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바뀌는 것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흰색과 붉은색, 두 가지 색상의 유니폼을 입은 스물두 명의 선수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김현수 넌 밑으로 더 내려와야 할 것 아냐! 올라가서 언제까지 헤매고 있을 건데! 네 자리 몰라?! 오버래핑을 갔으면 복귀를 해야지 상대 진영에서 텐트치고 잘 거냐! 주장 달았는데도 정신 제대로 못 차리냐!”
성난 목소리가 흰 유니폼 선수들의 고막을 강타했다. 이름을 불린 선수는 허둥지둥 자신의 위치인 우측 수비로 복귀하고 있었다.
‘저놈은 안 그래도 오버래핑만 갔다 하면 복귀가 하루 종일 걸리는데 오늘은 특히나 더 심각하구먼. 하이고야. 주장 완장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 건가.’
병렬은 그런 현수를 보면서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정확한 크로스를 바탕으로 하는 공격력이 뛰어난 것은 분명 그의 최대 장점 중 하나였지만, 이런 식으로 수비 가담이 늦는 것은 팀에 한 가지 장점을 안겨주고 두 가지 이상의 위협을 초래하는 꼴이었다.
‘전반전이 끝나는 대로 빠르게 교체를 생각해 봐야 하나. 진짜 경기력이 말이 아닌데. 아무리 주장이고 공격적으로 괜찮은 옵션을 준다지만 오히려 오늘은 주장이라는 부담감에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을 못하는 데, 저놈을 어째야 할지…….’
병렬은 차가운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부터 경기 분위기에 따라 자주 흔들리는 현수인 만큼 올해부터 주장을 맡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 그였지만, 적어도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의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병렬은 현수의 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김현수를 빼면 저 자리는……. 하여간 주장을 달고도 교체를 고려해야 하는 경기력이라니… 아,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
현수를 바라보던 그는 몇 년 전 비슷한 일이 있던 것을 기억했다. 당시 주장이었던 이차주의 심각한 부진으로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교체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병렬이었다. 그러나 그때 있었던 동민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교체하지 않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그놈은 요즘 또 바빠졌다고 메일 한 번이 없다니까. 하여간 제자라는 놈들이 죄다 자기 일에 정신이 없지. 나 참.’
잠시 그리운 기억에 빠져 있던 병렬은 곧 들려오는 휘슬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곧 결정을 내렸다.
‘하, 진짜 미치겠네.’
현수는 전반전을 끝내는 심판의 휘슬을 듣고 벤치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전반전 경기력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주장이라는 생각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탓인지 그가 올린 크로스는 저 멀리 붕 뜨기 일쑤였고, 상대 윙을 압박하기 위해 올라가면 허무하게 뚫리는 모습만 되풀이했다. 게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쓴 나머지 공격 가담 후 수비 복귀마저 평소보다 늦어 병렬의 노성을 들을 정도였다.
‘이거 100퍼센트 교체당하겠지. 감독님 성격상 교체 안 하고 넘어가실 리가 없어. 주장 자리 물려받고 첫 공식 경기 시작하자마자 이게 무슨 꼴이람. 경채 선배가 봤으면 정신 안 차리고 뭐하냐고 욕 한바가지는 하겠네…….’
그는 이미 자신이 교체당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경기를 펼친 것은 현성고등학교 축구부에서 뛰기 시작한 후 처음, 아니, 태어나서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전반전에 보인 그의 모습은 재앙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주장이라는 생각에 너무 들뜬 탓이야. 그래서 더 오버해서 실수만 저질렀고, 그 탓에 오히려 정신을 빼앗겨 평소에도 안 보일 모습만 한가득이었지. 이제 감독님이 뭐라고 하실까. 너 같은 놈한테 주장 완장을 맡긴 자기 판단이 잘못된 거라고 하실까? 아니면 주장이고 뭐고 실수라고 다시 생각하겠다고 하시는 건 아닐까?’
스탠드로 향하는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회오리치며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주장 완장을 내놓는 것을 넘어서 벤치 멤버로 격하당하는 것까지 떠올릴 무렵, 그는 어느새 스탠드 앞에 서 있었다.
“다 모였지?”
알면서도 확인하는 병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일단 전반전 보는 내내 너희들 플레이가 이해가 안 갔다. 임종현 너는 네 자리를 두고 왜 계속 좌측으로 빠지려고 난리를 치고 있냐? 상대 미드필더한테 중앙 내주고 측면으로 도망갈 거면 네가 왜 그 자리에 있어?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란 말이야. 네가 고작 저런 놈들도 못 제치는 놈이었냐?”
그렇게 입을 열기 시작한 병렬은 곧바로 선수 한 명 한 명의 움직임과 경기력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에게는 익숙해진 병렬의 노성에 그들은 전반전에 있었던 자신의 플레이를 다시 머릿속으로 그리며 후반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팀원들을 차례로 돌던 병렬의 눈이 드디어 현수에게 닿았을 때, 현수는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일단 잘못했다고 빌까, 아니면 주장 직은 내려놓을 테니 벤치로 내리지만 말아달라고 할까? 다음 경기부터는 정말 이 악물고 확실하게 한다고 하면 믿어주실까?’
당황과 혼란에 그의 머리가 과부하로 오작동을 일으킬 무렵, 병렬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현수 너는…….”
그 말을 들은 현수가 침을 삼키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르려던 사이, 병렬은 말했다.
“너는 일단 어깨 힘부터 빼라. 주장 첫 경기라고 그렇게 붕 떠서 허둥댈 거면 가서 졸업한 김경채 데려오든가. 난 너보고 그러라고 그 완장 달게 한 게 아니다. 네가 다른 애들 허둥대고 하면 그거 잡아주고 침착하라고 준 거지.”
“…네.”
병렬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차가웠다. 자신의 뱃속까지 얼려버리는 듯한 그의 말에 현수는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서 저울질하던 말들을 모두 잊고 힘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 말로 적어도 그의 오늘 경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리라. 앞으로도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후반전에는 그런 부담감 생각하지 말고 정신줄 꼭 잡고 뛰어라. 또 정신 줄 놓고 허둥지둥 거리는지 아닌지 후반전에 더 지켜볼 거다. 알았어?”
“네… 네?”
갑자기 생각한 것과는 다른 그의 말에 현수는 놀란 토끼 눈으로 그에게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후반전에 지켜본다는, 방금 그가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지경이었다.
“알았냐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현수는 반쯤 정신이 나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회오리는 어느새 다 날아가고 없었다.
‘동민이 그놈의 방식이 이번에도 효과적일 줄이야. 우연의 일치인가.’
경기가 끝나고 병렬은 집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조금 전 끝난 장수고등학교와의 경기는 철저히 말렸던 전반전과는 다르게, 압도적인 경기력의 현성고등학교의 승리로 끝났다. 특히 주장인 김현수는 전반전과는 다른 선수처럼 움직이며 자신의 특기인 공격력을 마음껏 뽐낸 것이다.
과거 한수고와의 경기와 너무나도 비슷하게 흘러간 경기 내용에 병렬은 복잡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동민이 그놈이 이젠 스승인 나까지 바꾸려고 하는 건지. 떨어져도 신기한 놈이라니까.’
본래 병렬의 스타일대로라면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교체하면서 현수에게 자기반성의 계기를 마련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과거 이차주의 경험과 동민의 기억이 만든 그의 흔치않은 변덕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유럽으로 떠난 지 2년이나 지난 상황에서도 영향을 끼쳤다면서 그는 혼자서 웃었다.
‘생각난 김에 동민이 그놈한테 메일이라도 왔는지 볼까.’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켠 그는 이내 반가운 웃음으로 얼굴을 가득 채웠다.
‘오늘따라 이놈 생각이 났던 게 메일이 와 있어서 그랬던 건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마우스를 움직여 동민의 메일을 더블클릭했다.
감독님, 잘 지내시죠? 요즘 정신이 없이 바빠서 메일이 너무 오랜만이네요.
저는 일단 잘 지내고 있어요. 저번에 UEFA A 라이센스의 첫 번째 파트를 끝냈다고 연락드린 이후 처음 인 것 같은데 사실 지금도 그때랑 하는 일은 큰 차이가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선수들에 대한 리포트를 쓰거나, 아니면 훈련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하고 그렇죠.
가끔은 제가 있는 U18, 그러니까 유스 팀 말고 퍼스트 팀 훈련도 가는데 갈 때마다 저번에 말씀드린 키드 수석 코치 때문에 머리가 좀 아프네요.
그 감독님이랑 비슷한데 옆으로 늘어났다는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은 말할 때마다 스코틀랜드 너무 억양이 강해서 반쯤 못 알아듣거든요. 영어학원에서 사투리 억양을 알려주진 않았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요즘엔 그나마 예전보단 알아듣고 있어요. 제가 뭔가 마음에 드는지 자꾸 이야기를 걸어오긴 하는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병렬에게 보낼 메일을 쓰던 동민의 손이 잠시 멈췄다.
“뭐지? 이 시간에 갑자기 전화가 올 일이 없는데. 내일은 따로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동민은 쓰고 있던 메일을 멈추고 전화기를 들었다.
“네, 강동민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는 익숙해진 영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전화를 받자, 수화기에서 근래에 많이 들어본 목소리와 억양이 흘러나왔다.
“오, 강.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아, 브라운 코치님. 지금 그냥 쉬던 중이었는데…….”
들을 때마다 헷갈리는 스코틀랜드 억양은 전화를 건 사람이 조금 전 그가 병렬에게 하소연했던 베이포트 FC의 수석 코치인 브라운 키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한가하면 나올래요? 펍에서 맥주나 한잔하려는데.”
그 말을 듣자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동민이 마음에 들었는지 UEFA A라이센스의 1차 코스를 밟은 이후부터 유난히 동민을 부르는 일이 잦았다.
“어… 잠시만요.”
동민은 그렇게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많은 경험을 1군 수석 코치와의 술자리냐, 아니면 집에서 얌전히 쉬면서 병렬에게 메일을 보내고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하느냐. 아주 잠깐 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그의 선택은 정해졌다.
“예, 어디로 가면 되죠? 저번의 거기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나갈게요.”
동민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메일이야 다녀와서 보내거나 안 되면 내일 보내면 되니까, 뭐. 알아듣기 힘들긴 해도 키드 코치랑 이야기하면서 배울 수 있는 건 많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설 채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그가 술자리에서 돌아와 병렬에게 다시 메일은 보낸 시간은 이미 그의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