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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만남 (111/270)
  • 또 다른 만남

    명진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진운은 집으로 향하면서 복잡해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시즌의 마무리를 앞두고 급작스럽게 팀을 떠난 정광호와 강동민, 한수연 세 명과 주안의 관계.

    동민이 주안의 알려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금까지 FA컵 경기들을 주안이 아닌 동민이 주도했을 가능성.

    명진이 말했던 그 모든 것 외에도 사실 지금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요소는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이적인가. 저 형은 진짜 어디서 저런 걸 알아오는지 모르겠어. 아직 말한 적도 없는데. 하여간 눈치인지 감인지 저런 부분은 탁월하다니까. 감이 좋은 거야, 아니면 자기 생각에 골머리 앓는 와중에도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챈 거야?’

    진운은 얼굴을 찡그렸다.

    수원 블루 데빌즈와의 결승전 이후,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심형만의 에이전트인 최철민이라 밝히면서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과 계약하고, 심형만이 이적하면 그 대체자로 수원 블루 데빌즈로 가는 것은 어떠냐, 라……. 정말로 어찌 보면 꿈만 같은 이야기네.’

    그는 철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더욱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지금의 에이전트와는 그렇게 각별한 관계도 아니었고, 계약을 끊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팀 내의 분명한 위치에도 잦은 부상 때문에 그의 에이전트는 점점 사이가 멀어지고 있는 추세였다.

    그렇기에 철민의 제안은 진운에게는 커다란 유혹이 되었다. 조금 더 자신의 장점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그의 말은 진운에게 말 그대로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은 소리였다. 게다가 수원 블루 데빌즈라는 K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으로의 이적 또한 분명 그에게 큰 도전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조금 전 명진의 이야기를 들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심형만의 대체자를 필요로 하는 수원 블루 데빌즈에서 그의 에이전트였던 사람의 추천까지 받는다면 분명 갈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겠지만…….’

    이적이라는 자신의 일까지는 겉으로 표시내지 않고 있을 수 있던 그였지만 명진이 말해준 이야기까지 엮이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일단은 집에 가자. 지금 당장은 어느 쪽 문제든 너무 복잡해.’

    그렇게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정리는 어느 정도 되셨나요?”

    철민은 미소를 지으며 진운에게 물었다. FA컵 결승전이 있고 2주 뒤, 철민은 그동안 재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의 가장 큰 고객인 심형만의 협상 테이블을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시에, 자신의 고객으로 점찍은 진운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껏 부상이 잦았다고 저런 재능을 대충 손 놓고 있던 게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이었지.’

    그가 FA컵 결승전에서 보았던 진운은 타입은 다르지만 또 한 명의 심형만과도 같았다. 팀을 이끌어가는 에이스이면서 동시에 경기의 분위기와 결과를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퍼포먼스를 가진 선수, 그것이 그가 본 장진운이었다.

    혹시 그 경기에서만 그런 활약을 보인 게 아닐까 해서 찾아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근 몇 년간 계속해서 부상에 발목을 잡혔지만 경기에 나오면 꾸준한 경기력을 보여준 것이다.

    ‘심형만 이적에만 집중하느라 내가 지금껏 몰랐던 게 멍청한 짓이었다. 이 선수는 진짜야.’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수록 그는 확신했다. 그를 잡아야 한다고. 그 결과,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진운과의 계약을 눈앞에 둘 정도로 일을 진행시킨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저와 계약하실 경우 수원 블루 데빌즈로의 이적을 추진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 고객인 심형만 선수가 이적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체자를 찾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또한, 부상 예방을 위한 지원도 확실히 해드린다고 약속드리죠.”

    철민은 진운에게 더 확실한 쐐기를 박아 넣듯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진운이 입을 열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계약하고 있는 에이전트와의 계약을 끊고 새 계약을 맺도록 하죠.”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죠.”

    그의 대답에 철민은 웃으며 말했다. 형만 때문에 보게 된 경기에서 생각지 못한 진주를 얻어낸 느낌이었다.

    ‘이제 승강제가 시작되면 더 그렇겠지만 K2리그 같은 하부 리그에 대해서도 더 확실한 정보들을 수집해야겠어. 이번에 장진운을 얻은 건 본래 에이전트나 다른 사람들이 부상이라는 그림자 때문에 선수를 제대로 못 본 행운의 결과니까.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나중에 또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채가는 사람이 나라고는 장담 못 해.’

    철민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진운은 말을 더했다.

    “참, 그리고 이적 건은 조금 더 생각하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시즌도 이제 거의 끝나가지만 더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해서요.”

    “물론이죠.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니까요.”

    진운을 잡았다는 생각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수원 블루 데빌즈로의 이적은 그가 심형만 건을 통해서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지 강제가 되는 것이 아닌 만큼 진운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다.

    ‘물론 이적하는 것이 지금의 성남 페가수스 팀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굳이 장진운이 원한다면야.’

    그는 즐거운 미소를 입가에 띠면서 진운과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아.”

    한참 동안 계약의 이야기를 하던 철민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지어지자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이야기가 마무리되 어가는 와중에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진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 이건 일 쪽으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서 곁다리로 알아보는 거니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번에 있었던 FA컵 결승전, 그때 성남 페가수스의 전술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의 질문에 진운은 얼굴을 굳혔다. 얼마 전 명진에게 들었던 말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 이후 혼자서 생각에 빠졌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들을 최대한 빠르게 숨겼다. 상대가 어떤 일을 물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예민한 반응을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때의 전술인가요? 아시겠지만 저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도 당연히 감독님의 지시에만 맞춰서…….”

    “아뇨, 아뇨. 그런 복잡한 게 아니고요. 그저 지인이 그때 수원 블루 데빌즈에 대한 분석이나 스카우트 보고서 작성을 한 사람이 누군지 묻던데 혹시 그때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 해서요.”

    진운은 이번에야말로 머리가 멈추는 듯했다. 철민은 그가 요 근래에 가장 고민하던 것의 핵심에 곁다리로나마 발을 디딘 것이다.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진운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집에 붙어 있는 건 확실히 장난 아닌 배짱이 필요한 일이었어.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얼마나 똥배짱이 세서 그러고 살았는지, 참.”

    동민은 한숨을 쉬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성남 페가수스 팀에서 나온 지 벌써 3주가 넘은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영어 공부와 유학 프로그램 준비, 그리고 집안일이었다.

    그의 손에서는 세제가 잔뜩 묻은 수세미와 그릇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감독님 덕에 이야기가 좀 잘 풀려서 다행이지.”

    동민은 팀에서 나왔다고 털어놓았을 때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다시 자신의 꿈인 축구의 길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응원해 주던 가족들이었지만, 그 응원의 결과가 갑작스러운 퇴사로 이어진다면 좋아할 가족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의 반동이 따라오는 법이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그였다면 그가 일 년이 아니라 한 달도 못 채우고 나갔다고 해도 그만큼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거는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닳아가서 결국 거의 남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의 아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겠다며 노력했고, 그 결과도 좋았다. 그만큼 부모님은 그에게 기대를 하고 있던 것이다.

    ‘감독님이 중간에서 이야기 안 해주셨다면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득하네.’

    그가 선수였던 시절부터 부모님과 알고 있던 병렬이 협회의 지원으로 가는 유학 프로그램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날 동민은 벌거벗은 채로 집 밖으로 쫓겨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그가 하는 설거지와 같은 집안일과 공부를 병행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팀에서 나온 이유가 젊은이 특유의 혈기로 인한 사고라고 생각한 그의 부모님은 세상에 쉬운 일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그에게 집안일을 시킨 것이다.

    “정말로 돌아오기 전보다 훨씬 빡세진 느낌이란 말이지. 그때는 이미 반쯤 포기한 자식이라는 생각이셨겠지만.”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열등감도, 과거의 자신을 겹쳐보는 나약한 면도 지금은 많이 벗어난 그였다. 주안과의 불화로 팀을 나온 일 또한 자신의 부족한 면 탓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전보다 생각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래, 아무것도 끝난 건 없으니까 다시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는 길을 붙잡아야지. 일단은 유학 지원 프로그램 합격, 그리고 지금 당장은 이 설거지부터…….’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남은 컵과 그릇들을 닦는 그에게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감독님은 이 시간에는 바쁠 테고. 경태 형이나 종환이 형이 외근이라도 나와서 전화 건 건가? 아니면 설마… 수연 씨한테 연락 올 일이라도 있던가. 그 외에는 요즘 연락하는 곳이 거의 없는데. 이도 저도 아니면 부모님이 급하게 시킬 일이라도 있나.’

    동민은 바쁘게 남은 그릇들에서 거품기를 씻어내고, 급하게 달려가 핸드폰을 받았다.

    “예, 여보세요?”

    그러나 수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그가 생각한 그 누구와도 달랐다.

    -예, 강동민 씨, 맞으신가요?

    매끄러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동민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서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있는지를 떠올렸지만 떠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그는 요즘 보이스 피싱인지 뭔지 하는 범죄가 늘어났다는 소식을 떠올리며 약간의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그의 질문에 상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강동민 씨. 저는 최철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동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또 한 번의 만남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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