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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기회, 한 가지 선택 (113/270)
  • 두 가지 기회, 한 가지 선택

    ‘뭐지? 혹시 뭔가 알아채기라도 한 건가?’

    동민은 웃음으로 표정을 감추었지만 마음속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베이포트 FC의 구단주이기도 한 레이미 볼든의 말은 그저 농담 같지만 진실에 한없이 가까웠다.

    전반전까지 경기를 이끈 것은 주안이 아닌 동민이었으며, 후반전은 그의 예정과는 다르게 주안이 직접 움직인 결과였으니까. 전반전을 계획한 사람과 후반전을 계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는 그의 말은 정확한 사실이었다.

    빗나간 듯 중심을 꿰뚫고 있는 그의 말에 동민이 당황을 숨기려 웃기만 하고 말을 잇지 못하자, 철민이 곧 다시 말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후반전에 가서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골을 노리려던 것 때문에 농담으로 한 말이래요.”

    “아하하, 확실히 후반에는 좀 아쉬워지긴 했죠.”

    철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동민은 억지로 자신의 입을 재촉해 그가 내려준 동아줄을 붙잡았다.

    ‘농담인 척 그게 맞다고 해볼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고 그냥 웃으면서 지나가는 수밖에.’

    동민은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진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구단주라는 위치 탓에 가까운 자리에서 축구를 접한 만큼 예리한 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음식이 나올 때까지 동민은 그들과 지난 FA컵 결승전, 각 팀에 대한 이야기 등의 축구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민 씨는 선수 개개인에 대한 판단이 되게 빠르고 정확한 것 같아요. 동민 씨가 나랑 같은 일을 했다면 꽤 부담스러웠겠는데요.”

    식사도 거의 끝나가는 때, 철민이 오랜만에 볼든의 말을 통역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거기에 비할 바가 되나요, 너무 띄워주시는데요.”

    동민은 그의 말에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판단이 빠르다,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선수들을 한눈에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 덕이었다. 선수의 특징과 장단점 등을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는 이 능력은 상대 팀의 장단점을 모조리 밝혀 그 장점을 막고 단점을 찌르는 일에 유용했다.

    “아녜요, 경기들을 보면서 심형만 선수의 급한 성격을 노리자는 의견을 냈다고 했죠? 사실 심형만 선수 본인도 그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잘 걸려들지 않아요. 더군다나 그 점을 이용하려다가 만에 하나 수비수가 오히려 카드를 받게 되면 훨씬 더 위험성이 크니까요.”

    철민은 드물게 조금 흥분한 듯 끊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점을 알면서도 파고든다는 건 그만큼 그 선택에 자신이 있고 확실하다는 거예요. 그걸 실천해 낸 감독도 결단력 있지만 그 의견 자체를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걸요.”

    동민은 그의 말이 과장이라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반박하진 않았다.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그것은 겸손도, 오해를 푸는 행위도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일 것 같았다.

    “아하하,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합니다.”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런 그를 바라보던 볼든이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뭔가 말했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고 난 뒤에도 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에 동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그 말을 들은 철민조차도 무심코 되물을 정도의 말이었지만 그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철민은 약간의 당황이 섞인 얼굴로 동민을 보면서 말했다.

    “동민 씨, 믿기 힘들겠지만 지금 미스터 볼든이 말하길, 동민 씨 보고 자기를 따라가 보지 않겠냐고 하는데요?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면 베이포트 FC의 분석관으로서 일해주지 않겠냐고요. 물론 학비를 포함한 자금 지원을 약속하겠다는군요.”

    “그렇게까지 급하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는데요.”

    남자는 항의하듯 투덜거리며 영어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래도 직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뭔가 더 흥미가 솟아서 말이죠.”

    그에 반해 상대인 은발의 중년 신사는 껄껄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꽤 오랫동안 신세를 졌던 사이인 철민조차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선수들 개개인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팀 전체의 장단점에 대안 파악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제 고객의 이야기를 너무 신뢰하시는 거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장진운 선수도 그렇게 말했다기보다는 정황상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이야기였는데. 통역도 제가 했으니 오해했을 리도 없잖아요.”

    철민은 조심스럽게 레이미 볼든에게 말했다. 그들이 오늘 강동민을 본 것은 단순히 지난 FA컵 결승전에 있었던 전술에 대한 이야기나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련은 있지만 핵심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 결승전의 준비부터 전반전에 성남 페가수스가 보여주었던 전술들이 사실 감독이 아닌 전술분석관이었던 동민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철민이 그의 새로운 고객인 장진운에게 들은 정보였다.

    “글쎄요……. 처음부터 확신하진 않았지만 오늘 그와 이야기해 본 것으로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니까요. 미스터 최가 말한 대로 저 정도 나이에 판단이 빠른 점도 있지만 제가 본 장점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는 점이었거든요.”

    오늘 레이미 볼든이 동민과 이야기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하나였다. 동민은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다, 특히 선수 개개인에 대한 판단이라면 확신에 가까워 보였다.

    최고의 감독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가끔은 회의감이 들 수 있고, 심한 경우 의심하고 재고할 수 있다. 그러나 동민은 이야기할 때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선수는 이러이러한 특징이 있다고 꼬리표로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는 듯 확언하니까요. 그렇게 자신의 판단이 흔들리지 않는 점만 해도 동민은 꽤 재미있는 사람으로 보이거든요.”

    레이미는 웃으면서 예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철민 또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예시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동의합니다. 아까 심형만 선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그를 저보다 더 오랫동안 본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결과적으로 거기에 틀린 말도 없었고요.”

    자신이 에이전트 일을 하면서 찾아낸 최고의 보석 중 하나인 심형만에 대한 동민의 판단은 마치 자신보다도 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아는 듯했다. 만약 그것들 중에서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확신할 만한 말이 나왔다면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비웃고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동민이 한 말은 그가 듣기에도 심형만이라는 선수 개인에 대한 세세한 장단점을 찌르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승낙할 것처럼 보여요? 저 친구가 영어만 좀 더 잘했어도 미스터 최 통역을 빌리지 않고 내가 직접 말해봤을 텐데 말이죠.”

    “아직 모르죠. 다만 이런 기회를 놓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하며 헤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철민은 문득 생각난 듯 레이미를 향해 돌아보며 물었다.

    “미스터 볼든, 그런데 내 고객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동민 씨가 전반전 전술을 짠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의 질문에 레이미는 웃으며 답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반전하고 후반전이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상대를 파악하고 허점을 찌르려는 전반전과 그저 자신들의 축구를 보여주려는 데에만 집중한 후반전, 같은 사람이 구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거든요. 왜냐고 묻진 말아요, 그냥 감이 그랬으니까.”

    그의 말에 철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이 일에 종사한 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사업가로서, 그리고 구단주로서 언제나 느낌과 감을 믿고 살아가는 그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장진운 선수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저 사람의 감이란 게 진짜 무서워질 것 같은데.’

    ‘이걸 믿을 수 있을까? 꿈이라도 꾼 느낌인데.’

    동민은 손에 든 두 장의 명함을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한 장은 사업가이자 베이포트 FC의 구단주인 레이미 볼든의 명함,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심형만과, 이제는 장진운의 에이전트인 최철민의 명함이었다.

    ‘고민해서 결정한 뒤에 여기 있는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했었지. 하, 이런 사람들이랑 오늘 같이 밥을 먹었다는 사실도 신기한데 유학이라…….’

    동민의 손은 불안한 듯 계속해서 두 장의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물론 유럽 유학 자체는 원래 생각하던 거였으니까 고맙기 그지없지. 거기다가 비용까지 다 내준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 다만…….’

    동민이 망설이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지금 그에게 너무나도 형편이 좋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자신이 가서도 정말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이었다. 천천히 차근차근 준비하면서 협회의 유학프로그램을 통해 가는 것과, 지금 이렇게 급작스럽게 주어진 기회는 분명히 느낌이 달랐다.

    ‘전자는 내가 천천히 해가면서 외국어부터 다른 모든 것들까지 점진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협회에서 직접 하는 것인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장점이지.’

    그에 반해서 지금 레이미 볼든에 의해 주어진 기회는 느낌이 달랐다. 자신이 가서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면 이렇다 할 방법이 없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만일 그가 가서 제대로 배우고 성장하지 못한다면, 협회의 유학 프로그램처럼 다른 안전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대로 곤두박질칠지도 몰랐다.

    “생각지 못한 기회랑 고민거리를 동시에 얻어버렸네.”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하며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는 지금의 이 선택이 앞으로 자신의 앞길 전체를 좌우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끼며 고민에 빠졌다.

    동민의 떨리는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오르내리고 이윽고 상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동민 씨. 꽤 오래간만이네요. 결정은 다 끝난 건가요?”

    철민의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매끄럽게 수화기에서 귀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 말을 듣자 동민은 이미 결정한 사항인데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네. 안 그래도 그 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제 연락이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니죠?”

    처음 철민과 레이미 볼든을 봤을 때 이상으로 긴장해 굳은 동민의 목소리가 송화기를 통해 상대방에게 건네지고.

    “아, 아뇨.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미스터 볼든이 동민 씨에 대해서 저한테 물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의 말에 동민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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