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기회
“예? 당장 다음 주부터요? 농담이죠?”
동민은 방금 들은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질문에 구단주인 레이미 볼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미 퍼스트 팀의 앨런 휴즈 감독이나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에게도 말했어요. 동민, 당신은 다음 주부터는 퍼스트 팀의 비디오 분석관으로 일하게 될 겁니다. 당신에게 영국으로 오지 않겠냐고 권유할 때부터 말했잖아요, 당신이 준비가 되면 퍼스트 팀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요. 최근 당신이 퍼스트 팀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은 것을 보고 휴즈 감독은 당신이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동민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기쁨을 느꼈지만, 동시에 일말의 불안감도 함께 느꼈다.
‘그래서 요즘 퍼스트 팀에 대한 일들이 늘어났던 거였나. 그런데 어쩌면…….’
동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2년이 지난 일인 성남 페가수스에서의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단장이었던 정광호의 계획으로 팀에 합류했던 그와 수연, 그리고 그런 그들을 무시했던 주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휴즈 감독이 동의했다고는 하지만 만약 그게 구단주인 볼든 씨의 말에 억지로 동의했던 거라면… 나는 여기서 또다시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 분석관이었던 때의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닐까?’
성남 페가수스에서의 일들은 지금 그에게는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되는 일로 느껴졌다. 주안의 아집과 텃세를 제외하더라도 당시의 그 또한 문제를 만드는 일들을 했던 것을 이제는 아는 만큼, 그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동민의 표정을 읽은 듯 레이미 볼든은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옅게 하고는 물어왔다.
“마냥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닌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그게… 구단주님의 말씀은 정말로 감사하고 저에게 큰 기회지만… 혹시나 다른 퍼스트 팀 스태프들에게 나쁜 영향이라거나 그런 걸 끼치는 상황이라면…….”
동민은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만약 이번 일이 퍼스트 팀의 동의를 크게 얻지 못했다면, 유스 팀에서 더욱 경험을 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레이미 볼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웃었다.
“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혹시 퍼스트 팀에 합류하는 것이 환영받지 못할 일일까 봐 걱정한다는 이야기죠?”
“따지자면 그런…….”
“그렇다면 걱정 말아요. 이번 일은 휴즈 감독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니까요.”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에 동민의 눈이 두 번째로 크게 떠졌다. 구단주인 레이미 볼든의 권유가 아니라 앨런 휴즈 감독의 요청이 먼저 들어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요, 당신이 퍼스트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나에게 요청하더군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아니면 그 외에 다른 문제라도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었나요?”
레이미 볼든과의 대화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지나가다가 만난 키드 수석 코치에게 그 소식을 말하자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예? 뭘요?”
“며칠 전, 감독님과 당신을 퍼스트 팀으로 데려오자고 결정한 직후라서 그걸 알려주려고 부른 거였거든요.”
동민은 며칠 전 갑자기 맥주를 마시자며 자신을 불렀던 키드 수석 코치의 전화를 기억했다. 그저 평소처럼 술이나 마시자며 자신을 부른 게 아닐까 했던 연락이 그런 뜻이었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오늘 구단주님한테 처음 들었는데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어쨌든 다음 주부터는 같이 퍼스트 팀에서 일하겠네요. 자세한 건 감독님이 말하겠지만 아마 상대 팀이나 퍼스트 팀 선수들에 대한 평가를 주로 맡기실 것 같던데, 어쨌든 강,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동민은 그의 말에 드디어 자신의 꿈이 날개를 편다며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동민의 기대를 타고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동민은 휴즈 감독의 방 앞에 서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들어와요.”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들어서자, 베이포트 FC의 감독인 앨런 휴즈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백발과 주름진 얼굴,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몸은 동민에게 그의 앞에 있는 인물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거친 감독인지 알려주는 듯했다.
“어서 와요. 이미 들었겠지만, 오늘부터는 퍼스트 팀에서 나를 도와줬으면 합니다. 맡아줬으면 하는 일은 지금까지 U18 팀에서 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당신의 장점이 뭔지는 이미 U18 감독인 제임스나 키드 수석 코치에게 많이 듣기도 하고, 나 또한 눈여겨 봐왔으니까요.”
휴즈 감독은 낮게, 그러나 확신을 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동민은 가슴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불안의 흔적까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감독이 먼저 자신을 원했다는 볼든 구단주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 상대 팀, 혹은 제가 지정하는 팀에 대한 경기를 보고 분석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상대 팀에 대한 분석을 하고 대응책을 짜는 게 제 일이지만 저는 그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고, 그 일의 적임자가 당신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의 말은 지금껏 성남 페가수스에서의 실패했던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던 동민에게 힘을 주었다.
“…예, 신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민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감사를 담아 대답했다. 그런 그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휴즈 감독은 이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다음 시즌에서 적어도 잔류 이상의 성적을 거두려면, 당신이 U18 팀에서 해줬던 것처럼 상대 팀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곧 있을 샘포드 시티죠. 시즌이 시작되면 만날 상대에기도 하니 프리시즌 친선전이라고 해도 확실하게 알아봐야 합니다. 자료는 샐리에게 미리 부탁해 뒀으니 가서 이야기하고 받으면 될 거예요.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정확한 분석을 기대하겠습니다. 선수들에 대한 당신의 소개는 모레 있을 팀 훈련에서 할 테니 걱정 말길 바랍니다.”
휴즈 감독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모두 끝났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 직후, 침묵이 이어졌지만 자신이 해야 할 말 외에는 본래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휴즈 감독을 아는 이상 동민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나가려는 찰나, 휴즈 감독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기회를 주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게 만든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당신이 정식적으로 합류하고 나서 U18 팀의 성적은 급속도로 좋아졌고, 제임스나 키드 수석 코치가 당신에게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결국 당신이 스스로 기회를 만든 겁니다.”
그 말에 동민은 아무 말 없이 수긍하며 방 밖을 나섰다. 그리고 자료 담당인 샐리에게 샘포드 시티의 자료들을 받아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올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료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자 이제야 아까 전 휴즈 감독이 한 말이 뒤늦게 고막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내가 스스로 만들었다, 라…….’
동민은 멍하니 그가 했던 말을 읊조렸다. 자신이 한 일마저 인정하지 않고 모두 빼앗아 갔던 주안의 모습이 조금 전 휴즈 감독의 모습과 겹쳐지고, 사라졌다.
‘만약 성남에서도 저런 감독을 만났다면 나는 여기로 오지 않았으려나.’
동민은 그렇게 2년이 지나서야 그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남아 있던, 주안과 자신 사이에 있던 불화의 그림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좋아, 이제 이 샘포드 시티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봐야지. 그게 내가 받은 신뢰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하니까.”
머릿속을 괴롭히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동민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샘포드 시티도 그렇지만 일단 퍼스트 팀에 대한 것부터 확실하게 정리해 놔야 해. 내가 아무리 중간 중간 분석 때문에 보고 있었다지만, 역시 내가 있던 U18 팀과는 경기력이나 전술 자체도 많이 다르니까. 그래야 상대의 장단점 중에서도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치명적인지 분별할 수 있겠지.’
동민은 품에서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수첩을 꺼내고 동시에 샘포드 시티의 경기 영상이 아닌, 지난 시즌 베이포트 FC의 경기 영상을 클릭했다.
‘퍼스트 팀의 경기부터 빠르게 훑고 나서 샘포드 시티 경기 영상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화면 내에서 움직이는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민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꽤 어두워진 밖을 보면서 동민은 피곤한 눈을 비볐다. 몇 시간째 쉬지도 않고 영상을 보면서 선수들의 스테이터스를 떠올리고, 수첩에 정리를 하느라 지친 탓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소득은 있었어. 선수들의 경기를 직접 보고 나서야 어떤 방식이 더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조금 전까지 확인한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휴즈 감독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선수비 후 역습, 수비 라인을 내려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빠른 롱패스로 상대의 뒤를 노리는 카운터 어택을 쓴다. 어떻게 보면 예전 전주 드래곤즈의 손홍진 감독이 쓰던 전술과 비슷해. 그리고 그 전술의 핵심이 되는 선수는 세 명.’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예전에 보았던 그들의 스테이터스가 떠올랐다.
[조나단 케인]
28세
잘 쓰는 발: 오른발
성장 가능성 15.5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5.2 / 20
선호하는 플레이: 슬라이딩 태클 선호, 몸싸움 선호
특성:
장점 - 강철 몸, 정확한 태클
단점 - 느린 발
현재 컨디션: 6/10
[해리 맥스웰]
25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5.8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4.9 / 20
선호하는 플레이: 공을 잡고 템포를 조절, 롱 패스 선호
특성 :
장점 - 절묘한 위치 선정, 빠른 발
단점 - 제공권 장악 불가
현재 컨디션: 7/10
[로날드 조던]
29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5.2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5.1 / 20
선호하는 플레이: 수비의 틈 사이로 침투
특성 :
장점 - 골게터, 빠른 발
단점 - 아둔함
현재 컨디션: 7/10
동민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들의 스테이터스는 그들의 역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케인이 상대의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서 맥스웰에게 넘기면, 맥스웰은 상대 수비 뒤쪽으로 공을 보내서 조던이 골을 노린다. 정말 말 그대로 킥 앤 러시지.’
한때 영국 축구를 대표하는 말이기도 했던 킥 앤 러시, 즉 롱패스를 이용한 빠른 역습을 표방하는 것이 바로 휴즈 감독의 전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걸 바탕으로 상대인 샘포드 시티를 어떻게 하느냐구나.’
동민은 드디어 첫 번째 과제를 끝냈다는 듯 피곤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의 눈만큼은 조금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