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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119/270)
  • 과거와 미래

    ‘진심으로 퍼스트 팀에 올라오길 잘했어.’

    경기가 끝나자마자 동민이 1 대 0 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전광판을 보면서 든 생각은 그 한가지였다. 자신의 말을 믿고 그것을 토대로 전술을 짜는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 선택까지. 휴즈 감독은 그의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프리시즌의 첫 경기에서부터 동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다.

    “그런데 저런 감독도 이곳에서는 강등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거지…….”

    그는 U18 팀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전에 있던 K2리그와는 다른 광경에 전율마저 느껴졌다. 챔피언십이라는 하부 리그마저도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로 최고의 선수들과 감독, 팀들이 있는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간다면 얼마나 더 치열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벌써 영국에 온 지 2년이 지나긴 했지만 진짜 새삼 놀라운데. 나는 이런 무대에 발을 들이는 거구나.’

    동민은 앞으로 이 무대에서 계속 해내갈 수 있다는 게 놀라운 동시에 너무나도 가슴이 뛰었다. 챔피언십도 이 정도라면, 만약 승격하게 된다면 갈 수 있는 프리미어리그는 더욱더 대단할 거라는 생각에 그는 주먹을 꼭 쥐었다.

    샘포드 시티와의 친선경기가 끝난 후, 또다시 휴즈 감독에게 호출당한 동민은 곧바로 그의 방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얼마 전 레이미 볼든 구단주의 방에서 퍼스트 팀에 합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비디오 분석관은 코치진들의 정기 회의에는 따로 참가하지 않고 감독님께 바로바로 보고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동민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휴즈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번 경기를 치르면서 당신의 리포트를 나 혼자 읽는 것보다는 다른 코치들도 듣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지난 경기에서도 당신 보고서를 바탕으로 나 혼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코치들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면 더 좋은 결과를 맺을 수도 있었을 거라 판단했어요. 특히 전반전에는 일방적으로 수비에만 집중했지만 그 수비에서도 곧바로 역습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더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고요.”

    그의 말은 간단했다. 동민에게 코치진들의 정기 회의에 앞으로는 출석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의는 매주 휴즈 감독을 비롯해 키드 수석 코치 등, 퍼스트 팀의 코치진들이 함께 모여 하는 것으로 본래 동민의 직책인 비디오 분석관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휴즈 감독의 의견은 동민이 회의에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참여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다지 내키지 않는 건가요? 분명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다만…….”

    휴즈 감독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리던 비디오 분석관이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동민에게는 매우 바라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까지 동민에게 부족한 것은 경험,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의견 교환이었다. 그것은 성남 페가수스에서 그의 실패를 만든 원인이었으며, 얼마 전까지 있던 U18 팀에서도 크게 고치지 못한 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코치진들의 정기 회의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채울 수 있는 기회였다.

    ‘휴즈 감독을 비롯해서 다른 경험 많은 코치진들을 보고 배울 수도 있고, 거기에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의견 교환에도 익숙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딱 하나 걸리는 건…….’

    당연히 좋다고 말하려 하는 그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은 하나였다. 지금껏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수연을 제외한 다른 코치들과는 결국 좋지 않은 관계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아직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머리 한구석에서는 말하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하면 앞으로 계속 극복하지 못할지도 몰라. 이런 기회를 지금 놓칠 수는 없어. 지금 이 부분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하다가는 내 꿈인 감독직은 영영 얻지 못할 거야.’

    감독이라는 자리는 결국 선수들, 코치들과 함께 해 나가는 자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상대를 분석하고 여러 전술들을 생각하더라도 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불안감과 이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참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다음 정기 회의는 모레니까 그때 보도록 하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동민의 반응을 미리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듯 휴즈 감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부터 동민이 승낙하도록 만들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동민이 알겠다며 자리를 떠난 이후, 휴즈 감독은 의자에 기대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제임스 이야기대로 다른 코치들과의 관계를 맺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건가.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군.”

    그의 말은 정확히 동민의 상태를 꿰뚫고 있었다. 동민을 부르기 전, 그는 이미 U18 팀의 감독인 제임스 워든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었고, 그를 통해서 동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제임스의 이야기로는 U18에 있던 시절에도 사람을 피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거기서도 주로 제임스에게 곧바로 보고하는 쪽이었지 다른 코치들과의 관계는 그리 깊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발 넓기로 유명한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도 자기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으면 같이 어울릴 일이 없었을 거라니, 원인이 어느 것이든 그에게는 아직 손볼 곳이 남아있다는 이야기군.’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동민의 단점을 파악하고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실력은 분명히 있는데 이런 쪽에서 모자라다, 라……. 고칠 보람이 있겠는걸. 고치고 나면 얼마나 화려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데.’

    지난 경기에서 동민이 가진, 상대 팀을 꿰뚫어 보는 듯한 분석에 놀랐다면 오늘은 반대로 의외의 약점을 발견한 것이다. 오랜 감독 경험을 가진 앨런 휴즈인 만큼 오히려 동민의 약점을 찾아내자 그에 대해 더 흥미가 생겼다. 그는 많은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단순히 괜찮은 장점 하나를 가진 선수들보다 여러 장단점이 뚜렷한 선수들일수록 그 단점들을 뛰어넘었을 때 더 좋은 선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선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잘나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지. 뚜렷한 단점을 가진 만큼 그 부분을 극복했을 때 강동민이 얼마나 더 발전할지… 어디 보자고.’

    동민은 알 리 없는 휴즈 감독의 웃음은 방 안에서 소리 없이 퍼져 나갔다.

    “어째 오늘따라 더 지친 느낌인데. 아이고, 어깨야.”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동민은 침대에 힘없이 엎어지며 말했다. 레이미 볼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영국에 오고 난 뒤 2년이 지났지만 바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영어 공부와 한국에서 라이선스를 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자격증 준비에 골머리를 썩여야 했고, U18 팀의 비디오 분석관으로 일하면서는 어린 유스 선수들의 성장을 보면서 병렬과 있던 때의 자신을 떠올리는 한편 다른 팀들을 분석해야 했다.

    그러나 요 근래 있던 일들은 그런 바쁜 동민의 생활 중에서도 특히 정신없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20일 전쯤만 해도 이제는 유스 팀에서의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2주 정도 되는 시간 만에 퍼스트 팀 합류에, 친선경기 상대 분석에 이젠 정기 미팅 참석인가. 진짜 익숙해진다고 생각하자마자 정신없이 흘러가는구나.’

    빠르게 바뀌는 생활에 피곤함을 느끼는 그였지만, 동시에 만족감 또한 느끼는 중이었다.

    ‘애초에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면 그날 최철민 씨한테 전화해서 볼든 구단주의 제안에 OK하지도 않았겠지. 내 주위가 변하는 만큼 내가 잘해나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작게 미소 지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녹아 있는 웃음이었다.

    “오늘은 메일이나 확인하고 빨리 자야겠네. 일단 저번 경기 분석부터 해서 가져가야 할 테고. 무엇보다 지난 경기에서 보였던 벤 로이터의 활용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두지 않으면…….”

    동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메일을 확인하던 그는 메일함에 있는 새 메일들을 보고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아, 감독님 답장도 왔었네. 하여간 답장 한 번 쓰시는 데 못해도 일주일은 걸리신다니까.”

    저번에 보냈던 동민의 메일이 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온 것이다. 웃는 얼굴로 메일들을 확인하며 반가운 소식들을 읽던 동민의 눈에 띈 것은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음? 수연 씨?”

    성남 페가수스를 떠나고 몇 번 연락은 오고 갔지만, 레이미 볼든을 따라 영국으로 가는 것이 결정 난 이후로는 정신없이 바빠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으로 오기 전에 메일 주소 정도는 남겼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생각지 못한 이름의 등장에 동민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메일을 클릭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일의 내용은 더욱 예상 밖의 일이었다.

    “지금 독일이라고? 내가 하려던 그 프로그램으로?”

    동민이 영국으로 떠난 이후, 그가 원래 목표로 하던 축구협회의 유학프로그램을 준비해서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성공했다는 것이다.

    ‘성남 페가수스에서 떠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는 했었지만… 잘 되어서 다행이네.’

    그녀는 괜찮다고, 오히려 고맙다고까지 말했지만 동민의 마음속에서는 그녀를 향한 죄책감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대가 이제는 또 다른 기회를 거머쥐고 날개를 편다는 생각에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오만함에 가까운 행동에 상황은 더 악화되었던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죄책감을 느꼈었는지 동민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에야 그 일부분이 조금이라도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잘됐네.”

    합격하고서 연락을 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그 고집 덕에 독일에 도착한 이제야 연락하게 됐다며 미안하다는 그녀의 메일 마지막 부분을 읽고는 동민은 아무 말 없이 인터넷 창을 닫았다. 그는 그렇게 컴퓨터를 끄고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지금껏 가슴속 일부분에 남아 쇠사슬처럼 그를 옥죄고 있던 것들이 천천히 하나, 또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잘됐어.”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사라진 듯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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