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변화의 의미 (109/270)

변화의 의미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병렬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짐을 챙겨 팀을 나온 다음 날, 동민은 약속한 대로 병렬의 전화를 받고 카페로 나와 있었다. 병렬이 자신을 내치지 않을 거라는 뜻은 전해 들었지만, 역시 곧바로 만나는 것은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 동민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병렬의 대답은 무조건 나오라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보자마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너무 급한 게 아닐까요……. 일단 어디 들어가면서…….”

대면하자마자 인사 대신 던져진 질문에 동민은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병렬이 물어볼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자마자 이야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하는 말이다. 네가 생각이 있다고 팀에서 뛰쳐나온 거니까 그 생각을 한번 들어보자는 게 아니냐.”

그러나 병렬의 태도는 확고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이야기가 우선이라는 듯 동민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병렬의 태도에 결국 동민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외국으로 떠나겠다, 그 이야기냐?”

병렬이 들고 있던 물컵은 입도 대지 않고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협회 측에서 B급 라이선스 이상을 가진 사람들을 위주로 뽑아서 학비를 대주면서 영국이나 독일 쪽에 유학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어요, 물론 성적에 따라서 지원금이 달라지겠지만. 우수한 국내 지도자들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이니 뭐니 하던데 다행히 저는 그 조건에 맞으니까요.”

동민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주안을 상대로 당당하게 팀을 나가겠다고 한 행동의 배경에는 그것이 있던 것이다.

“…그것에 관해서 언뜻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만, 그 경우에는…….”

“일단은 다시 K리그로 돌아오는 것이 정해진 길이지만 가끔 그쪽에서 성적이 좋거나 하면 아예 유럽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요.”

“만약 네가 돌아오지 않고 그쪽에서 일하게 된다면 네가 여기서 땄던 B급 라이선스는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알고 있는 거냐?”

병렬은 어딘가 편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동민이 지난 2년 동안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잘 알고 있는 그인 만큼, 동민의 지난 시간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만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쪽에서는 또 따로 따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그렇게 노력해서 딴 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 방법을 시도해 보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동민은 자신 있는 태도로 대답했다. 그때의 2년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제야 지원서 넣는 거니까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거죠.”

동민의 이어진 말에 병렬은 잠시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듯 물을 들이켰다.

“…그렇구먼. 그래서 그 지원을 언제까지 받는 거냐?”

“올해 말까지로 알아요. 서류 심사에 면접 거치고 해서 잘될 경우에는 내년 여름에는 유럽으로 가는 거죠. 그전까지 영어 공부랑 이것저것 준비할 걸 생각하면 빠듯하긴 빠듯하네요.”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외국어 공부라도 더 착실히 했어야 한다며 동민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만약에 떨어지게 되면…….”

“만약에 이번 년도에 안 된다면 다음 년도를 노려보는 것도 생각 중이에요. 사실 처음에는 이런 길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생각할수록 더 큰 곳에서 배우고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병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동민의 대답에 막혔다. 대답을 하는 동민의 눈에는 결승전이 끝나고 보였던 혼란과 자책은 없었다. 자신이 했던 일을 넘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눈이었다. 걱정을 담은 말을 더 하려 했던 병렬은 그런 동민의 눈을 보고 입을 닫았다. 자신의 말이 더 이어져 봐야 어린 제자가 힘차게 나아가려는 길에 늙은이가 발목을 잡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부모님에게는 말씀드린 거냐?”

병렬은 이미 마음을 정해 버린 듯한 제자를 보면서 아쉬움을 담아 물었다.

“일단 지원서 넣고 나서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생각 중이에요. 아무래도 뭔가 좀 보여 드릴 만한 결과가 나오고 나서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말씀드렸다가 결과가 제대로 안 나오기라도 하면 부모님 볼 면목이 없으니까요. 아하하…….”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근래에 부모님이 바쁜 탓에 아직 팀에서 나온 것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좋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지. 아니, 일단 팀에서 나오게 됐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감과 희망에 차 있던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그 표정 보니까 아직 팀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안 했구먼. 하이고, 이 녀석아.”

병렬은 조금 전까지 자신 있게 말하던 동민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아쉬움이 누그러지는 것에 내심 자신에게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말씀드리게 될 때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거라. 가능한 한 부모님한테 연락을 드려서라도 도울 게 있으면 도와줄 테니.”

그 말로 병렬은 이야기를 끝냈다.

병렬은 동민과 헤어진 채 홀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쌀쌀해지는구먼. 하여간 날씨도. 금방 휙 바뀌어 버린다니까.”

동민과 저번에 본 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닌데도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때는 그놈이 어린애 같아진 것에 실망했는데… 역시 젊은 놈이라 바뀌는 게 참 빨라.’

얼마 전, 이 길을 걸으면서 동민이 예전과는 달라진 것에 실망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동민은 혼자서 뚝심과 고집, 신중함과 유약함의 균형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배움을 얻고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병렬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 젊은 만큼 자기 잘못을 알고 고쳐 나가면 좋은 거지. 그에 반해서… 나도 늙은 건가.’

병렬은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 동민과의 대화에서 그가 유럽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씁쓸했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까지도.

‘나름대로 제자라는 놈이 손이 안 닿는 먼 곳으로 떠난다니까 아쉬웠던 거지. 하여간 나도 나이가 먹었어. 눈에 보이는 곳에서 그놈이 얼마나 커갈지 보고 싶다는 욕심이나 부릴 뻔했으니 그놈보고 뭐라고 말할 게 아니었구먼.’

가능하면 가까이 있는 성남 페가수스에서 그가 커가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동민이 외국 유학의 길을 간다면 정광호를 소개시켜 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협회의 프로그램인 이상 동민이 뽑히는 것은 오로지 동민의 실력에 달려 있었고, 외국에 나가게 된다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놈이 잘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민이 자신의 능력을 잘 펼칠 수 있길 바라면서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저번에 보았을 때와는 시간도, 상황도 그리고 느끼는 감정도 달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만은 똑같다는 생각에 병렬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어쨌든 응원뿐이구먼.’

병렬의 웃음소리가 쌀쌀한 가을밤의 바람을 타고 조용히, 그러나 멀리 퍼져 나갔다.

“형, 명진이 형? 뭐 해요?”

명진은 들려오는 진운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자신에게 오던 공은 어느새 내민 발을 넘어 저 멀리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 미안하다. 잠깐 놓쳤어.”

“형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며칠 전부터 영 상태가 비리비리하니 이상한데.”

“아냐, 아냐. 별거 아냐. 괜찮아.”

진운의 걱정하는 말에 명진은 고개를 젓고 다시 훈련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 한 구석에는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라커 룸에 들어오자 진운이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속삭였다.

“대체 왜 그래요? 그때 우승 못 한 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번에 승격하고 다음 시즌 기약하면 되잖아요. 그냥 아까웠다고 하고 넘기자고요. 그걸로 계속 신경 쓰고 그러면 시즌 마무리만 더 이상해진다니까.”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라… 어쨌든 괜찮아. 아까 잠깐 집중이 안됐던 것뿐이야. 미안하다.”

명진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지만 진운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형이 훈련에 집중 못 하는 일이 흔한 일도 아니고 그 말을 믿으라고요? 다른 애들도 티는 안 내도 죄다 형 무슨 일 있던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나한테도 말 못 할 일이라 그래요?”

진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을 흘끗흘끗 바라보는 다른 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정도로 신경 쓰이게 했던 건가. 주장으로서 애들 모으지는 못할망정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나.’

다른 팀원들에게도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명진은 쓰게 웃고 대답했다.

“정말로 별거 아냐. 내일부턴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 야, 니들도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고맙긴 한데 니들이 다 그렇게 보면 이 형이 창피하잖냐. 아무튼 다 괜찮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명진은 진운뿐만 아니라 라커 룸에 있는 다른 팀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말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먼저 짐을 챙겼다. 그의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그를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눈빛으로 각자의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면서 명진은 먼저 라커 룸을 뒤로하고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서기 전 바로 옆에 있던 진운에게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속삭임으로 그에게 말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따가 이야기해. 저녁에 따로 연락해서 말할 테니까.”

명진의 대답을 들은 진운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는 여기서 그대로 대답하거나 되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뭔가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긴 있단 거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 형이 저렇게 며칠이나 제대로 집중도 못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진운은 명진이 먼저 나가 버린 라커 룸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아는 명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훈련 때에 집중을 못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이가 아파도 일단 훈련에 들어서면 누구보다 노력하는 것이 그가 알고 있던 명진이었다.

‘이따가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진운은 그렇게 다짐했다.

0