 파 포스트 쪽으로 감길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었고, 그 느낌은 슛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예상처럼 공은 아름답게 휘어져 들어가면서 골문 구석을 향했고, 골키퍼의 손가락을 스쳐 지나갔다. 거기까지 눈에 들어온 그가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려 할 때, 공은 골대를 맞고 골라인 바깥으로 흘러갔다.

    베이포트 FC의 골키퍼, 토마스 스톤스의 선방이었다.

    기쁨의 함성이 될 뻔한 분노와 아쉬움이 섞인 고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내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대로만 가면 다음번에는 확실히 넣을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또다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형, 오빠로 전화할 수 있고 감독님의 신뢰에 답할 수 있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데릭 존킨스와 파트리스 쿠야테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간이 흘러도 골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어느새 남은 시간은 점점 더 줄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유롭게 경기를 보고 있던 데릭 존킨스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만 갔다. 어떻게든 베이포트 FC의 수비를 뚫고 골문 앞까지 가긴 했지만 꼭 그 앞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인지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파트리스 쿠야테의 회심의 슈팅은 토마스 스톤스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혔고, 쿠야테의 크로스에서 이어진 톰 다우닝의 헤딩 슈팅은 골문 옆쪽으로 빗나갔다. 마치 올드햄 FC와의 경기에서 베이포트 FC에게 붙어 있던 골문 앞의 악령이 옮겨오기라도 한 듯, 그들은 계속 골문을 열어젖히기 직전에 실패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흐르고 대기 심은 3분의 추가시간을 알려왔다. 그것을 본 파트리스 쿠야테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동점골을 넣어 이 경기의 밸런스를 다시 돌려놓고 싶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닿기라도 하듯 후반 92분, 기회가 찾아왔다. 잭 하워드가 상대의 패스를 걷어낸다는 것이 잘못 맞아 그에게 흐른 것이다. 전, 후반 내내 익숙치 않은 포지션에서도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던 그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거다!’

    쿠야테는 그 공을 잡고 골 문 앞으로 질주했다. 그와 골대 사이에는 골키퍼인 토마스 스톤스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토마스 스톤스가 앞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공을 살짝 찍어 찼고, 공은 골키퍼의 키를 넘어 골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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