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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에 해야 하는 것 (114/270)
  • 떠나기 전에 해야 하는 것

    “그래서, 결국 수락한 거냐?”

    병렬의 질문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걸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거든요.”

    동민의 목소리는 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보여주는 듯 쉬어 있었다.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는 병렬을 보면서 그는 말을 덧붙였다.

    “단순히 외국에서 배울 기회를 얻는다거나 일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넘어서 왠지 모르게 꼭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원래 생각하던 것처럼 협회 프로그램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길이잖아요. 죄송합니다, 프로그램에 대해서나 부모님한테 이야기할 때 도움 많이 주셨는데 이쪽으로 결정해서…….”

    동민은 무안한 듯 말을 흐렸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앞으로 있을 기회와 시간들을 그리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나한테 이야기하기 전에도 이미 마음이 굳어 있던 것 같더니 어쨌든 결정해서 다행이구만.”

    그런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병렬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국내에서 커가는 동민의 모습이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이 더 큰 곳에서의 기회라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다만 프로그램이 아닌 다른 방법이 생겨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 말고 이 녀석의 잠재력을 봐주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지만 이런 형태일 줄이야.’

    외국 구단의 구단주가 동민이 일하던 구단의 경기를 보았다는 우연, 그리고 그 경기에서 동민이 확실하게 그의 눈도장을 받을 정도의 능력을 보였다는 사실, 그 두 가지가 함께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에 그는 놀라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내가 갈 곳을 보여주고 도와줘야 할 수동적인 녀석이 아니다. 자기가 길을 찾거나 아니면 길이 자기 앞에 나타나게 만드는 녀석이지. 내가 해야 하는 건 이 녀석이 알아서 길을 찾는 것을 바라보는 거지. 그게 아니면 길을 걷다가 와서 도와달라는 말에나 움직이면 되는 거고.’

    병렬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부모님한테 말씀드린 거 맞지? 저번에도 너희 부모님이랑 전화하면서 진땀 뺐는데 이번에도 그러고 싶진 않다.”

    “아, 당연히 그쪽에 대답하기 전에 말씀드렸죠! 저번에는 예상에 없던 일이라 당황하는 바람에…….”

    아픈 곳을 찔러오는 병렬의 말에 동민은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지난번에 부모님과 이야기하면서 병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그 또한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다시 반복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럼 됐다. 그래서 언제쯤 출발하는 거냐?”

    병렬은 당황하는 동민의 모습을 보면서 씩 웃고는 곧바로 대화 내용을 바꾸었다. 그 말에 동민은 당황하던 표정을 다시 기대로 채우며 답했다.

    “일단 필요한 게 비자인데, 비자를 받으려면 결국 영어가 먼저여서 빠르게 가도 내년 여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한동안은 영어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영어 늘리는 게 최우선이 될 것 같아요.”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놈이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구먼. 그래도 어차피 벼락치기처럼 몰아서 공부하는 게 네 특기 아니었냐?”

    동민의 기대 섞인 불평에 병렬은 웃으며 말했다. 동민이 부상으로 선수를 그만두고 나서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도 대학에는 합격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병렬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하하, 그만큼 힘내봐야죠. 가서도 영어 공부는 계속 필요하겠지만 일단 최소한 그쪽 수업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요.”

    동민은 그를 놀리듯 말하는 병렬의 말에도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쫓긴다고 해도 지금 주어진 기회 자체가 그에게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행복이었다.

    병렬은 그런 동민의 표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눈앞의 제자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도, 닿을 필요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병렬과의 이야기 후, 동민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성남 페가수스에서 일하면서 모았던 급료로 영어 학원을 다녔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고민도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유럽에 간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야. 레이미 볼든이 나에 대해서 높게 평가한 것은 그 바탕에 내 능력이 있기 때문이야. 내가 더 넓은 무대에서도 통하려면 능력을 더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해.’

    동민은 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유럽 무대에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지만, 가서 원하는 대로 성장하려면 능력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그가 성남 페가수스에서 팀을 가까이에서 보거나 직접 전술을 짜면서 느낀 것은,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점이다.

    ‘먼저 눈에 보이는 스테이터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 스테이터스가 신체적인 부분에만 집중해서 보여주는 건지, 컨디션이나 스테이터스가 높아도 터무니없이 안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안양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의 강만엽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스테이터스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았고 컨디션도 그리 낮지 않았지만, 그 경기에서 그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동민은 그 이유 또한 확신을 하지 못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심리적인 부분이겠지. 심리적으로 흔들린다면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볼 수 있는 스테이터스에 심리적인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부분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해.’

    스포츠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든 행동에서 신체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수치화하고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닌, 심리적인 쪽은 그의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또 한 가지 의문점은 포인트였다.

    선수들의 능력을 수치화하여 볼 수 있는 스테이터스와 순간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을 바꾸거나 특성을 없앨 수 있는 포인트는 그의 능력의 두 다리와도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포인트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많지 않았다.

    첫 번째, 감독으로서 경기를 이끌고 그 경기를 승리할 경우, 상대 팀과의 비교로 1점에서 3점을 획득한다. 성남 페가수스에서처럼 그가 전술을 짜고 그대로 감독이 행해도 그의 포인트는 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 포인트로 할 수 있는 일은 선수들의 컨디션을 올리거나, 혹은 선수들에게 맞지 않는 특성을 지우는 것이 있다.

    세 번째, 포인트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선수에 따라서 다른 행동들을 취해야 하는 듯하다.

    ‘이 세 가지가 지금까지 이 포인트제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인데… 처음에는 컨디션을 올리는 것만 있었지만 특성을 지우는 것도 예상한 대로 나중에 나오던 것을 보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을지도 몰라. 게다가 선수에 따라서 다른 행동들이라지만 표본이 너무 적어.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스테이터스로 볼 수 없는 심리적인 부분과 포인트로 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의문, 이 두 가지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가장 큰 미스터리였다.

    “이걸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유럽에서도 충분히 먹힐 것 같은데…….”

    동민은 혼잣말을 하느라 조금 전 자신이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무려 다섯 정거장이나 지난 뒤였다.

    “…오랜만에 보더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즘 많이 피곤해? 아니면 몇 잔 마시더니 금방 취했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내 말은…….”

    경태의 어이없는 눈빛에 동민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며 부정하려 할 때, 종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대답을 자르고 귀에 꽂혀왔다.

    “머리에 무슨 병 있냐?”

    “아니, 이 인간들이 진짜!”

    연달아서 자신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두 명에게 동민은 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동민이 영어 공부에 매진하게 된 이후로 바빠서 보지 못했던 그들은, 어느새 다가온 새해를 보며 송년회를 겸해 만난 것이다.

    “아니, 네가 한 말이 그렇잖아. 진지하게 이야기 시작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어떻게 하면 사람의 심리를 눈으로 보듯이 알 수 있을까?’ 하면 이놈이 무슨 일이 있구나, 하지.”

    요즘 한동안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동민은 그들을 만난 김에 혹시나 예전처럼 생각지 못한 해결책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운을 떼본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경태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동민은 자신이 이야기를 완전히 잘못 꺼냈다며 말을 정정하려 했지만 폭탄처럼 떨어지는 종환의 다음 말이 또다시 그를 가로막았다.

    “딱 보니까 그거네. 여자랑 연락하는데 네가 어장관리 당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 아냐. 그냥 딱 까놓고 말하면 되는 걸 뭔 시인도 아니고 빙빙 돌려서 말하기는.”

    “아, 그거야? 야, 연애 중이라고 날카로운 거 봐. 동민이 이거, 그때 같이 코치하던 그 여자랑 만나는구먼. 내 말 맞지?”

    “아니, 그게 무슨…….”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흘러가는 대화에 동민은 황당해하면서 항의했지만 그의 항의는 이번에는 경태의 푸념에 휩쓸렸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연애에 빠져서 하여간! 열받으니까 술이나 마셔야지, 에라이!”

    결국 동민이 소주를 들이부으려는 경태를 말리고 이야기를 정정한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러니까 저번 팀에서처럼 그런 일이 안 생겼으면 해서 말해본 거였다? 얌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괜히 우리가 뭐가 되냐. 너 안 좋은 거 가지고 놀린 게 되잖아.”

    능력에 대해서 생각 중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적당히 둘러댄 것이지만 경태와 종환의 표정은 대번에 어두워졌다.

    “됐어, 됐어. 아무튼 그런 것 때문에 좀 생각 중이었다는 거지.”

    분위기가 처지긴 했지만 이걸로 마무리가 되었다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에게 한숨 섞인 종환의 말이 들어왔다.

    “진지하게 말하면 그건 방법이 없지. 나나 저 형, 그리고 너도 꽤나 오래 알았지만 이렇게 오해하기 일쑤인데. 그나마 오래 보다 보면 줄어들기야 하겠지만… 아, 그래. 요컨대 경험이라는 거지. 그래, 경험.”

    조금 전 경태가 소란을 피울 때 그도 꽤나 술이 들어간 듯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감정적이었다.

    “경험?”

    “그렇지, 경험. 결국 다 오래 보다 보면 알게 된단 거지. 우리 부장이 항상 나한테 지랄할 때 하는 소리거든. 아, 갑자기 부장 생각하니 열받네. 그 그지 같은 새끼가…….”

    푸념과 뒷담화로 넘어간 종환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들으면서 동민은 생각에 잠겼다.

    ‘결국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봐야 안단 건가.’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어딘가에는 그가 그리 멀지않은 날에 가 있을 유럽의 무대가 펼쳐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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