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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험이 끝나고 (145/270)
  • 첫 번째 시험이 끝나고

    “지난 경기에선 정말 수고 많았어요. 경기 직후에도 말했었지만, 당신은 정말로 내 생각보다도 잘해줬으니까요. 관객석에서 보고 있던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요.”

    스컨소프 AFC와의 경기가 끝난 다음 날, 휴즈 감독은 동민을 자신의 방으로 따로 불러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날 경기가 끝난 뒤 경기장에 내려와 몇 번이나 그를 칭찬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듯 그는 부드럽게 재차 말했다.

    “아뇨, 처음에 감독님이 짠 계획 자체가 잘 먹혀 들어갔으니까요. 후반전에는 거기서 조금 더 변화를 줬을 뿐이고요. 골자를 만들어낸 건 감독님이잖아요.”

    동민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휴즈 감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전술을 구상한 것도 당신의 덕이 컸던 데다 후반전에 들어서 측면을 공략하는 것은 나라도 생각 못 했을 겁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도 일단 아니라고 부정하는 문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좋은 것은 확실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좋은 일에는 축하와 칭찬이, 나쁜 일에는 반성이 뒤따르는 게 당연한 거니까요. 그러니까 나한테까지 그런 태도를 취하진 말아주세요.”

    그의 말에 동민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동민의 태도를 보고서야 그는 기분이 풀린 듯 농담을 섞어 말을 이었다.

    “그러면 다음 경기도 잘 부탁합니다. 1년 뒤의 이야기가 되니까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요.”

    다음 경기인 로더럼 타운과의 경기가 며칠 뒤인 1월 2일에 잡혀 있는 것을 보고, 1년 뒤라고 농담하는 휴즈 감독을 바라보며 동민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네, 어제처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경기장 안에서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경기 후의 근육을 푸는 훈련이 끝난 뒤, 해리 맥스웰은 어색한 표정으로 제임스 더커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챙기다 만 짐이 남아 있어 그가 느끼는 어색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일단 나는 모르는데.”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까지 제임스 더커를 대하는 일은 껄끄러웠던 것이다.

    스컨소프 AFC와의 경기 전에 있었던 말다툼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전과 달리 어색하게 변해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는 제임스 더커의 패스와 해리 맥스웰의 슈팅이 어우러져 경기의 선제골이 되었지만, 경기가 끝난 뒤의 그들은 다시 어색한 사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 상황은 오늘까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는 여전히 제임스 더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제임스 더커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 저번에 내가 한 말. 더럽게 머저리 같은 짓이었어. 네 말이 맞았어. 내 멍청한 편견과 쓸모없는 화풀이였지. 내가 주전에서 밀린 걸 강동민 그 사람한테 괜히 뒤집어씌운 거였어. 거기에 휘말린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해리 맥스웰은 그런 제임스 더커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그가 아는 제임스 더커는 인성이 나쁜 사람이라 할 정도는 아니어도, 고집이 센 편이었기에 그가 이렇게 완벽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 그래. 네가 그렇게 깨달았다면 다행이네. 응, 다행이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란 그의 입에서는 그런 어색한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침묵이 흐르고, 이제야 다시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익숙해질 때쯤 그는 물었다.

    “제임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먼저 사과한 거야?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너는 그런 거하고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잖아. 게다가 나는 그 당사자도 아닌데 말이지.”

    해리 맥스웰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 그의 말에 제임스 더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 경기에서 느꼈어. 내가 그 사람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고. 그냥 운 좋게 휴즈 감독이나 구단주 눈에 띈, 별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해리 맥스웰은 지난 경기의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놀랐으니까.’

    전반전이 시작한 뒤 점점 더 경기의 분위기가 자신들 쪽으로 넘어오는 것은 느꼈지만 4 대 1이라는 대승을 거둘 줄은 몰랐다. 게다가 만약 골키퍼의 선방들이 아니었다면 2-3골은 더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경기의 결과를 만든 건 단순히 선수들이 잘 뛰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우리도 알고 있으니까. 경기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내내 전술적으로 우리가 앞서 있었고.’

    그는 냉정하게 그렇게 평가했다.

    상대의 우측 수비를 끈질기게 공략했던 전반전, 그리고 중앙으로 밀집된 상대의 양 측면을 노렸던 후반전.

    모두 동민이 노리던 대로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가장 대단했던 건 상대의 전술변 화를 그대로 예측했던 거지.’

    하프타임에 있던, 상대가 중앙에 비중을 두면서 측면을 내줄 거라는 그의 말에 마음속으로 크게 동의한 선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있은 직후, 상대는 4백에서 3백으로 전환하면서 중원에 무게중심을 두었고 이는 좌우측면에서 선수들이 날 뛸 공간을 만들어냈다. 경기를 뛰면서도 신기하게 생각했었지만, 경기가 끝난 후 다시 되짚어보자 그 경기에서 동민이 이야기하고 생각한 전술은 모두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까 더 대단하네, 지난 경기는. 고집 세기로 유명한 너한테 자기가 틀렸다는 이야기까지 하게 만들고.”

    반쯤 놀림이 담긴 그의 말에도 제임스 더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게.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만들었네.”

    그렇게 스컨소프 AFC를 상대로 한 대승은 그들을 포함한 많은 선수들에게 동민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며칠 전에 경험을 했는데도 여전히 경기 시작 직전이 되면 꽤나 떨린단 말이야.’

    동민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그의 표정은 지난번과는 사뭇 달랐다. 지난번에는 겨우 찾아온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필사적인 마음과 프로의 세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선수들에게 지시를 한다는 생각에 얼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 생각해 보는 한편, 다른 코치들과의 대화도 훨씬 더 여유가 생긴 모습이었다.

    “오늘은 내가 별 이야기 안 해줘도 되겠네요. 아니면 지난 경기 하프타임 때 그러다간 휴즈 감독보다 먼저 대머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아직까지 효과적인 건가요?”

    지난번과는 다른 모습에 브라운 키드는 가볍게 말했다. 다른 스태프들도 그 말에 저번 경기가 생각난 듯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발전하는 모습이 있어야죠. 한국의 사자성어 중에는 날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 말을 좀 따라보려고요.”

    동민의 반응도 고민하고 굳어져 있던 그때보다 훨씬 더 가볍고 유연해 보였다. 그런 그의 대답에 브라운 키드 코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얼어 있던 저번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모습이네요.”

    그리고 이내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경기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돼요. 방심했을 때야말로 무너지기 쉬운 때니까. 거기에 오늘 상대인 로더럼 타운이 지난번에 경기했던 스컨소프 AFC보다 약팀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면 더더욱이요.”

    방금 전까지 농담을 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에 동민은 허리를 쭉 펴며 대답했다.

    “그건 잘 알고 있죠. 우리가 모리스톤 타운 AFC를 상대로 비겼을 때처럼, 그리고 손우드 FC를 상대로 3 대 0이라는 대승을 거뒀을 때처럼, 로더럼 타운도 충분히 우릴 이길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수석 코치 님이 말해줬잖아요.”

    거기서 동민은 잠시 말을 끊더니 브라운 키드 코치의 스코틀랜드 억양을 따라하듯 말했다.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한 머저리가 되는 것보다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낫다’ 라고. 저는 어디까지나 신경질적인 사람이니까요. 물론 태평해 보이는 척하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지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와서 받아치는 동민의 대답에 그는 이번에야말로 가슴속 깊이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지난 경기의 가장 큰 수확은 휴즈 감독과 닉 베손이 없는 상황에서의 승리라는 점도 비슷한 수준의 팀을 상대로 한 대승이라는 점도 아닌, 강동민에게 확실한 영향을 준 경험이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한 번의 경험을 거쳤다고 잠깐 사이에 놀랄 만큼 달라진 그의 반응에 그는 흡족하며 동시에 놀랐다.

    ‘이렇게까지 변할 줄이야……. 참 대단하단 말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젊은 코치가 오늘의 경기로 얼마나 또 달라질 수 있을지 상상했다.

    ‘베이포트 FC, 현재 리그 5위를 순항 중인 팀이며 동시에 이번 시즌 가장 주목받는 팀 중 하나. 오늘 경기까지 감독인 앨런 휴즈가 없다지만 앨런 휴즈 감독과 주전 좌측 풀백인 닉 베손 없이도 지난 상대인 스컨소프 AFC는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었지.’

    로더럼 타운의 감독인 데릭 존킨스는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다시금 입속에서 곱씹으며 긴장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현재 16위를 달리고 있는 자신들과는 열 계단이 넘도록 차이가 나는 팀을 상대한다는 사실이 그의 어깨를 바싹 굳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이번 시즌 성적이 좋다, 라는 점 때문에 걱정되는 게 아니야. 그 이상으로 이번 시즌의 베이포트 FC는 어딘가 달라.’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십에 내려온 공룡이라는 평가를 받는 모라스톤 타운 AFC를 상대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무승부를 얻어간 것과, 손우드 FC와의 노스 윌드 더비에서는 3 대 0이라는 대승을 거뒀던 것을 떠올리며 그는 눈을 찌푸렸다.

    ‘지금 이게 지난 시즌 하위권에 머물렀던 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행보야. 그렇다고 누군가 대단한 선수를 영입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상승폭이라니. 믿기지가 않네.’

    이번 시즌의 베이포트 FC는 충분히 강팀 중 하나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강팀을 상대로 자신들의 축구가 먹혀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겁이 나고 위축될 수는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이 둥근 이상 우리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거겠지.’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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