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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판 혹은 함정 (127/270)
  • 발판 혹은 함정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경기는 24개의 팀들이 팀당 총 46경기를 치르는 길고 고된 강행군이다. 그리고 베이포트 FC가 그 강행군의 3분의 1에 가까운 곳을 넘어섰을 때, 그들의 성적은 프리미어리그 승격까지 바라볼 수 있는 5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들이 목표로 설정한 중하위권 유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성적이었다. 그런 그들의 돌풍에 몇몇 언론들이 조금씩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중에 현지 언론이 아닌 한국의 언론이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제가요?”

    “그래, 혜지 씨 안 그래도 부서 옮기면서 외국 취재 나가보고 싶다며? 이참에 잘됐지 뭐. 요즘 안 그래도 이렇다 할 뉴스거리 없잖아. 프리메라리가에서 뛰는 장시환은 슬럼프로 벤치 신세라서 애매하고, 수원 블루 데빌즈에서 프리미어리그 버턴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심형만은 부상이라서 이번 기사를 다 쓰기에는 임팩트가 모자라. 그 외로 눈 돌려도 탁 눈에 띄는 게 없는 상황이야. 어린 유망주들 특집은 얼마 전에 써먹었으니까. 독자들 눈이 반짝할 뭔가가 없다는 거지.”

    정혜지는 상사의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말한 것은 빛나는 선수들의 인터뷰나 기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이런 아직 확실한 무언가도 보여주지 못한 2부 리그, 그것도 코치를 인터뷰하는 것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른 일이었다. 게다가 상사가 원하는 기사의 방향성을 생각하면 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사는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거 좋아한다고. 국내 최초, 최고, 아무튼 최 들어가는 거라면 죄다 좋아하잖아. 우리나라 최초의 잉글랜드 리그 코치의 단독 인터뷰! 이런 거 멋들어지게 딱 달아주면 죄다 눈 반짝거리면서 볼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혜지 씨가 이번에 심형만 인터뷰 따면서 같이 잘 좀 해봐, 알았지? 별거 아니어도 사람들 국뽕 자극할 수 있게 써보란 말이야. 애초에 최초의 단독 인터뷰로 사람들이 관심 가질 수는 있겠지만 거기서 얼마나 더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낼지는 혜지 씨한테 달린 거야. 심형만 하나에 독자들 흥미를 전부 맡길 순 없는 거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잘 해보고. 그럼 가봐. 이번에 기대하고 있어도 되지? 심형만 쪽 인터뷰나 그 코치 그 사람이나 잘 좀 부탁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의 대화는 끝났다. 혜지는 조용히 상사의 자리를 떠나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베이포트 FC의 비디오 분석관, 강동민이라… 확실히 한국인 최초의 잉글랜드 리그 코치니, 챔피언십에서 베이포트 FC의 돌풍이니 하는 것들은 있지만 기삿거리가 뭔가 더 있긴 있으려나. 일단 먼저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심형만의 부상만 아니었으면 이런 추가 기삿거리는 찾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일을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이것저것 팔아먹을 게 있겠는데?’

    혜지는 강동민에 대해 알아보고 나서 생각했던 것보다 기삿거리로 쓸 정보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선수를 꿈꾸던 사람이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좌절. 그리고 일반 대학에 갔다가 다시 지도자자격증을 따면서 코치로 복귀. 이후 K2 리그의 성남 페가수스에 들어갔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온 이후 곧바로 영국행이라……. 게다가 26살이라는 젊은 나이. 정말 잘만 살을 붙이면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가득하네.’

    과거에 선수를 꿈꾸던 소년이 교통사고로 선수의 꿈을 접고 코치로 돌아왔다는 스토리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좋은 아이템인데 거기에 26세라는 어린 나이, 그리고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꿈을 펼치고 있는 상황까지. 마치 누군가가 기사를 쓰라고 만들어낸 사람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 타이틀만 몇 개나 뽑아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대충 조사는 끝났으니 남은 건 본인이랑… 선수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현성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의 인터뷰인가. 일단 후자부터 하는 게 좋겠지.’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예?”

    혜지는 생각지 못한 반응에 말문을 잃었다. 동민 전에 미리 이야기를 들으려던 현성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인 이병렬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었다.

    “저기, 강동민 씨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쓴다던가 하는 게 아니라…….”

    -미안합니다. 그런데 나는 언론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는 쪽이 아니라서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동민이 그 녀석한테 직접 듣는 편이 나을 겁니다.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고 다니고 싶진 않거든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병렬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만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병렬 감독님? 이병렬 씨?”

    황급히 말을 걸어보아도 수화기 저편에서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은 뭐야? 무슨 자기 이야기 한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옛날 제자에 대해서 이야기 좀 듣겠다는데 왜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끊어버린담? 자의식 과잉도 아니고 진짜!”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분노해도 이미 끊어져 버린 전화가 다시 연결될 리 만무했다. 그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전화 시도가 그저 허공에 흩어진 후에야, 결국 그녀는 이병렬 감독의 인터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한테도 이제 이상한 것들이 달라붙기 시작하는 건가.’

    병렬은 주머니에 쑤셔 넣은 핸드폰의 진동을 애써 무시했다. 조금 전 왔던 동민에 대한 인터뷰 이야기는 그에게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언론은 선수들이나 코치들을 좋지 않은 쪽으로 끌어들이는 개미귀신과도 같았다. 유명인이라는 허상을 덮어씌운 뒤에 점차 상대를 비행기 태우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바닥까지 끌어내려 버리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언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악영향을 받았던 것은 어린 선수들이 훨씬 많았다.

    ‘어린 선수들일수록 그것에 당하기 쉬우니까. 경험은 적은데 다른 쪽에서 띄워주니까 자기 실력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겉멋만 들기 쉽지. 동민이 그놈은 겉멋들 성격도, 어리다고 할 만한 나이도 아니지만 경험이 많은 녀석은 아니니까 혹시 몰라.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면…….’

    아직 코치로서는 경험이 부족한 동민인 만큼 벌써부터 언론이 달라붙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동민이 쉽게 영향받는 성격은 아니라고 해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아직 그놈한테는 그런 것들이 안 달라붙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한국 축구의 희망이니 뭐니 하는 이름표가 달렸다가 어느새 비운의 선수니, 거품이니 하는 꼬리표로 선수 인생을 끝낸 선수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모두 언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순 없지만 그 결과에 언론의 영향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동민이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본인이 상관없다면 내가 끼어들 틈은 없지만…….’

    그는 동민이 있을 영국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네? 인터뷰요?”

    동민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음… 잠시만요.”

    자신이 언론의 시선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은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기에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요즘 팀 성적이 좋아지면서 동시에 언론에도 눈에 띈 건가.’

    갑작스러운 연락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에 병렬에게 들었던 경고가 떠올랐다.

    ‘언론에 휘둘리는 거야말로 이 바닥에서 망하기 좋은 지름길이라고 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말하던 병렬을 생각하면 역시 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리그 경기의 3분의 1이 지났을 뿐인 지금의 상황에서 인터뷰 같은 것을 할 여유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피어올랐다. 잠깐의 고민 후 그가 거절하려 입을 열려 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주안의 교활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그때 있었던 일을 되갚아주기 위해서는 굳이 지금부터 척을 져둘 필요가 없지 않을까?’

    성남 페가수스에서 나올 때의 일이 떠오르자 굳이 지금부터 언론과 담을 쌓고 지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한 구석이라도 알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힘이 생겼을 때, 주안에 대해서 터뜨리는 것도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했다.

    ‘지금 내가 조금이라도 그쪽하고 연관이 있어서 황주안 그 인간의 입김이 닿는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날짜는… 아, 예, 그럼 그때로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예.”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전화선을 타고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에요?”

    동민이 전화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 할 때, 마주친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가 물었다. 조금 전 심각한 표정으로 한국말을 하면서 고민하던 그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아뇨, 별거 아니에요. 한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인터뷰 요청이 있어서요.”

    한국인 최초의 잉글랜드 리그 코치니 뭐니 하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말하려고 하니 얼굴이 붉어져서 그는 적당히 말을 줄였다.

    “오, 강. 당신 한국에서는 유명해지는 건가요?”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잡지 쪽에서 그냥 몇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다. 뭐 그런 수준이겠죠. 애초에 선수도 아닌 제가 유명해진다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잖아요. 팀으로서 조명 받거나 선수들이 주목받거나 하는 편이 좋지, 일개 스태프인 제가 주목받는 건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능하면 주목받는 것은 그라운드에 서는 선수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브라운 키드의 말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터뷰를 수락한 것은 언젠가 황주안과 성남 페가수스에 대한 폭로를 하기 쉽게끔 먼저 창구를 열어두는 것이지, 그 외의 면은 그다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인터뷰든 뭐든 그다지 상관은 없으니 팀에 지장이 없게만 해줘요. 지금까지 성적이 좋다고 해도 언제 갑자기 무너질지 모르는 것이 리그니까요.”

    “걱정 마세요. 일에 지장이 있게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동민의 대답에 브라운 키드는 웃으며 자리를 떴다.

    ‘주목받는 것은 그라운드에 서는 선수들이어야 한다, 라… 강 저 친구, 가끔 보면 금욕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란 말이야.’

    누구나 주목받고 싶은 욕구는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혹은 억지로 밀어내는 듯이 보였다.

    ‘뭐, 본인에게나 팀에게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진 않으니 상관없지만, 참 알면 알수록 저 친구는 재미있단 말이지.’

    브라운 키드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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