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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든 능력을 펼쳐라(4) (144/270)
  • 네 모든 능력을 펼쳐라(4)

    스컨소프 AFC의 감독, 호세 마르티네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전반전의 실책을 만회하려 던진 승부수가 자신을 옭아맬 올가미가 되어 돌아온 상황에 그는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이렇게 할 거라고 알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 이상해. 물론 베이포트 FC의 감독인 앨런 휴즈는 나도 알고 있고, 리그 내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었다. 그때마다 묘하게 이쪽의 수를 뭔가 미리 눈치챈 낌새는 있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카운터를 가져온 적은 없었어.’

    그는 최대한 당황을 참고 냉정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베이포트 FC와 앨런 휴즈에 대해서 알고있는 그였지만, 지금 그라운드에 펼쳐진 것처럼 완전히 압도하는 플레이를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에 들어서 이상하게 강해졌다곤 하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 늙은이가 올 시즌 이상하게 잘나간다 했는데 오늘은 반대로 그가 없이 이런 대응이라니.’

    그는 전반전부터 눈치챘어야 한다고 자책했다. 감독이 없는 상대가 전반전부터 자신들의 예상을 뒤엎고 무섭게 측면으로 몰아쳤던 것을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지금 베이포트 FC의 전술을 맡고 있는 사람이 수석 코치든 아니든, 확실한 것은 그의 생각을 완벽히 꿰뚫어 보았다는 점이다.

    ‘저 녀석은 지금 나한테 선택을 하라고 하고 있어. 측면, 중앙, 중원, 셋 중 어딜 포기할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쾌감에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패배한다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지금 욕심을 내면 승격까지 바랄 수 있는 순위권이긴 하지만 지금 이 경기가 승격을 결정짓는 경기는 아니었다.

    베이포트 FC에게 진다는 것도 크게 상관없었다. 스컨소프 AFC와 베이포트 FC는 라이벌 관계도 아니며, 그는 그들을 상대로 앙금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내 머리 위에서 뛰어논다는 식으로 이렇게 나오면 오기가 생길 수밖에. 어떻게든 한 방 먹이고 말겠어.”

    그는 이를 갈면서도 냉정하게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확실히 상대는 지쳐 있어. 이쯤 되니까 아까 하프타임에 강동민 코치가 했던 말이 확실히 이해가 가.’

    베이포트 FC의 좌측 윙, 야야 둠베흐는 달려드는 상대 우측 윙백을 제치면서 생각했다.

    빠른 발과 날카로운 크로스를 주무기로 삼는 그는 베이포트 FC로 이적한 이후 좌측면 미드필더 자리에서는 부동의 주전이었다. 앨런 휴즈 감독이 원하는 측면을 통한 빠른 역습을 구성하는 데에 그의 빠른 발과 크로스는 최고의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인만큼 선발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을 듣고 의심과 불만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체력 관리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난 경기에서 자신은 단 1분도 뛰지 않고 체력을 온존했기 때문이다.

    그의 불만은 전반전을 보면서 반쯤 사라졌다. 자신도 제임스 더커도 아닌, 벤 로이터의 좌측 윙은 그들과는 다른 형태로 상대 수비를 무너뜨렸고, 팀은 압도적일 정도의 경기력으로 상대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그의 의문을 없앤 것은 전반전이 끝나고, 그의 교체 투입을 지시한 동민이었다.

    “둠베흐 선수의 장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빠른 발과 정확한 크로스가 일품인 것도요. 그렇지만 전반전에는 측면에서의 크로스보다는 측면과 중앙을 아우르는 공격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동민의 말이었다. 야야 둠베흐 또한 전반전의 경기를 직접 본 만큼 그 말에 이의를 가질 수는 없었다. 언제나 경기를 뛰고 싶어 하는 선수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결국 경기 결과가 좋다면 자신이 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그는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몸을 풀어주세요. 후반전에는 당신이 상대 측면을 초토화시켜야 하니까요.”

    조금 전까지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는 경기를 직접 보고 있던 그에게 동민의 말은 불씨에 기름과 장작을 한꺼번에 들이붓는 것과 같았다. 경기에 뛰고 싶다는 그의 열정은 한순간에 타올랐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그는 스컨소프 AFC의 우측면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전반전 동안 시달려 왔던 스컨소프 AFC의 수비 라인은 그의 폭발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후반전 시작 후, 몇 번째인지 모를 야야 둠베흐의 크로스가 또다시 골문 앞을 향했다. 이미 많은 크로스가 골문 앞을 향했음에도 지금껏 골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스컨소프 AFC가 아예 측면에서 그의 크로스를 막는 것보다 중앙에서 끊어내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스컨소프 AFC의 중앙 수비수들은 필사적인 모습으로 크로스들을 걷어냈고, 골키퍼는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들을 보이며 겨우 골문 밖으로 공을 튕겨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껏 에딘 페트로비치의 머리를 노리던 높은 크로스가 아닌 낮고 빠른 크로스가 부메랑처럼 골문과 수비진 사이의 공간을 향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격에 스컨소프 AFC이 수비진들은 한순간 반응하는 타이밍이 늦어졌다. 실제 시간으로 따지자면 0.5초가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의 망설임이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왔다!’

    베이포트 FC의 간판 공격수 로날드 조던은 자신 쪽으로 낮게 날아드는 크로스를 보면서 환호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조금 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동료인 에딘 페트로프의 머리를 노리는 높은 크로스가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 짜증이 났다. 밀집된 상대 수비 때문이라고 해도 계속 막히는 크로스를 시도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야야 둠베흐가 크로스를 올리려 할 때 손을 들면서 파 포스트 쪽으로 빠져나갔다.

    오랫동안 베이포트 FC의 공격을 이끌어왔던 그들이기에 먼 곳에서의 신호 한 번으로 그 의미는 통했고, 야야 둠베흐는 수비진과 골키퍼 사이의 작은 공간을 노리고 낮고 빠른 크로스를 쏘아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 브리큰돈 스타디움은 홈 팬들인 세일러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야야 둠베흐의 낮은 크로스를 로날드 조던이 넘어지듯 미끄러지며 골문 안쪽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2 대 0, 어떻게든 추가골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 조금의 희망을 걸던 스컨소프 AFC와 원정 팬들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후반 21분의 골이었다.

    -두 번째 골의 주인공은 로날드 조던! 미끄러지면서도 확실하게 골을 집어넣습니다!

    경기장에는 로날드 조던의 골을 알리는 장내 방송과 홈 팬들의 열정 어린 응원가가 어우러져 들끓고 있었다.

    “젠장.”

    호세 마르티네스는 속삭이듯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상대가 강요한 측면과 중앙 수비, 중원 중 어디를 포기하겠냐는 선택지에서 그가 고른 것은 측면이었다. 박싱데이를 지나고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측면에 집중한다고 한들, 지난 경기부터 휴식을 취한 야야 둠베흐의 속도와 폭발력을 막기는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대신 미드필더들까지 적극적으로 수비에 참여하도록 지시해서 박스 안쪽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가고 역습을 노리려 했지만, 그 결과는 로날드 조던의 추가골이었다.

    ‘공격에 집중하는 상대와 수비 후 역습에 집중하는 우리, 그 집중력 싸움에서 밀린 거야. 정확히 말하면 그 전에 내 전술부터 완전히 말려들었지. 내가 생각한 것을 저쪽은 미리 준비를 해왔고, 내가 변하면 상대도 변했지. 동화 속에서 토끼와 달리기를 하는 거북이가 된 기분이군.’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노림수와 상대의 계략의 맞대결은 결국 그의 패배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결과를 낳았다.

    한숨을 쉴 듯 숨을 들이마신 그였지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고개를 숙이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내쉬려던 한숨을 꾹 참았다.

    ‘아니, 아직 끝나진 않았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 보는 수밖에. 감독도, 주전 풀백도 없는 팀한테 질 수는 있어. 그렇지만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기를 포기할 순 없지.’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라운드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경기가 끝난 뒤, 동민은 선수들, 스태프들 할 것 없이 다 함께 모여서 승리를 축하하고 숙소로 향했다.

    ‘이겼구나… 5년 만에 내가 직접 지시를 내린 경기가 승리로 끝났어.’

    베이포트 FC와 스컨소프 AFC의 경기는 홈팀인 베이포트 FC의 4 대 1 대승으로 끝났다.

    전반 24분 해리 맥스웰의 선제골, 후반 21분, 28분 로날드 조던의 연속골, 그리고 36분 에딘 페트로비치의 추가골까지 4골이라는 골 폭풍을 일으킨 베이포트 FC는 후반 41분 한 골을 허용했지만 승기는 뒤집히지 않았다.

    휴즈 감독 대신 지시를 한 경기가 대승으로 끝난 것도 그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기쁜 일이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은 그것에 대한 기쁨이 아니었다.

    ‘드디어…….’

    동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드디어 확실하게 알 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들리고 그의 눈앞에는 몇 년 만에 보는 문장이 들어왔다.

    [포인트를 2 획득하셨습니다.]

    자신이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기 전까지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문장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동민의 생각은 정지했다. 덕분에 그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가 와서 기쁨의 표현으로 등을 후려칠 때까지는 멍하니 벤치 앞에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숙소에 거의 다 도착한 지금에서야 정리가 된 상태였다.

    ‘포인트를 획득하는 방법은 단순하게 팀의 감독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거였어.’

    동민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수첩과 펜을 꺼내고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떠올리며 정리해 나갔다.

    ‘포인트를 얻는 조건을 지금까진 감독으로서 경기에 승리했을 때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승리한 뒤 2포인트를 얻었지. 이 말인즉슨,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조건은 틀렸다는 이야기지.’

    그는 수첩에 적었던 조건에 가로줄을 그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 성남 페가수스 때에도 실질적으로 경기의 준비도, 전술도 내가 짰지만 그때는 포인트를 얻지 못했어. 왜일까? 뭐가 다르길래?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따지면…….’

    그는 공책에 빠르게 몇 개의 문장들을 적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수첩에 적혔던 문장들은 모두 까맣게 지워지고 단 한 문장만이 남았다.

    ‘내가 남을 통하지 않고 직접 경기를 지시하고, 그 경기를 승리했을 때. 그때가 내가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인 거지.’

    그는 오답으로 남았던 오랜 수수께끼를 다시 한 번 푼 듯한 뿌듯함을 느끼며 말했다.

    “이 말은… 다음 경기까지 내가 지시를 하니까 다음 경기에서도 이긴다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겠네.”

    그의 입가에 차 있는 미소는 처음으로 포인트의 비밀을 알아냈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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