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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명진이 본 것은 (110/270)
  • 그날, 명진이 본 것은

    “어, 왔냐.”

    진운이 명진의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향하자, 그곳에는 명진이 어딘가 초췌한 얼굴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이렇게 따로 카페에서 보자고 한 거예요?”

    평소에는 아저씨인 자신이 뭐 하러 그런 곳을 가냐며 농담하던 명진이었기에 진운은 장난을 담아 말했지만, 명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전화로 하기에는 뭔가 네가 오해하거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괜히 그런 상황은 안 만드는 게 낫지. 일단 앉아.”

    명진의 반응에 진운은 대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하이고, 평소에도 그런 부드러운 배려를 좀 보여줬으면 좋으련만. 누가 보면 007이라도 찍는 줄 알겠네요.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진운은 그 질문에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그날 자신이 들은 것을 말했다.

    수원 블루 데빌즈와의 결승전 직후, 명진은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서던 중 주안이 동민과 수연, 두 사람과 함께 어딘가로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응? 뭐야, 아까 그 두 사람에 감독이네.’

    후반전이 시작하기 직전, 동민이 주안과 충돌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벤치에 있던 다른 팀원들에게 들었던 명진이었다. 주안과 동민이 평소에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렇다고 경기 중에 충돌할 정도의 일이 벌어진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슬쩍 가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으려나.’

    그렇게 명진은 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방문 밖에서 그가 듣게 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분명히 이번 경기까지 제가 맡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멋대로 전술을 바꾸다니요!”

    동민의 성난 목소리가 문 밖에서도 뚜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 말을 들은 명진은 이게 무슨 말인지 잠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당신이 맡다니요? 갑자기 억지를 부리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완전히 뚜껑이 열리다시피 한 동민과는 달리, 가벼운 목소리의 주안은 천연덕스럽게 그를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 경기까지 맡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쟤는?’

    명진은 동민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가 저토록 격분해 소리를 치는 것을 보면, 그가 단순히 주안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동민의 그다음 말을 듣는 순간 명진의 머릿속에서는 전주 드래곤즈와의 8강전부터 있었던 작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긴 당신이 나랑……!”

    동민의 말은 불꽃이 갑자기 사그라지듯 급하게 끊어졌지만 그 말은 명진이 가지고 있던 의심을 다시 되살려냈다.

    ‘전주 드래곤즈와의 8강전에서 묘하게 건성이었던 감독의 태도, 그 경기에서 감독이 하지도 않은 일을 거짓말로 만들어내면서라도 진운이한테 격려를 해달라고 부탁했던 일, 그리고 그 경기부터 4강전, 결승까지 묘하게 감독이 전술을 이야기할 때 위화감이 들었는데…….’

    명진의 머릿속에서 끼워 맞추기라고 할 만한 추측이 잠시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지.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음모론 같은 생각을 하겠어.’

    그는 스스로 부정했지만 그런 작은 조각들이 조금씩 모이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가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감독의 태도가 이상했던 건 오늘을 포함한 FA컵 경기들뿐이었지. 평소에는 한 골, 한 골에 목이라도 걸려 있는 듯 예민하지만 이상하게 FA컵에서만큼은 그런 느낌이 적었단 말이야. 심지어 8강전은 감독이 그렇게 이를 갈고 갈던 손홍진 감독의 전주 드래곤즈였는데.’

    FA컵 8강전 직전에 있던 리그 경기에서 역전패당한 것을 그토록 분해하던 주안이었지만 그 날은 달랐다.

    ‘역전패당하고 나서 진이 다 빠진 걸까 싶었지만 감독 성격에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그렇다면 대체…….’

    명진의 머릿속은 복잡하리만큼 빠르게 회전 중이었다. 지금껏 스스로에 대해서 적어도 나이를 먹은 만큼은 눈치와 생각이 있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지금 자신의 가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정말로… 정말 만약에… 저 녀석의 말처럼 일부 경기들을 감독이 맡아서 지휘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성격 더러운 감독이라도 그렇게 열을 내지 않을 이유가 되겠지.’

    명진이 자신의 가설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동민의 말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이제 와서 없었던 걸로 돌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좋아요, 그러면 저는 당장 제가 아는 모든 곳을 다 통해서라도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전부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약속을 깬 건 감독님이니까요.”

    그 말은 명진의 의심에 더욱 가속을 붙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의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에 명진은 눈을 찌푸렸다. 그의 상상보다 더욱 많은 정보들이 새어나와 도리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혼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점점 더 규모를 늘리고 있었다.

    “약속을 깨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억지 부리면서 당신을 특별 취급해 주던 정광호 그 사람한테 연락이라도 해보게요? 그런데 동민 씨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거 같은데…….”

    주안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짧은 침묵을 지키다 말을 이었다.

    “정광호, 그 사람은 이미 단장 자리에서 물러났거든요. 대략 두 시간쯤 전에 자기 발로 구단을 떠난다고 했고 구단에서는 받아들였죠. 연락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걸요?”

    그 말은 명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단장인 정광호가 구단을 떠난다는 소식은 주장인 그조차 아직 듣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민이 광호에게 뭔가를 털어놓는 것으로 주안을 압박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했다. 그런 광호가 떠났다고 동민에게 말하는 주안의 목소리에는 명백하게 그를 향한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뭔가가 커다란 일이 있던 건가. 정광호 단장 이름까지 나오고, 그 사람이 갑자기 나간다니 이거 내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잖아.’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들의 사소한 개인사까지는 아니어도 꽤 많은 일들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고, 구단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아예 먹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처음 듣는 일이 지금 방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명진이 너무 많은 정보에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정리하려는 찰나, 또 한 가지 충격이 그를 덮쳤다.

    “아, 그리고 조금 전에 이번 경기는 자신이 맡느니 어쩌니 했던 것, 그리고 경기 중에 팀 분위기를 흐린 책임을 물어 이 시간부로 해고할 것을 구단에 요청하겠습니다. 당신도, 그리고 한수연 씨도 마찬가지예요.”

    뒤에 이어지는 주안의 말은 명진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강동민에 수연 코치까지?’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에 드디어 명진의 머리는 정보 포화가 일어난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안의 말을 들은 것은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지금까지 수고했어요. 두 사람의 의사는 제가 확실히 구단에 전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빠르게 짐들을 정리해 줬으면 좋겠군요. 가능하면 내일 당장. 그럼 앞으로 마주치지 않길 바라죠.”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주안의 목소리에 명진은 혼란스러운 머리로도 더 이상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하게 자리를 떠서 샤워실 근처로 향했고, 그 직후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주안이 그를 앞질러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시즌도 아직 안 끝났는데 단장님도 갑자기 그만뒀다는 소식이 들리고, 강동민 분석관이랑 한수연 코치도 그만둔 거라고요? 그 말은…….”

    명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운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말을 얼버무리자 명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 그런데 요 며칠 동안 생각해 봤는데 생각할수록 이상한 게 하나 더 생겼어.”

    “그게 뭔데요?”

    진운이 불안한 어조로 묻자, 명진은 말했다.

    “너 감독이 메모하는 거 본 적 있냐?”

    “메모요?”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진운은 지금껏 주안과 지내온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가 메모를 중요시하는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주안은 메모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대로 두는 편이었다. 결국 기억을 뒤적거리던 진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웬 메모요?”

    진운의 말에 명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을 내뱉었다.

    “전주 드래곤즈하고 있던 FA컵 8강전부터 FA컵 때에만 감독이 메모를 보면서 전술 설명했던 거 기억나?”

    “예? 메모요?”

    “그때 대화를 듣고 나서 경기마다 감독한테 이상하게 느꼈던 위화감이 뭔지 생각해봤거든. 요 며칠간 고민해 봤는데 떠오른 게 그거야, 메모.”

    명진의 말을 들은 진운은 무슨 말을 하냐며 대답하려 했지만 그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머릿속에 지난 전주 드래곤즈의 경기부터 FA컵 경기마다 전술 설명 때 메모를 들고 있던 주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메모…….”

    “그래, 너도 기억하지. 생전 메모라고는 하지도, 보지도 않던 양반이 손에 종이쪽지를 보고 있었으니까.”

    명진의 말에 진운은 머리부터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겨우 그걸로……”

    “그래, 그거 하나만 가지고는 말이 안 되지.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뭔가 묘하게 감독이 생각하지 않을 전술이기도 하고, 동시에 FA컵 경기마다 강동민 그 사람이 감독보다 더 진지해져서 바라보기도 했지. 나보고 너를 위로하라고 했던 것처럼.”

    명진의 그 말을 듣자 진운은 머리끝부터 내리쳤던 벼락이 다시 등골을 따라 올라오는 듯한 충격이 들었다.

    “…그리고 보면 결승 전날, 강동민 분석관이 저보고 감독님이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것도…….”

    혼란에 빠진 진운의 표정을 보면서 명진은 어깨를 들썩였다.

    “어쨌든 이렇게 말은 하지만 확신이 든 건 아니야. 확실한 증거는 없지. 다만 그 두 사람하고 단장이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둔 일, FA컵 경기마다 보여줬던 감독답지 않은 태도, 그 전부가 어쩌면 하나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거야. 내가 주장인 이상 이런 허무맹랑해 보이는 가설을 그대로 믿고 감독한테 따질 수도 없는 거고.”

    명진은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것을 모두 다시 뒤집듯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 말에 더욱 표정을 찌푸리던 진운에게 명진은 뒤이어 말했다.

    “너한테 이 일을 이야기하는 건 주장인 나는 사실이 어찌 되든 팀의 결집을 위해서 모른 척해야 하거든. 그런데 너는 나름대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니까. 나처럼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혹시나 만약에 네가 나중에 다른 팀을 간다고 해도 말이야.”

    명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을 마치고 얼버무리듯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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