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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싱데이의 시작 (133/270)
  • 박싱데이의 시작

    “…이상이 선발과 벤치 명단입니다. 며칠 뒤에 올드햄 FC와의 경기도 있으니 명단에 들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체력과 컨디션에 주의하길 바랍니다. 박싱데이를 포함한 이번 기간만 잘 넘긴다면 충분히 좋은 성적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휴즈 감독의 말에 모두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12월 중순을 넘어 말에 가까워진 지금, 베이포트 FC는 1년 중 가장 치열한 시기를 앞두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말하는 박싱데이에 경기를 하는 전통이 있는 만큼 연말과 연초는 정신없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주말과 주말 사이에 한 번의 경기가 더 많아지는 상황은 선수들에게 체력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이는 프리미어리그보다도 많은 경기 수를 가진 챔피언십에게는 끔찍할 만큼의 부담이 될 수 있었다.

    ‘모두에게는 휴식과 안정의 시기가 우리에게는 가장 빡센 시기라니, 거참 그놈의 전통이 뭔지.’

    영국에 와서 벌써 세 번째 맞이하는 연말이지만, 아직도 동민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두가 한 해를 보내는 분위기에 빠져 있는데 자신들은 1년 중 가장 정신없는 기간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그에게 아이러니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동민?”

    “아,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하게 정신을 차렸다. 선수들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들을 보낸 휴즈 감독이 그를 찾고 있었다.

    “잠시 뒤에 내 방에 좀 와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뒤, 동민은 휴즈 감독의 방 안에 서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 자신을 불렀는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던 탓이다.

    “감독님? 무슨 일로…….”

    “아, 별건 아니에요. 내일 경기도 중요하지만 다음 경기 준비도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한 경기에 대해서 집중하다가 그다음부터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지금 시기만큼 한꺼번에 여러 경기를 준비해야 하는 때도 드물거든요.”

    “바로요?”

    동민은 그의 말에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도 U18 팀을 거치면서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한 경기 준비를 하면서 신중하게 할 시간이 없어요. 선수들이 며칠 간격으로 경기를 뛰면서 체력의 한계를 겪는 것과 비슷하게 나를 비롯한 모든 스텝들도 준비하는 것에 여유가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 점을 미리 이야기하려고 불렀습니다. 당신이 언젠가 이 무대에서 감독직을 꿈꾸고 있다면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죠.”

    그의 말에 동민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언젠가 감독직을 바라고 있다고 휴즈 감독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 속을 뒤져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런 그의 머리에 언젠가 술을 먹고 브라운 비드 수석 코치에게 그런 말을 털어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키드 수석 코치가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당신이 이 무대에서 감독이 되고 싶다면 정말 배워야 할 점은 내가 사람들의 심리를 어떻게 추측하나, 가 아니라 이런 점일 겁니다.”

    그의 말에 동민은 굳어졌던 표정을 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키드 수석 코치한테 들어간 이야기는 비밀이 없네요. 얼마 전 인터뷰로 시끄러웠을 때 예상했어야 하는데.”

    “그를 원망하는 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겁니다. 그는 당신이 하지 않은 일을 대신 해준 거니까요.”

    “네?”

    동민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에게 되물었다. 이 일로 브라운 키드를 원망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그가 대신 했다는 이야기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감독직이 목표라면 있었다면 나한테 물어봤어야죠. 그 편이 더 많은 조언을 들었을 테니까요. 일부러 빙 돌아가는 취미가 있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휴즈 감독이 웃으면서 한 말에 동민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가 한 말이 동민에겐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만일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었다면, 말인가요?”

    “그럼요. 아니면 내가 그런 이야기조차 나누기 힘들 정도로 부담스러웠나요? 별로 그렇게 먼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꽤 유감스럽군요.”

    짐짓 서운한 듯 고개를 흔드는 휴즈 감독을 보면서 동민은 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 뭐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농담입니다. 당신이 왜 이야기하길 주저했는지도 대충 예상은 가니까요.”

    당황한 그의 모습에 휴즈 감독은 연기를 그만두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그의 모습이 꽤나 재밌었던 모양이었는지 한참을 웃던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든 당신은 지금 나의 팀입니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당신이 내 팀에 속해 있는 이상 무엇이 되었든 당신의 상담을 내가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단 이야기죠. 안 그런가요?”

    “그렇지만…….”

    “당신이 감독이 되는 것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난 이미 은퇴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그 전에 당신이 감독이 되어서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고 해도 그런 이유로 내가 당신을 멀리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아니, 아닙니다. 어쨌든 그런 생각은 그만둬줬으면 좋겠군요.”

    마지막 휴즈 감독의 말은 그 전과는 달리 웃음기가 없이 진지했다. 조금 전까지 농담처럼 웃으며 가볍게 말하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나가봐도 좋습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내일 경기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다음 경기 준비에 힘써주세요.”

    동민은 그 말에 알았다며 답하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모르겠네.’

    동민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휴즈 감독의 말에 감사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말하려다가 멈춘 것이 신경 쓰였다. 평소의 그라면 말하다가 멈춘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전부 다 정리되어있는 것을 그대로 읽는 듯, 그의 말은 언제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은 달랐다. 마치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실수로 말하려다가 급하게 멈춘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휴즈 감독이 그러는 것은 처음 보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가 멈춘 거지.’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에이, 됐다. 아무리 그 사람이라도 잠깐 말이 헛나갈 일은 있겠지. 사람이 어떻게 컴퓨터처럼 매번 말실수 하나 없이 딱딱 필요한 것만 이야기하겠어. 궁금하긴 하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동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반대로 몸을 뒤집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는 만큼 빠르게 이메일 정도나 확인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응?’

    그렇게 생각하며 메일함을 연 그는 못 보던 주소에서 온 메일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스팸인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일단 확인을 위해 메일을 클릭하자, 그의 생각과는 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때 인터뷰했던 그 기자구나.”

    처음 보는 주소는 다 스팸메일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을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그는 천천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갔다.

    “그때 기사가 완성되어서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달란 건가. 생각보다 금방이네.”

    그렇게 동민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 휴즈 감독의 이야기는 천천히 다른 생각들의 뒤로 밀려갔다.

    “어제 말했듯 이번 경기부터가 이번 시즌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랍니다.”

    휴즈 감독의 말이 끝나고 경기장으로 나서는 크리스 러셀은 주먹을 꾹 쥐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경기가 끝나고 4일 후에 또 경기, 그리고 그 경기가 끝나고 3일 뒤에 또 경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휴즈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하필 이런 때에…….’

    그는 조금씩 욱신거리는 허리의 통증을 참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허리의 통증은 그리 강하진 않았지만 조금씩 그의 의식을 찔러대고 있었다. 마치 종이에 손끝을 베인 것처럼 그리 심한 통증이 아님에도 그의 신경을 건드려 대는 통증은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했다.

    본래 조금이라도 몸에 문제가 있다면 곧바로 감독이나 팀 닥터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늘의 그에게는 그 원칙이 의미가 없었다.

    ‘오늘 경기는 오랜만에 잡은 선발 기회니까. 게다가 지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지금처럼 빡빡할 때 눈에 띄어야 하니까.’

    체스터필드 원더러즈와의 경기 이후로 크리스 러셀의 선발은 거의 없었다. 중원에서의 숫자 싸움과 활동량을 가져갈 수는 있지만 패스에서 약점을 보이는 그를 선발로 쓰는 것은 휴즈 감독에게도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역할은 주로 벤치에서 시작해서, 상대의 체력이 떨어진 후반에 나와 강한 체력과 활동량으로 중원 싸움을 우위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벤치에서만 시작하는 것을 반길 선수는 없다. 그 또한 그랬다.

    ‘선발로 나왔을 때 제대로 된 활약을 해야만 앞으로도 기회가 올 거야. 허리에 통증이 있다고 말하면 분명 이번 경기에서 빠지게 될 테고, 이번 기회도 놓치면 난 계속해서 벤치에 앉아야만 하겠지.’

    그것이 그가 자신의 통증을 말하지 않은 이유였다. 오랜만에 선발 명단에 들었다는 생각과, 지금을 놓치면 후보 선수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생각.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는 크리스 러셀인 만큼, 출전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지만 그 또한 선발로 뛰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잡은 선발 출전 기회란 점도 그것을 부추겼다.

    그의 장점 중 하나인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함이 반대로 독이 되어버렸다. 종이 한 장 차이인 노력과 무리한 열정의 사이에서 오늘의 그는 후자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 정도 통증이야 뛰다 보면 금방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잠자는 자세가 조금 좋지 않아서 그럴지도 몰라. 경기에 집중해서 뛰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 있을 테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라운드를 밟았다.

    휴즈 감독에게 말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선발의 기회라는 생각에 밀려 사라졌고,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는 이번 경기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다른 선수들도, 심지어 휴즈 감독조차 생각하지 못한 폭탄을 짊어지고 그는 경기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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