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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모인 이유 (139/270)
  • 세 사람이 모인 이유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 감독님? 여긴 무슨 일로…….”

    동민은 빠르게 준비를 하고 나왔지만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의 예상처럼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앨런 휴즈 감독을 보면서 동민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키드 수석 코치가 술 마실 때마다 몇 번을 봤지만, 지금까지 휴즈 감독은 못 본 거 같은데.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있는 거지? 아까 키드 수석 코치가 전화했을 때의 분위기도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동민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면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키드 수석 코치도 휴즈 감독도 어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 앞에 놓인 맥주잔에는 아직 손댄 흔적조차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에 눌린 동민이 주문을 하는 둥 마는 둥 시키고 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불려서 나오긴 했지만 휴즈 감독님까지 계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의 조심스러운 말에 휴즈 감독은 물을,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운지 동민은 도무지 예상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휴즈 감독이었다.

    “…아까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이 후반전 전술 변화와 교체를 그에게 건의했다고요. 맞나요?”

    “그건 맞습니다만…….”

    그의 말에 동민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라운 키드 코치를 거치기는 했지만 후반전의 역습 전술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 패배한 것은 맞았기에,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 점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조심스러운 동민의 태도를 보면서 휴즈 감독은 말을 이었다.

    “그 일, 다음 경기에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네?”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말에 동민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당신이 생각한 전술도,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의 선수들 통제도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했을 때보다 나았을지도 모르죠.”

    거기까지 말한 휴즈 감독은 잠시 말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다음 경기들에 나설 수 없게 된다면… 당신이 교체와 선수들에 대한 지시를 대신 해주겠습니까?”

    동민은 아예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는 놀라서 되묻기라도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것이다.

    “키드 수석 코치가 있는데 그런 일을 제가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동민의 입에서 쉰 목소리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오늘 경기에서도 전술을 생각해 낸 것은 동민이었지만 그것을 직접 지시하고 판단하며, 선수들을 움직인 것은 브라운 키드였다. 휴즈 감독이 없는 상황에서 그를 대신하는 것이 수석 코치인 그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휴즈 감독이 아닌 브라운 키드였다.

    “나는 사실 그런 쪽으로 별로 자신이 없거든요.”

    “네?”

    그는 다시 한번 맥주를 넘기고는 가벼운 투로 말했다. 동민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라커 룸에서 선수들을 휘어잡고, 그들에게 놀라울 정도의 동기부여를 시키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가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농담이라고 해도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보지 말아요. 농담을 하자는 게 아니니까. 경기에서 선수들에게 재빠르게 지시하고 하는 건 서툴러요.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작전을 지시하고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지 전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오늘은 다른 요인들 덕에 나은 편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패배였고요. 그리고 그 것이 내가 감독님을 떠나지 않고 계속 함께 일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이유… 요?”

    혼란스러워하는 동민의 태도에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감독님은 다수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자면 뭔가 바로 앞에 두고 악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렇죠?”

    “…그의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내가 선수들의 심리를 비교적 잘 알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을 설득하거나 심리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어려운지도 모르죠. 그에 반해서 브라운은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그런 일이 쉽고요. 말하자면 그가 내가 어려워하는 점을, 내가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서로 해주고 있다는 거죠. 방금 그가 말한 대로 그게 지금껏 오랫동안 팀으로 함께한 이유죠.”

    휴즈 감독의 말을 듣고 동민은 예전에 브라운 키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팀이란 그런 겁니다. 한 사람이 완벽할 필요가 없어요, 특히 감독은 더욱 그렇죠. 자신이 완벽해서 혼자 전부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다른 코치들과 스태프들이 있는 거죠.’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휴즈 감독처럼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알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냐며 브라운 키드에게 물었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그 말에 확신이 가득 담겨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동민이 목표로 삼았던 휴즈 감독도 그에게 부족한 점을 다른 사람이 보완해 주고 있던 것이다.

    동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이야기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죠? 저보다 경험 많은 다른 코치들도 있을 텐데.”

    동민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베이포트 FC에는 많은 코치들이 있었고, 단순히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에게 어려운 점이라는 전술적인 측면만 생각하면 동민 이전에 휴즈 감독과 함께 전술 브리핑을 진행하던 사울 멘데스 코치도 있었다.

    그는 동민과 비교하면 훨씬 더 경험 많은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닌 동민에게 그 일을 맡긴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당신이 적임자니까요.”

    동민의 말에 휴즈 감독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난 나와 함께 오랫동안 일해본 코치들을 잘 알아요. 그들이 어떤 면이 장점이며 어떤 점에서 서투른지, 어떤 일들을 좋아하고 어떤 일들을 껄끄러워하는지 익숙하죠.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 일에 가장 맞는 사람은 당신이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잠시 말을 끊으며 동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 말에 동민은 입을 다물었다. 동민은 그의 말에 의문과 부담을 가진 동시에, 그 이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지금껏 휴즈 감독의 옆에서 지켜보던 이 무대에서 자신이 지시를 내리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건…….”

    “부담이 될 수 있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내 징계가 확정된다면 당신 이상으로 이 일에 맞는 사람은 없어요. 지금 나와 브라운이 그렇듯, 당신도 충분히 장점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말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휴즈 감독의 대신이라도, 브라운 키드 코치가 아닌 자신이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판단하며 상대 팀과 맞부딪친다는 사실이 그를 끌어당겼다.

    결국 침묵을 지키던 동민은 입을 열었다.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노력하겠습니다.”

    동민은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선수들이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도 아닌 자신의 말을 들을지, 다른 코치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등에 대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예전이라면 그런 것들에 짓눌려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다른 사람이 직접 떠먹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잘됐네요. 생각보다 이야기도 일찍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마셔도 되겠죠? 운이라곤 지지리도 없었던 오늘 경기의 위로주라는 걸로.”

    동민의 대답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휴즈 감독이 아니라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였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두 번째 맥주를 주문했다. 지금껏 이야기를 하느라 찔끔찔끔 마셨던 것을 그만두고 평소처럼 본격적으로 마실 모양이었다.

    “어휴, 알았으니 술을 마시든 들이붓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 징계를 안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방금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한 것도 무색해지겠지만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네요. 당장 다음 경기에 닉 베손도, 감독님도, 크리스 러셀도 없이 지친 선수들로 경기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어휴.”

    동민은 휴즈 감독의 너스레에 작게 웃으며 대답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경기에서 얻은 것은 선수들의 투지와 약간의 자신감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잃은 것들은 너무나도 컸다. 그 점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었다.

    “강, 당신은 너무 걱정이 많아요. 위기는 어디서든 찾아오지만 그 위기를 넘어설 방법도 또 다른 곳에서 찾아오니까요. 예전에 어디서 들었던 말인데… 누구였더라?”

    그런 동민을 보면서 브라운 키드는 가볍게 말했다. 어느새 두 번째로 시켰던 맥주도 반 이상 비운 그는 쉴 새 없이 맥주와 피쉬 앤 칩스를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휴즈 감독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저 주정뱅이 브라운이 한 말이긴 하지만, 방금 한 말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닙니다. 가끔 당신은 너무 걱정이 과할 때가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될 타이밍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고 고민하죠. 걱정을 하고 대비를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내일부터 해도 늦지 않아요. 하루 늦었다고는 해도 크리스마스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감독님은 안 드시고 먼저 들어가시게요?”

    동민은 나갈 채비를 하는 휴즈 감독을 보면서 물었다.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가 마시는 것을 보아 분명 이제부터 배 속에 끊임없이 맥주를 들이붓는 세 명의 술자리가 열릴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다지 술을 즐기지는 않아서요. 몸이 버티질 못해요. 브라운 저 친구야 1년 중 일주일 정도만 빼면 매일 알코올에 절여져 있으니 상관없겠지만 난 아니거든요. 어쨌든 말하려던 이야기는 끝났으니 먼저 가겠습니다. 저 알코올중독자 예비군을 잘 부탁합니다. 혼자서 마셔도 집은 잘 들어가는 것 같지만 혹시나 길거리 쓰레기통 옆에서 우리 스태프를 보고 싶진 않으니까요.”

    “하하, 아직 중독자가 아니라 예비군이라니 그것 참 다행이네요. 조심히 들어가요, 휴즈.”

    앨런 휴즈는 손을 흔드는 브라운 키드와 동민을 뒤로하고 펍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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