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익장
전반전이 벌써 3분의 2에 가깝게 흘러간 무렵, 스티븐 데이비스의 스트레스는 거의 한계점을 돌파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붙잡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그는 너무나 답답했다.
상대의 수비 방법은 경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 그가 아닌 다른 동료들을 마크하거나 패스를 받을 공간 자체를 줄여서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자신에게 슈팅 찬스를 내주는 한이 있어도 패스 루트만큼은 완벽하게 봉쇄하겠다는 상대의 태도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장점을 막아내는 동시에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행동에 패스가 아니라 직접 슈팅도 해보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0 대 0이라는 전광판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딱 한번이라도 상대 수비가 흔들린다면, 아니면 슈팅이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상대는 다른 강팀들을 상대로도 수비 라인을 내리면서 방어에 치중하면 답답할 정도로 견고하게 수비진을 구축하는 베이포트 FC다. 그만큼 처음부터 마음먹고 방어에 치중한다면 패스 루트를 잡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짜증은 상대 수비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했다.
‘하, 아까 내가 직접 넣었어야 했는데.’
그가 공을 잡고 만들어낸 몇 번의 기회 속에서 나온 결과는 허무하게 상대 수비에 끊어지는 크로스, 그리고 극도의 긴장 속에서 빗나가 골키퍼 품속으로 굴러가는 슈팅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 남아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을 키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다음번에는 더 나을 거라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반복되는 결과는 그의 한숨의 크기만 키워갈 뿐이었다.
결국 양 팀 모두 득점 한 번도 없이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그는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이를 갈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먹히는데.’
앨런 휴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동민의 보고서를 보고 전반전 동안 시험 가동했던 스티븐 데이비스에 대한 수비가 성공적으로 그를 막아낸 것이다. 공은 갖게 하되, 동료들에게 골 찬스를 만드는 일만은 집요하게 막아내는 방법은 말 그대로 그를 말라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번 시즌에 주로 교체 투입으로 나온 상대에 대한 분석이 이 정도까지라… 내 생각 이상일지도 모르겠군.”
스티븐 데이비스는, 그가 기억하기로는 지난 시즌 베이포트 FC와의 경기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에서도 선발로 출전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벤치에서 시작해서 경기 중간쯤 공격의 유형과 템포를 바꾸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그런 선수에게까지 시선을 넓히고 분석을 했던 것이다.
‘본래 예상은 U18 팀에서 하던 것에 비해서는 모자라겠지만 어느 정도 장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첫 경기부터 이러면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즌을 앞두고 선수들의 컨디션이나 전술 실험이라는 측면에서도 분명 만족스럽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강동민이라고 하는 존재의 발견이 더욱 그를 미소 짓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후반전에는 수비가 아닌 공격 쪽에서 변화를 가져가 볼까, 아니면 상대 공격을 막아내면서 우직하게 공격을 받아쳐야 하나.’
휴즈 감독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후반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반전은 일부러 상대가 공격에 무게를 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게중심을 아래쪽으로 둔 경기였어. 충분히 여러 가지 찬스를 더 만들어낼 수 있는 스티븐 데이비스를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면 후반에는 어찌 되려나.’
심판의 휘슬 소리가 그라운드에 들린 직후, 동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휴즈 감독이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는 듯 상대 공격의 세세함을 맡고 있는 스티븐 데이비스를 무력화시켰지만, 아직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수비적인 부분에 신경을 쓴 만큼 후반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해나갈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 하는 일은 상대 팀의 장단점과 선수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지 그 것들을 부술 해결책 자체를 확실히 짜는 것은 아니었다. 능력을 이용한 분석의 디테일은 그의 자랑거리이자 휴즈 감독이 그에게 바라는 점이었지만, 그것을 이용해 직접 전술을 짜는 것은 감독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는 위치상 코치 회의 자체에는 참여할 수 없으니까 미리 전술을 뚜렷하게 알 수도 없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휴즈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전술을 짜내는지 보고, 그걸 바탕으로 다음번 경기에서 상대 팀의 어떤 면을 더 이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거니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지만, 예전 성남 페가수스 시절에 느꼈던 답답함이나 무력감, 조급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차근차근 밟아나가다 보면 어느새 선수들을 직접 이끈다는 자신의 꿈이 이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믿음과 참을성이라는 무기를 가진 동민은 그렇게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응?”
그리고 몇 분 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나온 베이포트 FC의 선수 교체였다.
‘여기서 공격진 교체라고? 생각보다 이른데.’
그가 보고서에서 특별히 강조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상대의 공격 패턴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스티븐 데이비스라는 카드에 대한 주의 점이었고,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상대 수비의 단점이었다.
‘저쪽이 스티븐 데이비스라는 공격의 전환점을 쓰기 전에는 우리랑 똑같은 킥 앤 러시를 바탕으로 하는 역습 축구인 걸 감안한다면… 뚫을 수 있는 방법도 분명히 있겠지.’
동민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그의 눈은 그라운드에 조금 전 투입된 교체 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벤 로이터]
36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4.2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4.2 / 20
선호하는 플레이: 중거리 슛 선호, 부드러운 터치
특성:
장점 - 캐논 슈터, 절묘한 위치 선정
단점 - 부정확한 태클, 느린 발, 노령화
현재 컨디션: 7/10
‘로날드 조던의 파트너인 에딘 페트로비치랑 교체해서 나온 게 저 벤 로이터란 말이지… 정확히 무슨 생각이지?’
베이포트FC의 주전 투 톱 중 하나이면서 오늘도 선발 출전했던 에딘 페트로비치가 나가고, 벤 로이터가 들어온 것을 보며 동민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에딘 페트로비치가 큰 키와 뛰어난 점프력을 바탕으로 공중볼을 장악하고 조던에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벤 로이터는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였다.
‘내가 본 상대 수비의 약점은 갑작스러운 공격 방향 전환에 약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면 발 빠른 공격수들의 침투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는데… 측면 자원도 최전방 공격수도 아니고, 심지어 발까지 느린 벤 로이터를 지금 교체 투입한 이유가 뭐지? 수비를 위한 선택이라고 하기엔 태클이 좋지 않아서 머릿수 채우기밖에 안 될 텐데.’
동민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휴즈 감독의 교체 카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빠른 공격 방향 전환은 해리 맥스웰이, 침투를 맡을 발 빠른 공격수의 역할은 로날드 조던이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제공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를 투입한 이유를 동민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그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혼잣말을 해 보았지만 어디서도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로이터, 네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해라.’
벤 로이터는 교체 전에 휴즈 감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난 시즌,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자유 계약으로 베이포트 FC에 왔지만 노령화로 인한 체력과 기량의 저하로 벤치에도 앉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던 그다. 또한 그런 것은 그 또한 각오했던 일로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은퇴를 생각하며 어린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주로 하던 그였지만, 오늘은 휴즈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오랜만에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늙은이한테 마지막까지 바라는 게 큰데.’
휴즈 감독이 팀 공격의 새로운 루트를 노릴 수 있다며 이번 시즌에서 그를 쓰게 될 일이 늘 것이라 말한 것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오는 그였다. 그러나 한숨을 쉬면서도 그의 가슴은 오랜만에 크게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잘해야 한다 이거지… 나 참.”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로이터가 생각한대로 잘 움직여 줄 것인가.’
휴즈 감독은 그런 벤 로이터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일 오늘 경기에서 벤 로이터가 자신의 생각만큼 괜찮은 활약을 펼쳐준다면, 다음 시즌 베이포트 FC와 휴즈 감독은 또 다른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디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욕심을 담아 작게 읊조렸다.
동민이 휴즈 감독의 바람이 무엇인지 명확히 깨달은 것은 후반 27분이 되어서였다. 벤 로이터의 중거리 슛이 샘포드 시티의 골 망을 찢어버릴 듯 뒤흔든 것이다. 36세라는 노장이 만들어낸 멋들어진 선제골에 관중들은 열광했고, 벤 로이터는 그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듯 크게 포효를 터뜨렸다.
“…저거였나.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발이 빠른 것도, 공격 전환에 큰 장점을 가진 것도 아닌 벤 로이터를 쓴 이유가 저거였어.”
그 광경을 보면서 내뱉는 동민의 말에는 감탄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감탄은 단순히 벤 로이터의 노익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골에 담겨 있는 휴즈 감독의 계략과 전술에 동민은 감탄하고 있었다.
‘상대 수비진의 약점인 발 빠른 공격수의 침투나 급작스러운 방향 전환의 경우는 나보다도 샘포드 시티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겠지. 휴즈 감독은 그 점을 노린 거야.’
로날드 조던이라는 발 빠른 공격수가 계속해서 위아래로 오가면서 수비들의 집중력을 시험하고, 해리 맥스웰의 롱패스로 상대의 눈을 돌릴수록 샘포드 시티는 스스로 자신들의 약점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그들의 수비는 뒤쪽으로 경직되어 뒤로 빠지게 되었고 이는 전방에 공간을 만들었다.
‘슈팅에 자신 있는 벤 로이터가 직접 중거리 슈팅을 때릴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 약점들을 찌르는 척 이용한 거야!’
휴즈 감독이 만들어낸 모습을 이제야 그는 이해하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경험 많은 감독과 경험 많은 선수, 두 명의 마법 같은 합작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