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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비, 그 후 (131/270)
  • 더비, 그 후

    손우드 FC와의 노스 윌드 더비가 끝나고 동민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기댔다.

    ‘이걸로 5위는 유지. 덤으로 리그 외적으로 가장 지면 안 되는 팀을 상대로 3 대 0이라는 대승.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네.’

    챔피언십은 승격과 잔류, 강등 경쟁이 치열한 만큼 리그 경기는 언제나 긴장이 됐지만, 손우드 FC 는 리그 최강팀으로 손꼽히는 모리스톤 타운 AFC 이후로 가장 긴장이 되던 팀이었다.

    ‘저번 시즌 이후로 팬들이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

    동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더비라는 개념이 그리 확실하지 않았다. K리그에서 더비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불꽃이 튀는 경기는 수원 블루 데빌즈와 서울 레드 윙즈의 슈퍼매치 정도였다. 그조차도 두 팀이 그렇게 서로 이를 갈게 된 이유가 역사에서 나온 것이었지, 같은 연고지를 두고 다투면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에 와서 그가 가장 놀랐던 것은 연고지에서 시작되는 팀들 간의 경쟁이었다. 본래 퍼스트 팀만큼 성적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 U18 팀도 가장 큰 라이벌 팀인 손우드 FC에게 패배한 날은 팬들의 호된 질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유스 팀만 해도 그 정도인데 퍼스트 팀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하지. 만약 졌다면… 어우.’

    지난 시즌 후반기, 손우드 FC에게 4 대 0이라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는 몸서리를 쳤다. 당시 U18 팀에 속해 있던 동민마저 놀랄 정도로 팬들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스 윌드 더비에서만큼은 이겨야 한다, 그것이 팬들이 가장 크게 바라는 조건이었다.

    “뭐, 이겼으니까 다행이지. 5위 자리가 조금 더 안전해졌으니 다음 경기에 대한 부담도 좀 줄었고, 선수들 사기도 올랐을 테고, 다음 경기까지는 A매치 기간 덕에 여유도 있고. 휴.”

    그는 리그를 위해 숨 가쁘게 달리던 페이스 중 맞이한 잠깐의 휴식에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혜지 씨, 내가 분명히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는 했어. 근데 이건 좀 비율이 잘못된 거 아닌가?”

    정혜지는 자신이 쓴 기사를 보며 혀를 차는 상사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상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혜지 씨, 이 일 하루 이틀 해? 내가 강동민인지 하는 그 사람 기사 해보라고 하긴 했지만 심형만 기사하고 그쪽하고 어디가 주고 어디가 부인지는 알고 있는 거 아냐? 근데 이건 뭔데? 혜지 씨가 이거 기사 비율 봐봐. 어?”

    그는 혜지의 눈앞에서 그녀가 쓴 기사를 흔들었다.

    “내가 사람들한테 먹힐 기사를 쓰라고 했지, 이렇게 쓸데없는 쪽을 자세하게 해서 가져오라고 했어? 혜지 씨가 읽어봐. 심형만이랑 비율이 큰 차이가 안 나. 아무리 한국인 최초의 잉글랜드리그 코치니 뭐니 해도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건 K리그 최고 스타지, 선수도 감독도 아닌 수수한 코치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점점 더 짜증이 나는지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딱 보면 어떤 게 더 팔리겠다, 어떤 쪽을 더 힘을 줘야겠다, 하는 게 생각이 안 들어?! 어떤 게 메인이고 어떤 게 서브인지 구분도 못 하는 사람한테 회사에서 돈 주고 런던까지 다녀오라고 한 줄 알아!”

    그는 거기까지 소리를 지르고는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말을 멈추었다.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며 혜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부장님, 심형만 선수 쪽은 지금 부상으로 경기 출전도 없고, 이번에 딴 인터뷰 말고는 이미 다른 곳에서 다 다뤄서 이미 독자들이 아는 말만 반복하는 상황인데, 이 베이포트 FC와 강동민 코치의 이야기는…….”

    “언제부터 그런 게 중요했다고! 반복을 하든, 뭘 하든 결국 사람들이 보고 관심 가지는 건 이미 유명한 심형만이라는 걸 말해줘야 알아! 대체 누가 영국 2부 리그 팀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 가진다고! 사람들 관심도 없는 걸 가지고 우리 독점이니 최초 인터뷰니 한다고 팔리는 줄 알아?! 왜 서브로 넣으라는 걸 가지고 메인처럼 다루고 있는 건데! 내가 일처리 이딴 식으로 하라 했냐고!”

    “…죄송합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부장의 호통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자기가 독자들이 눈을 빛낼 거리가 필요하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또 모르는 척은. 거기다가 최초라는 말만 붙이면 좋아한 다고 말했던 것도 자기였고.’

    혜지는 한참동안이나 이어진 그의 호통을 듣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쉬었다. 분명 취재를 시작하기 전에 그의 입으로 부상당한 심형만 만으로는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기에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지금 이야기해 봐야 그가 들을 리 없었다.

    ‘부장이 저러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말을 바꾸는 그의 태도보다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라…….’

    기사를 쓰면서 그녀가 더 관심을 가지고, 공을 들였던 것은 원래 메인으로 생각했던 심형만 쪽이 아니라 강동민과 베이포트 FC 쪽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이미 일간지, 주간지에서 다 다뤄서 인터뷰를 제외하면 다 아는 이야기의 반복인 심형만보다 강동민과 베이포트 FC 쪽이 더 기사를 쓸 보람 있었으니까.’

    그것이 그녀가 부장에게 말했던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나머지 한 가지는 그녀 스스로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직접 보았던 베이포트 FC에 마음을 뺏겼다, 라는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그녀의 안에서도 확실하게 형태를 이루지 못한 채 조용히 다시 몸을 숨겼다.

    ‘부장한테 깨졌으니 일단 고쳐 쓰기는 해야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를 고쳐 쓸 준비를 했다. 부장이 말했던 대로 강동민과 베이포트 FC의 기사를 간략화하고 심형만의 인터뷰에 이어지는 기사들을 작성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그날 들었던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남아 울리고 있는 듯했다.

    “네? 뭐라고요?”

    A매치로 인한 휴식도 잠시, 앨런 휴즈에게 불려온 동민은 그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다음번에 있을 선수들의 전술 브리핑에 참석해 줄 수 있겠냐고 말했습니다. 슬슬 내가 말하는 일에 놀라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나요?”

    놀라는 그를 보면서 휴즈 감독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매번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을 하시니까요. 그것보다 전술 브리핑을 진행하는 것은 멘데스 코치가 하는 일 아니던가요? 저 같은 비디오 분석관이 나설 자리는 아닌 걸로 아는데…….”

    전술 브리핑은 경기를 준비하면서 선수들에게 다음 경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전체적으로 가져가야 할 움직임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일로 감독인 앨런 휴즈를 포함한 코치들이 진행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동민이 맡고 있는 비디오 분석관이라는 위치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코치진들이 정기 회의를 통해 정해진 것을 선수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자면 지금 정기 회의도 원래 비디오 분석관이 참여할 일은 아니었잖아요?”

    휴즈 감독의 말에 동민은 대답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동민에게 출석해 달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분명 비디오 분석관은 정기 회의에 참여하는 위치가 아니었다. 동민이 말한 대로 비디오 분석관이 할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하자면, 그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정기 회의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건…….”

    동민은 휴즈 감독의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을 흐렸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휴즈 감독은 말을 이었다.

    “볼든 구단주와 이미 논의는 했습니다. 당신이 이번 제안을 수락한다면 계약을 새로 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요.”

    “네? 새 계약이요?”

    동민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비디오 분석관이 아닌 코치 중 한 명으로서 새로 계약하자는 이야기죠. 당신이 전술 쪽에서 도움을 줬으면 하는데요.”

    “코치로…….”

    동민이 그 말을 다시 입으로 읊조리고 있자 휴즈 감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단순한 비디오 분석관으로서 당신이 맡는 일이 너무 많아지는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건의했고, 볼든 구단주도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A 라이센스의 파트 2와 평가도 그리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능하다고 판단했거든요. 아, 물론 당신이 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죠.”

    그 말에 동민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반응에 휴즈 감독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혹시 너무 부담이 크다던가 해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민은 급하게 고개를 들면서 휴즈 감독의 말을 곧바로 부정했다.

    “그저… 퍼스트 팀으로 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빠르게 바뀌어도 괜찮은지 해서…….”

    동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U18 팀에서 퍼스트 팀으로 온 것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였다. 아직 퍼스트 팀에 온 지 한 시즌도 지나지 않아서 비디오 분석관이라는 자리에서 코치로 바뀌는 것을 그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의 말에 휴즈 감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맨 처음 레이미 볼든 구단주를 통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코치로서 가능성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흘려들었죠. 뭐 하러 그 먼 곳에서부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데려오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당신이 와서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도 그가 지원을 해주면서까지 당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 수 없었죠.”

    그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U18 팀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그래서 난 당신을 퍼스트 팀으로 올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퍼스트 팀에서 당신의 분석을 기대할 만하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리고 퍼스트 팀에 온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당신은 더욱 가능성을 보여줬고요. 나는 당신이 코치로서 팀에 더욱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에게도 큰 기회가 될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어느 때보다도 확신이 들어 있었다. 동민이 코치로서 팀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서 더욱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동민을 몰아붙이듯 물었다.

    “그래도 자신이 없거나 한 건가요?”

    그런 휴즈 감독의 말에 동민은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아뇨, 감사합니다. 그 말,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동민의 눈에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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