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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패배 (138/270)
  • 자랑스러운 패배

    어느새 후반전도 정규 시간은 모두 지나갔다. 조금 전, 대기심이 들었던 시계의 추가시간도 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다 끝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마지막 시간까지 벤 로이터는 마치 18살 때의 첫 데뷔 때처럼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비기는 것을 넘어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만일 누군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제대로 된 주관 없이 홈 팬들에게 휘둘리는 주심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신을 믿어준 감독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퇴장당한 것이 화가 났다.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어린 선수들이 분노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런 자잘한 이유들이 모여서 어느새 그의 등을 떠미는 듯했다. 뭐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마지막까지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다.

    ‘이대로 질 수 없다.’

    18살에 데뷔한 이후, 언제나 경기에 나서면 최선을 다했던 그였지만 오늘은 그 이상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듯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간절함 때문인지 경기가 끝나기 직전, 다시 한번 베이포트 FC에게 공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앙에서 볼을 돌리던 상대가 패스 미스로 이안 페트로프에게 공을 헌납한 것이다. 경기가 거의 끝나간다는 생각에서 나온 실수였다.

    이안 페트로프는 공을 잡자마자 해리 맥스웰에게 공을 넘겼고, 해리 맥스웰은 내줄 곳을 찾았다. 최전방의 두 공격수는 골문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수비수들에게 막혀 제대로 패스를 전달하기 힘든 위치였다. 게다가 어찌어찌 연결한다고 해도 두 번째 골이 터진 이후부터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공을 돌리는 데 집중하던 올드햄 FC였던 만큼, 그들 근처의 수비수들의 숫자는 쉽게 제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겠지만 에딘이나 로날드에게 전달해야 하나.’

    그가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한 후 결국 에딘 페트로비치 쪽으로 공을 내주려 할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끄러지듯 상대 수비진 사이로 침투하는 벤 로이터의 모습이었다. 해리 맥스웰은 그 모습을 보고 홀린 듯 그의 앞으로 공을 밀어주었고 공은 자연스럽게 벤 로이터에게 전달되었다.

    공을 받은 벤 로이터의 눈은 골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달려드는 수비수도, 측면으로 빠지는 동료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오직 상대 골문과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지쳐 있던 그의 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공을 잡고, 달려드는 수비수를 제쳤다. 피로에 흐려져 가던 시야는 정확하게 골문 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럽던 머리는 말끔하게 수비수들의 다리 사이를 지나가 골문 구석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상했다.

    그는 슈팅을 위해 오른발을 들어 올렸고, 그제야 주위의 모습이 슬로모션 비디오처럼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자신이 제쳤던 수비수가 다시 달려오는 모습도, 자신을 바라보며 소리치는 로날드 조던의 모습도 모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느린 것을 보면서 그는 공을 찼다.

    “모두들 고생했습니다.”

    앨런 휴즈는 경기를 끝낸 선수들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에 듣던 냉철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미안함과 자랑스러움 등, 온갖 감정이 섞여 있는 복잡한 음성이었다.

    “오늘 경기는 비록 패배했지만 여러분들은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패배의 원인은 분명하게 나 하나입니다. 당신들은 물론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를 비롯한 스태프진들도 포함해,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다음 경기에서도 이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길 바라고, 동시에 다음 경기까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편안한 휴식을 취하길 바랍니다.”

    올드햄 FC와 베이포트 FC의 경기는 2 대 1이라는 점수 차로 올드햄 FC의 승리로 끝났다.

    전반 44분, 조나단 케인의 태클로 인한 페널티킥과 이에 대한 항의로 닉 베손과 앨런 휴즈 감독이 퇴장당했다. 후반 38분에 쐐기 골을 허용했던 베이포트 FC는 경기가 끝나기 직전 벤 로이터의 추격 골이 터뜨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끝내 경기를 뒤집지 못하고 경기에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혼과 열정은 경기가 끝나고 올드햄 FC의 홈 팬들까지도 박수를 치게 만들었다. 경기가 끝나자 드러누워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뛰어다닌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모습이 관객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은 심판이 명경기를 망친 것이나 다름없다며 혀를 차고 비아냥거렸지만,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쩌면 휴즈 감독 없이 경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라……. 정말 괜찮을까. 닉 베손의 이탈도 충분히 타격이 큰데.’

    동민은 경기가 끝난 후 하루 늦은 혼자만의 성탄절을 느끼며 누워 있었다. 오늘의 경기가 패배로 끝난 것도 팀에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규정에 따라 닉 베손이, 그리고 어쩌면 휴즈 감독까지 다음 경기에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구단 측에서 항소하면 줄어들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FA 측이 항소를 받아줄지는 미지수였다.

    ‘기각할 확률이 더 높을 거라고 휴즈 감독 본인도 말했고…… 당장 다음 경기부터가 문제야. 경기 시작 전의 준비는 휴즈 감독이 할 수 있지만 정작 경기장 안에서 지시를 내릴 수 없다면 그 공백은 너무 큰데.’

    휴즈 감독의 존재는 경기의 준비나 선수들 장악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의 감독의 심리를 읽고 움직이는 듯한 대응이다.

    동민이 스테이터스를 보고 상대의 전술을 읽어서 그에 따른 전술을 생각한다면, 그는 그만큼 상대의 전술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 감독이 무엇을 바라고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하는 타입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휴즈 감독의 능력은 그의 가장 큰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벤치 위에서 지시를 내리지 못하게 된다면 베이포트 FC에게는 닉 베손의 출전 금지나 크리스 러셀의 부상 이상의 큰 타격이 될 수도 있다.

    ‘휴즈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아까는 일단 그쪽 이야기는 최대한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던데. 선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그랬겠지만.’

    동민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성탄절 다음 날의 밤하늘을 조금씩 내리는 눈송이가 채우고 있었다. 한국보다 겨울이 따뜻한 런던에서는 드문 눈송이였다.

    그 광경에 당장 다음 경기가 걱정스럽던 것도 잠시 잊고, 눈이 하루나 이틀쯤 더 일찍 왔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한국은 지금쯤 어떠려나.”

    경기를 앞두고 바빴던 탓에 크리스마스에도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부모님도, 병렬도, 경태나 종환과 같은 친한 사람들도 연말을 앞두고 연락하지 못했던 것에 조금 죄책감을 느끼며 동민은 일어나 핸드폰을 보았다.

    ‘메일도 못 보냈으니 늦게라도 연락해 볼까. 지금 한국은 새벽이니 이따가 좀 몇 시간 뒤 쯤 전화하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발신자는 여느 때와 같은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였다.

    ‘또 경기의 패배를 술로 잊자니 뭐니 하는 그런 전화인가. 이 사람은 정말 아까 경기 중에 라커 룸에서 선수들을 죄다 휘어잡았던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다니까. 아까는 오히려 휴즈 감독보다도 무서워 보였는데.’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는 경기가 끝나기만 하면 술을 찾는 사람이었다. 젊을 적에 아내를 잃었다는 그는 경기가 끝나면 혼자 펍에서 술을 마시다가 동민을 부르곤 했다. 차라리 경기가 끝나자마자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그는 꼭 그의 집에서 동민의 숙소가 가깝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그를 부르는 것이다.

    물론 동민보다 술이 센 그와 상대하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좋았지만 집에서 쉬고 있을 때에도 휙 전화를 걸곤 하는 그의 행동에 가끔 동민은 두통을 느끼곤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분명 펍에 부르는 것일 거라며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에휴, 이 사람은 항상 똑같다니까. 오늘은 적당히 거절해야지.’

    동민은 한숨을 쉬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그가 적응하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지만, 오늘만은 전화 너머까지 술 냄새가 풍길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며 그럴 상황도 아닌 것 같다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예, 무슨 일이시죠?”

    그러나 전화 너머로 들리는 브라운 키드의 목소리는 그가 예상했던 거나하게 술에 취한 목소리가 아니라 아까 라커 룸에서 모두를 휘어잡았던, 그에게는 드문 딱딱한 목소리였다.

    “강,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와주지 않겠어요? 가능한 한 빠르게요. 위치는 저번의 그 펍 이고요.”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말에 동민은 자신도 모르게 알았다며 승낙했다.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전화 너머로 보이지도 않을 고개까지 끄덕거릴 정도였다.

    전화가 끊어지고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뒤늦게 한 가지를 깨달았다.

    “술… 한 방울도 안 마신 목소리였는데.”

    경기가 승리로 끝나면 축하주를, 경기를 지면 위로주를, 비기면 비긴대로 술을 찾는 그의 모습이 익숙한 동민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금방 오겠다고 했어요. 아마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쉬고 있던 것 같네요.”

    “고마워요.”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의 말에 앨런 휴즈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뭔가 찜찜한 듯한 기분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어오는 키드 수석 코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곳도 아닌데 하필 여기로 부른 이유는 사심이 너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그의 말에 브라운 키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가 끝나는 즉시 술을 마실 생각으로 이곳으로 동민을 부른 브라운 키드는 그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봐왔던 그들인 만큼 그 말을 억지로 부정해 봐야 휴즈 감독이 모를 리 없었다.

    “뭐, 확실하게 이야기가 끝나고 마시면 괜찮잖아요?”

    그의 말에 휴즈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이런 성격은 벌써 오래 봐와서 알고 있었고, 정작 중요할 때에는 확실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일할 일도 없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만히 앉아 동민이 오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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