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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새로운 시작 (120/270)
  • 변화와 새로운 시작

    “조나단, 더 확실하게 달라붙어야 해! 지금 너무 느슨하잖아! 공중 볼에서 놓치면 끝이야!”

    휴즈 감독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훈련장 가득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들은 조나단 케인은 훈련이라는 것을 한순간 잊을 정도로 강하게 에딘 페트로비치에게 붙어 공중 볼 경합을 벌였다.

    “오케이, 그렇게! 더 확실하게 붙지 않으면 상대한테 공을 헌납하는 꼴이나 다름없어!”

    프리시즌도 거의 끝나가고 시즌 개막을 앞둔 베이포트 FC의 훈련장은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듯 선수들의 땀이 흐르고 있었다. 휴식 시간을 알리는 휴즈 감독의 말에 선수들이 모이자, 그는 또 한바탕 잔소리들을 쏟아놓고 있었다.

    “조나단, 네가 아까처럼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거나 집중력을 잃어서 상대를 놓치게 되면 분명 실점으로 이어진다. 훈련이라고 정신을 놓지 마라. 다음 말을 더 설명을 해줘야 하나?”

    “아닙니다.”

    “그리고 맥스웰, 너는…….”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깐깐하게 주문하는 휴즈 감독의 모습을 보면서 동민은 그들의 진지한 태도가 자신에게도 전염되는 것을 느꼈다.

    ‘얼마 후면 이제 새 시즌의 시작인가. 언제나 새 시즌은 긴장되겠지만, 이번 시즌은 또 예측할 수 없는 수도 하나 있고…….’

    그의 머릿속에는 한 팀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뭐 정신 차리고 제대로만 하면 휴즈 감독 말대로 우승은 무리지만 적어도 강등권에 들어설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게 목표이기도 하고. 제대로만 하면…….’

    동민이 리그 순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까지와 느낌이 다른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처음 프로의 세계에 들어섰던 팀인 성남 페가수스는 K2리그에서 안양 타이거즈와 같은 확연한 우승 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승권 혹은, K리그로의 승격권을 노릴 만한 정도로 비교적 강팀에 가까웠다. K2리그라는 생태계에서 상위권의 팀이었던 것이다.

    그가 퍼스트 팀에 올라오기 전에 속해 있던 베이포트 FC의 U18 팀은 강팀은 아니었지만, 유스 팀인 만큼 퍼스트 팀처럼 강등과 잔류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하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들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어린 선수들의 성장이었기에 퍼스트 팀과 같이 시즌 성적에 모든 것을 걸고 연연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긴 아니거든. 강등, 잔류, 승격, 우승, 모든 게 다 한 시즌 안에서 이루어지고 거기서 24개 구단의 명운이 갈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베이포트 FC는 성남 페가수스가 K2리그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챔피언십에서 손꼽히는 강팀은 아니었다. 오히려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바라보는 1위나 2위, 플레이오프를 노리는 3위에서 6위 팀들과는 거리가 먼, 강등권 조금 위쪽에서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팀들 중 하나였다.

    ‘그런 팀인 만큼 지금까지 내가 겪은 것과는 다르게 새 시즌을 맞이하는 각오가 다를 수밖에.’

    프리미어리그보다는 하위 리그지만 챔피언십 또한 누구라도 삐끗하면 강등될 수 있으며, 한번 강등되면 다음 시즌에 곧바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자칫하면 그대로 선수들을 떠나보내면서 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은 팀의 감독인 휴즈 감독이나 스태프, 구단주뿐만 아니라 선수들이며 팬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베이포트 FC라는 팀이 먼 옛날에는 1부 리그에 있었지만 4부 리그까지 떨어지면서 기나긴 암흑기를 보냈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절대로 안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휴즈 감독의 목표는 이번 시즌에도 최소한 잔류, 혹은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중위권까지 올라가면서 FA컵에서의 활약 정도. 그 이상을 노릴 만한 여력이 없다는 거지.’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는 다른 공기에 동민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곧 개막할 새 시즌에 대한 긴장,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에서 오는 약간의 불안,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겠다는 각오. 그 세 가지가 어우러져 그에게 작은 전율과도 같은 감정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 팀 훈련은 마무리를 짓겠다. 우리는 이번 이적시장에서 새로운 대형 선수를 영입한 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도 잃지 않았지. 지금 인원으로도 충분히 이번 시즌에서 우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니, 확실하게 정신 차리고 새 시즌을 맞이했으면 한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겠지?”

    휴즈 감독의 말은 모든 선수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선수들을 영입, 방출할 수 있는 여름 이적시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시장에서 베이포트 FC는 어떤 선수도 사고팔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인원으로도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휴즈 감독의 판단이었다.

    “모두 제대로 알아들었다니 다행이다. 그러면 오늘 훈련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말이 너무 길었군.”

    그 말을 마치고 휴즈 감독은 선수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동민은 그 광경을 보면서 곧 다가올 시즌에 대한 각오를 스스로 다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그를 부르는 휴즈 감독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동민? 듣고 있나요?”

    “아, 네. 죄송합니다.”

    뒤늦게 그의 말을 들은 동민이 급하게 대답하자 휴즈 감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한테 잔류와 강등을 걸고 싸우는 레이스가 처음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긴장할 수 있는 것도요. 하지만 난 지금까지 프리시즌 동안 당신이 잘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상대 팀에 대한 분석, 그리고 다른 코치들과 함께 전술적으로 날 도와주던 것도요. 그러니 너무 긴장할 필요 없이 지금처럼만 하면 됩니다. 알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동민의 대답에 휴즈 감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U18 팀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긴장감과 부담감에 혹시나 얼어버린 게 아닐지 걱정했지만 동민의 반응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프리시즌 초반에 정기 회의에 참여하라고 말한 탓인가, 다른 코치들과 부딪치게 하면서 단점을 고치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더 정신적으로 성장한 느낌인데. 볼든 구단주에게 들은 바로는 퍼스트 팀에 합류하라고 했을 때에도 부담감 때문인지 꽤 망설이던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내가 말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은 보이질 않는단 말이야.’

    그는 확실히 바뀐 동민의 모습에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 U18 감독이나 키드 수석 코치에게 들었던 것도, 자신이 직접 보았던 것도 모두 동민의 어딘가 불안한 심리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런 모습은 사라지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쉽게 바뀌면 꽤 기대하고 있던 입장에서는 반대로 맥이 빠지는걸. 물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답답하게 안 바뀌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만.’

    동민의 심적인 변화에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던 그였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기회들이 오가도 그런 변화를 고쳐주지 못하던 선수들이나 스태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하면 믿기 힘들 정도로 쉽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물론 동민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던 이유가 지금까지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과거의 그림자였고, 얼마 전에야 그 그림자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앨런 휴즈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결정인 정기 회의 합류로 동민이 빠르게 적응하며 변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행이군요. 다음 정기 회의까지 시즌 첫 경기 상대인 체스터필드 원더러즈에 대한 분석도 기대하겠습니다.”

    “네, 맡겨주십시오.”

    동민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시즌 첫 경기인 만큼 잘해야 하는데.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나머지가 잘되는 것처럼, 스포츠에서는 기세를 무시할 수 없으니…….”

    “강,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동민이 자료실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자 자료 담당인 샐리가 물어왔다. 한국말로 중얼거리고 있어서 전혀 알아듣지 못한 탓에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한국의 옛날 말 중에 첫 단추를 잘 꿰어야한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비슷한 뜻의 영어로 말하면 첫 발을 잘 떼야 한다, 정도예요. 시즌 첫 경기인 체스터필드와의 경기를 생각하다 보니 입에서 튀어나와서요.”

    동민은 궁금해 하는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평소에 자료들 때문에 그녀에게 신세를 많이 지는 그 인만큼, 별일 아닌 것이라도 설명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도 비슷한 말이 있나 보네요. 여기랑은 꽤나 다른 문화로 알고 있는데 비슷한 말이 있다니 놀랍네요.”

    “뭐, 어디든 시작이 중요하다는 점은 같을 테니까요.”

    두 사람은 그렇게 영어나 한국에 대해 잠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잡담을 멈춘 것은 샐리의 말이었다.

    “그나저나 당신도 참 대단하네요. 당신만큼 여기서 한꺼번에 많은 자료를 찾아서 보는 사람은 못 봤거든요.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자료들을 다 확인하고 본다는 게 감탄스러워요.”

    샐리의 칭찬에 동민은 귀를 붉히며 웃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걸 해야 하는 게 제 일인걸요. 그리고 지금은 프리시즌이라 상대 팀의 현재 전력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경기들을 보면서 분석해야 하니까요. 그래야만 휴즈 감독님에게도, 팀에게도 더 도움이 될 거고요.”

    프리시즌의 친선경기 상대들도, 이번 경기의 상대인 체스터필드 원더러즈도 그의 가장 큰 장점인 스테이터스를 볼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을 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동민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상들을 찾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대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면, 결국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팀들의 장단점이나 선수들의 정보를 알 수 있다면 조금씩 더 나아질 테고. 지금은 이 방법뿐이야.’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즌이 개막하면 그때부터 동민이 해야 할 일은 영상만 보면서 자료실과 자신의 방을 왕복하기보다는, 다음 상대 팀들의 경기를 찾아 나돌아다니는 것이 될 테니까.

    ‘스테이터스의 한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지금, 그리고 시즌 개막 이후도 조금씩 다르지만 언제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만 하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눈에는 벌써부터 시즌이 개막하고 다른 팀들과의 경기들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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