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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미 볼든 (112/270)
  • 레이미 볼든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람.’

    동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대고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걸어가면서도 낯선 장소와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일했던 레스토랑도 이런 곳에 비하면 싸구려 같아 보이는데. 이래저래 긴장이 안 풀리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웨이터를 따라 걷다 보니 도착한 테이블에는 먼저 앉아 있던 남자가 있었다.

    “아, 오셨군요. 전화드렸던 최철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전화로만 연락드리고 직접 뵈는 건 처음이네요.”

    “예, 강동민이라고 합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남자에게 동민은 어색하게 대꾸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때부터 느꼈지만 상당히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 어색하기 그지없네,’

    동민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돌아가게 된 건지 떠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강동민 씨. 저는 최철민이라고 합니다.

    낯선 목소리와는 반대로 친근한 말투에 동민은 머릿속에는 몇 개의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누구… 시죠?”

    동민의 경계심 섞인 반응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쿠, 그걸 말씀 안 드렸네요.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축구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최철민이라고 합니다. 심형만 선수의 에이전트이기도 하죠.

    그 말에 동민의 머릿속에서 수원 블루 데빌즈의 에이스였던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성남 페가수스를 결승전에서 무너뜨린 장본인이자 K리그 최고의 스타 선수라고 할 만한 그의 에이전트라는 말에 동민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네, 반갑습니다. 저기 무슨 일로, 아니, 그것보다 이 번호는 누구한테…….”

    -하하하, 갑자기 전화를 드려서 놀라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는 분들 중 한 분이 강동민 씨와 만나뵙고 싶다는 말씀을 하셔서 이렇게 번호를 다른 분께 여쭤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만나뵐 수 있을까요?

    “네?”

    이미 동민의 이해의 범위를 뛰어넘어 가버린 그의 말에 동민은 바보처럼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대화의 결과가 지금 이 자리에서의 만남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말로만 듣던 보이스 피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스로에 대해서 꾸밈없이 털어놓는 철민의 말에 어느샌가 만나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만 동민이었다.

    “일단 앉으시죠. 상대분이 길이 약간 막히셔서 3분에서 5분 정도 늦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아마 오래 걸리지 않아서 도착할 겁니다.”

    “아, 예.”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아 동민은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묻지 못했던 말들을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 번호는 누구한테…….”

    “얼마 전에 장진운 선수하고 계약을 했는데, 장진운 선수가 주장인 오명진 선수에게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급하게 연락을 드리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바람에…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철민의 사과에 동민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동시에 자신의 번호를 알려준 사람이 결국 명진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남 페가수스 팀을 떠난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난 상황에서 동민의 번호를 가진 이는 그밖에 없을 터였다.

    ‘애초에 주장을 떠나서 그 사람만큼 여기저기 붙임성이 좋아서 발 넓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잠깐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고.’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지만 가벼운 태도로 웃으며 인사하던 명진의 표정이 떠오르는 동민이었다.

    “그러면 저를 만나보고 싶다던 분은…….”

    “그분은… 아, 마침 저기 막 오시네요.”

    철민은 그에게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외국인 중년 신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미스터 최, 늦어서 미안합니다. 마지막 회의가 생각보다 조금 더 늦어지는 바람에 늦어버렸군요.”

    “미스터 볼든, 제가 돕기로 했지만 일단 이분한테 먼저 말씀드려야 할 일이 아닐까요?”

    눈앞에서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지만 동민은 두 가지 이유 탓에 그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타난 사람이 생각도 못한 은발의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얼어버린 탓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하고 있는 말이 100% 영어였던 탓이다.

    ‘인사를 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자 푸른 눈의 신사가 동민에게 고개를 돌리며 악수를 청해왔다.

    “반갑습니다, 레이미 볼든 이라고 합니다.”

    어색한 발음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한국어였기에 동민은 당황하면서도 손을 맞잡고 대답할 수 있었다.

    “바, 반갑습니다. 강동민이라고 합니다!”

    당황한 탓에 엇나가 버린 목소리가 레스토랑 내에 울렸지만 다행히 그들은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레이미 볼든이라는 중년의 신사가 도착하고 동민이 당황하는 동안 어느새 주문은 끝나 있었다.

    “저, 저기, 이게…….”

    “아,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 분은 영국에서 사업을 하고 계시는 레이미 볼든 씨입니다. 잉글리시 챔피언십에 속한 구단인 베이포트 FC의 구단주이시기도 하죠. 한국어는 정말 조금밖에 못하셔서 친분이 있는 제가 같이 나온 거고요.”

    “잉글리시 챔피언십… 이요?”

    동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라면 유럽의 빅 리그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거대한 리그였고, 잉글리시 챔피언십은 K리그로 따지면 K2리그 같은 프리미어리그의 하부 리그였다. 물론 하부 리그라고 해도 그 규모는 K리그 이상인 커다란 리그였다.

    ‘챔피언십 구단의 구단주가 왜 나를…….’

    동민이 충격에서 벗어나 의문으로 향할 때 레이미 볼든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철민은 동민을 위해 곧바로 그 말을 해석해 주었다.

    “강동민 씨가 지난 FA컵 결승전을 대비해 수원 블루 데빌즈의 분석을 맡았던 것이 맞나요?”

    “예? 예. 그건…….”

    생각지 못한 질문에 동민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원 블루 데빌즈와의 결승전이 벌써 거의 한 달 전에 있던 일인 만큼 그가 입에 담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볼든 씨가 그 경기를 보고 굉장히 인상 깊었다고 하시던데요.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강점을 막아내고 약점을 파헤치면서 승리를 노리는 방법이라고요. 경기에 대한 준비 자체가 굉장히 철저했던 점이 멋져 보였다고 하시더군요. 분명히 상대 팀에 대한 훌륭한 분석이 먼저 있었을 거라면서요.”

    “아, 감사합니다.”

    그의 칭찬에 동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슬쩍 고래를 들었다.

    ‘준비는 철저했지만 이후 대처에서 완전히 뒤집혔으니까. 상대 에이스인 심형만의 심리를 흔들면서 그를 막아낼 쓰리백이 후반전에 교체로 붕괴되고, 그 이후로는 팀 대 팀이라는 느낌보다는 심형만과 장진운이라는 양 팀 에이스들의 치고받는 혈전에 가까웠지.’

    이제 와서 하프타임에 주안이 돌변한 것에 화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후반전부터는 그렇게 철저하게 대비했던 모습들이 사라지고 장진운 선수한테 맡기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요.”

    “그건… 확실히 아쉬운 점이죠.”

    그것은 주안의 독단이었다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동민은 그 말을 눌러 삼켰다. 이야기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말한다고 믿어줄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상대가 그저 그 경기를 위한 사전 준비와 분석이 좋았다는 칭찬을 하려는 것이라면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 그가 할 말은 없었다.

    ‘그런 비틀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내 탓도 있었으니까.’

    동민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볼든 씨가 상대 팀인 수원 블루 데빌즈를 어떻게 보고, 어떤 방식으로 그 경기를 준비했는지 한번 듣고 싶다고 하시는데 괜찮다면 말씀해주시겠어요?”

    철민의 말에 동민은 한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미 지난 일인데 뭐.’

    그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수원 블루 데빌즈를 보았는지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그전에 있던 수원 블루 데빌즈를 보면서 깨달은 것은…….”

    처음에는 긴장해서 더듬거리던 동민이었지만, 말하면서 점점 더 말이 매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자신이 속한 팀인 성남 페가수스보다 개인 기량이 월등히 뛰어나기에 선수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경기를 해야 했고, 이는 각 선수들의 장점들을 살리는 플레이가 필요했다는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수원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인 심형만의 약점으로 그의 불같은 성격을 반대로 이용해야 했다는 말에 철민은 쓴웃음을 지었고, 레이미 볼든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방법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방법 외에는 수원의 장점을 막는 것도, 성남의 장점을 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동민의 말이 철민의 통역을 거쳐 귀에 들어가자 볼든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가 한 말은 이번에는 반대로 철민의 통역을 통해 동민의 귀로 들어갔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치 그 초반 전술 자체를 동민 씨가 짠 게 아니냐고 하시네요. 상대와 자신의 팀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설명한다고요.”

    그 말에 동민은 당황할 뻔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시다시피 제가 어떤 분석을 해오더라도 전술을 직접 짜는 건 감독의 몫이니까요. 저는 그저 상대를 보고, 분석해서 가져오는 역할뿐인걸요.”

    동민은 그 말을 하면서 보이지 않게 살짝 주먹을 쥐었다. 듣는 사람이 믿을 리가 없기에, 자신이 한 일을 자신이 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아냐, 이런 기분이 들 필요도 없지. 이미 지난 일인걸 뭐.’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볼든은 동민의 말을 전해 듣더니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말을 시작했다.

    “물론 그 경기에서 전술을 직접 짜낸 건 감독이겠지만 반대로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전혀 다른 팀처럼 만든 것도 감독이기 때문에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로 칭찬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하시네요. 물론 제 생각도 비슷해요. 후반전에서는 전반전에 그런 경기력을 보여준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딴판이었으니까요. 아, 혹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철민의 말에 동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녜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게 맞으니까요.”

    동민이 쓴웃음으로 그렇게 넘기려는 찰나, 철민의 입을 빌어 볼든의 말이 한번 더 그에게 떨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전반전을 계획한 사람과 후반전은 계획한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네요.”

    웃으면서 말하는 그의 말에 동민은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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