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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 (134/270)
  • 청천벽력

    경기가 시작되고 15분이 지난 지금, 크리스 러셀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이를 악물었다. 여느 때처럼 경기에 나선 이후 집중해서 뛰고 있었지만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 허리의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던 통증은 이제 날카로운 칼로 찌르듯 커져갔다.

    ‘이게 대체 왜…….’

    그에 따라 그의 플레이도 점차 변하고 있었다. 경기 시작 직후만 해도 평소처럼 많은 활동량을 보여주며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가 뛰어다니는 범위는 매우 줄어 있었다.

    게다가 상대 선수들에게 바짝 붙으면서 그들의 패스를 방해하던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사라지고, 어정쩡한 거리만 유지하며 오히려 공간만 내주면서 상대 중원이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안 돼, 감독님이 말했던 플레이가 하나도 안 되고 있어.’

    그 스스로도 지금 자신의 움직임이 팀에 보탬은커녕 구멍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를 악물며 더욱 발을 재촉했고, 어떻게든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통증을 참은 채로 경기장을 누볐다.

    그리고 팽팽하던 전반 32분,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악!”

    크리스 러셀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라운드를 뒹굴었다. 그가 공을 잡고 있을 때 수비를 위해 달려든 상대 선수와 어깨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이다. 그리 강한 몸싸움이 아니었고, 반칙조차 아니었기에 다들 가볍게 생각했지만 허리를 부여잡은 크리스 러셀은 일어나지 못했다.

    칼로 찌른 듯 날카로운 통증에 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엎드려 움직이지 못했고, 그제야 사태를 알게 된 선수들이 의료팀을 불렀다. 그렇게 크리스 러셀의 박싱데이 첫 경기는 끝나고 말았다.

    “상태가 어떻다고요?”

    휴즈 감독의 걱정스러운 말에 팀 닥터인 아론 홀딩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검사가 나와 봐야겠지만 가벼운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리 쪽에 통증이 굉장히 심각해 보이는 상황이라서… 만약 예상한 대로 근육 쪽 부상이 아니라 뼈 쪽이라면 수술이 불가피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휴즈 감독은 입술을 깨물었다. 3년 전 팀에 온 이후, 지금껏 이렇다 할 부상 없이 성장하고 있던 크리스 러셀의 급작스러운 부상은 그의 예정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리고 말았다. 오늘 경기에서 휴식을 주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려 했던 이안 페트로프의 체력은 물론, 전체적인 팀 구성에도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일단 검사 결과가 정확히 나오려면 밤늦은 시각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또 이야기해 주길 바랍니다.”

    휴즈 감독은 그렇게 말하고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영 좋지 않아. 다음 경기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지금부터 문제가 생긴다.’

    크리스 러셀의 부상 이탈이라는 생각 외의 문제점이 있긴 했지만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현재 경기의 승리였다.

    ‘경험상 이안 페트로프는 크리스 러셀처럼 많은 활동량을 기대할 수 없다. 일단 해리 맥스웰과 이안 페트로프 두 사람 다 뒤쪽에 머물게 하면서 공을 유연하게 돌리게 하고 긴 패스로 활로를 찾는 수밖에. 본래 계획했던 중원부터의 압박은 기대할 수 없지만 임기응변으로 지나치는 수밖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바쁘게 선수들에게 지시를 시작했다.

    같은 시각, 동민은 주먹을 꾹 쥐면서 이를 갈고 있었다.

    ‘내가 본 것에 더 확신을 가지고 감독한테 말을 했다면…….’

    그는 조금 전 보았던 크리스 러셀의 스테이터스를 떠올렸다.

    [크리스 러셀]

    23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4.8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4.1 / 20

    선호하는 플레이: 상대를 압박함, 중앙 돌파

    장점 - 두 개의 심장, 강철 몸

    단점 - 부정확한 패스

    현재 컨디션: 2/10

    크리스 러셀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낮은 컨디션을 본 동민은 크리스 러셀의 상태를 휴즈 감독에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가 스테이터스로 볼 수 있는 컨디션을 설명할 방법이 없고, 그의 경기력을 본 휴즈 감독이 결정할 일이라며 지나친 것이다.

    ‘내가 그 스테이터스를 보고 곧바로 이야기를 했다면 크리스 러셀의 부상 아웃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크리스 러셀의 부상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임 시작 때의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컨디션이 그의 몸 상태를 알리던 것이었다면, 그것을 보고 곧바로 휴즈 감독에게 말해서 그를 일찍 교체시켰다면 그가 부상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동안 스테이터스로 보는 것 이상의 것들이 있다는 것만 생각하다가 반대로 스테이터스로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잊고 있었어. 예전 경험을 생각하면 컨디션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것은 체력이 떨어졌거나, 혹은 무언가의 이유로 신체적인 부분이 안 좋아졌거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거였을 텐데. 결과론이지만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그의 머릿속에서는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던 KFC의 선수들의 컨디션이 낮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경험을 생각하면, 그가 만일 컨디션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면 크리스 러셀의 부상을 예방했을지도 모른다.

    동민과 앨런 휴즈의 작은 한숨이 겹쳐졌다. 크리스 러셀의 부상이라는 주제에서 함께 시작되었지만 조금은 의미가 다른 두 한숨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차가운 겨울 공기로 흩어져 갔다.

    경기의 종료와 함께 상대 감독과 악수를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휴즈 감독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기의 결과는 2 대 1의 승리였지만 그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조금 전 아론 홀딩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수술이 필요하다, 라… 적어도 몇 개월, 혹은 아예 이번 시즌 내내 결장하는 건가.’

    크리스 러셀의 이탈은 생각보다 베이포트 FC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첫 번째는 그와 같은 유형의 중앙 미드필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미드필더들인 해리 맥스웰이나 이안 페트로프, 벤 로이터, 심지어 후보인 잭 도일조차도 크리스 러셀만큼의 활동량을 기대할 순 없다. 이걸로 내가 쓸 수 있는 카드가 하나 줄어든 거나 다름없어.’

    경기의 중심을 잡는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해리 맥스웰이나, 뒤쪽으로 빠지는 수비형 미드필더인 이안 페트로프, 노련하게 공격을 이끄는 벤 로이터와는 달리 크리스 러셀은 경기장 곳곳을 누비는 선수였다. 그 때문에 상대 중원과 수 싸움을 벌여야 할 상황에 그가 꺼내 들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기도 했다.

    ‘연초까지 이어진 연전들을 이제 세 명의 중앙 미드필더로 보내야 하는 걸 넘어서 이번 시즌 내내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군. 제기랄.’

    경기는 끝났지만 그의 머리는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힘들겠지만 이번 경기에도 좋은 활약을 해주길 바랍니다. 특히 벤, 이안 두 사람은 더욱.”

    며칠 뒤, 올드햄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휴즈 감독은 그렇게 라커 룸 대화를 마쳤다. 크리스 러셀이 부상으로 장기 결장이 확정되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다른 이들로 스쿼드를 구성해야 했고, 다음 경기들을 치러야 했다.

    “괜찮아요. 많이 뛰면 좋죠, 뭐.”

    “벤치에서 지켜보는 건 지루하니까 당연하지. 어린 녀석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나이 든 사람들이 할 일이니까. 크리스 녀석 한동안 푹 쉬라고 하고 돌아올 때까지 오히려 성적 더 잘 내면 되는 거 아닌가?”

    “벤 아저씨, 나까지 늙은이로 같이 엮지 마요. 난 아저씨보다는 잭이랑 더 나이가 가까우니까.”

    휴즈 감독의 말에 경험 많은 두 중앙 미드필더는 일부러 농담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한창 체력적으로 힘들어지는 지금 시기에 한 명이 빠진다는 점으로 팀 분위기 자체가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평소보다 더욱 가볍게 웃어넘기며 경기 전 분위기를 풀고 있었다.

    “너도 금방이야, 이 녀석아. 꼭 저런 녀석이 자기는 나이 안 먹는 줄 알아요.”

    벤 로이터는 짐짓 화를 내는 척하며 곁눈질로 휴즈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휴즈 감독도 평소와 같은 상황은 아닌 듯했다.

    ‘아무리 경험 많은 감독이라도 하필 이런 타이밍에 일이 터지면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지금까지의 성적이 좋더라도 이럴 때 분위기 잘못 타면 확 내려갈 수 도 있으니까. 당장 이번 경기부터가 분기점이 될 수도 있어.’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며 곧 있을 경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선수들이 그 분기점에서 옳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벤 로이터와 다른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올드햄 FC와의 경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뭔 놈의 판정이 이렇게 빡세? 그것도 우리 쪽에 더 잣대가 더 엄격한 느낌인데.’

    그는 또다시 울리는 휘슬을 듣고는 짜증을 삼키며 주심을 돌아보았다. 상대 공격수의 돌파를 조나단 케인이 태클로 막아내자 주심을 휘슬을 불면서 그의 반칙을 선언한 것이다.

    분명히 공만 빼내는 완벽한 태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에 발이 걸려 넘어진 상대 공격수만 보며 반칙이라고 하는 심판을 보면서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은 제각각 얼굴을 찌푸렸다.

    게다가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아까 상대가 다리 쪽 보고 들어간 태클에 카드 하나 안 주더니만 이건 또 반칙이라고? 오늘 주심 안경이라도 씌워야겠군.’

    그는 속으로 빈정대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다른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씩 주심에 대한 짜증과 불신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경험 많은 벤 로이터는 이럴 때일수록 흥분하지 않고 냉정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다른 선수들에게도 말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몇 선수들의 눈에는 제멋대로 판정이 오락가락하는 주심의 모습이 상대에게만 편파 판정을 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누군가 정말 크게 한 번 터질지도 모르겠는데. 돌아버리겠네 진짜.’

    그는 조나단 케인의 태클에 프리킥을 선언하는 주심을 보고 이를 갈면서도 억지로 냉정을 찾으려 했다. 오심이든, 제대로 된 판정이든 주심의 결정은 선수들이 항의할 정도로 가볍지 않다. 이럴 때 분통을 터뜨리면 터뜨릴수록 반대로 항의한다며 경고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직 전반전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속은 점점 더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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